•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효성왕

연관목차보기

효성왕

기본정보

신라 제34대 왕
생몰년: ?-742
재위기간: 737-742

일반정보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성덕왕 16년(717)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왕비는 혜명(惠明)이다. 그는 재위 6년째 되던 742년 5월에 승하하였는데, 시호를 효성이라 하였다. 유명(遺命)에 따라 법류사(法流寺)에서 화장해 유골을 동해에 뿌렸다.

전문정보

신라 제34대 효성왕은 제33대 성덕왕의 둘째 아들로, 성은 김씨, 이름은 승경(承慶)이다. 형인 태자 중경(重慶)이 성덕왕 16년(717)에 죽었으므로, 724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성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어머니는 소덕왕후(炤德王后)이고, 왕비는 혜명(惠明)이다.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효성왕비에 대해 혜명만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삼국사기』에서는 효성왕비에 대해 착종된 기록을 나타내고 있어 이를 효성왕대 정국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견해들이 등장하였다. 먼저 『삼국사기』의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당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비 박씨를 책봉하였다.(唐遣使 詔冊王妃朴氏)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2년조)
② 이찬 순원의 딸인 혜명을 받아들여 비로 삼았다.(納伊?順元女惠明爲妃)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3년조)
③ 당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비 김씨를 책봉하였다.(唐遣使 冊夫人金氏爲王妃)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4년조)

이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①의 사료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씨 왕비인 혜명왕후(惠明王后)만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삼국사기』에는 박씨 왕비가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기록을 ③의 사료가 잘못 기재된 것으로 파악하여 신라 중대에는 박씨 왕비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1977; 이기백, 1982) 그러나 『신당서(新唐書)』, 『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중국측 기록에 확실히 왕비 박씨에 대한 책봉기록이 보이고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사료를 신빙하여 효성왕비로 박씨 왕비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김수태, 1996; 박해현, 2003) 이후의 연구들은 대부분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는데, 그렇다면 효성왕이 박씨 왕비를 맞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효성왕은 성덕왕이 마련해 놓은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효성왕대는 6년이란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바로 이러한 혼란의 원인을 박씨 왕비의 간택으로 보는 것이다. 즉 효성왕대에는 그 즉위초까지도 성덕왕대의 측근인물들이 여전히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효성왕 즉위년조(737)에 성덕왕대 활발한 활동을 한 정종(貞宗), 의충(義忠)이 효성왕대가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치를 주도해나가는 모습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효성왕은 이러한 성덕왕의 측근인물들을 자신의 왕권을 제약하는 존재들로 파악하여 이들을 더 이상 정치에 참여시키지 않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효성왕의 정치적 성향은 신충(信忠)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충은 성덕왕대부터 왕의 측근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던 인물로, 『삼국유사』 권5 피은8 신충괘관(信忠卦冠)조에 따르면, 그는 효성왕의 잠저시(潛邸時)부터 왕과 친연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효성왕은 즉위 뒤 그에 대한 처우를 잊고 있어 이에 대한 신충의 원망이 드러났다. 이것은 효성왕이 그를 정치에서 배제시키고자 한 의도로 파악할 수 있겠다. 이 때 신충의 정치적 성격에 대해 그를 효성왕의 정치적 지지자로 파악하기도 하나, 이러한 견해에서도 역시 효성왕은 즉위 뒤 기존 정치세력과 거리를 두려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박해현, 2003)

결국 박씨 왕비의 입궁은 효성왕이 기존의 왕비세력이었던 김씨를 배제하기 위해 취한 조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효성왕 3년(739) 김순원(金順元)의 딸을 다시 후비(後妃)로 맞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김순원은 이미 성덕왕대부터 왕비족으로서 상당한 지위를 누려왔는데, 효성왕의 즉위 직후 일련의 정치적 소외로 인해 긴장상태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다시 정계에 등장하면서 김씨 외척의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이는 이후 경덕왕의 즉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김수태, 1996)

한편 효성왕이 소덕왕후의 아들, 곧 김순원의 외손자임에도 불구하고 김씨세력과 대립적 관계에 놓이게 된 이유에 대해 그가 소덕왕후(炤德王后)의 소생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는 효성왕 3년(739) 3월에 김순원의 딸이 다시 왕비가 된 후, 바로 두 달 뒤 헌영(경덕왕)이 태자로 책봉되고 있는 상황과도 아울러 설명된다. 즉 사료에는 효성왕과 경덕왕이 모두 소덕왕후의 소생이라고 나와 있으나, 위와 같은 상황은 경덕왕과는 달리 효성왕의 왕위계승이 김순원의 지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덕왕에게는 사망한 태자 중경(重慶)과 승경(承慶), 헌영(憲英) 그리고 수충(守忠)이 있었는데, 이외에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셋째 왕자로 무상(無相)이 나오고 있어 총 5명의 왕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중 수충의 경우는 성덕왕 13년(724)에 왕자로서 당에 숙위(宿衛)로 파견되었다가 태자인 중경이 사망한 직후 귀국을 하는데, 이것을 통해 볼 때 중경과 수충은 모두 성덕왕의 첫째 부인이었던 엄정왕후(嚴貞王后)의 소생이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헌영은 왕으로 즉위한 후 무상의 귀국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하였는데, 이것을 보면 무상과 헌영은 친형제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중경, 승경, 무상, 수충은 엄정왕후의 소생으로, 헌영은 소덕왕후의 소생으로 본 것이다.(박해현, 2003)

참고문헌

이병도, 1977, 『譯註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기백?이기동, 1982, 『韓國史講座(古代篇)』, 일조각.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四 孝成王 [金氏 名承慶 父聖德王 母炤德太后 妃惠明王后 眞宗角干之女 丁丑立 理五年 法流寺火葬 骨散東海]
제34 효성왕 [김씨이며, 이름은 승경이다. 아버지는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소덕태후이다. 왕비는 혜명왕후로, 진종각간의 딸이다. 정축년(737)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 법류사에서 화장하여 뼈를 동해에 뿌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성왕)
孝成王
開元十年壬戌十月 始築闕門於毛<火>郡 今毛火村 屬慶州東南境 乃防日本塞垣也 周廻六千七百九十二步五尺 役徒三萬九千二百六十二人 掌員元眞角干 開元二十一年癸酉 唐人欲征北<狄> 請兵新羅 客使六百四人來還國]
효성왕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步) 5척(尺)이고, 동원된 역부(役徒)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개원(開元) 21년 계유(癸酉, 733)에 당나라 사람들이 북쪽 오랑캐(北狄)를 치려고 신라에 청병하여 객사 6백 4명이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