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경덕왕

연관목차보기

경덕왕

기본정보

신라 제35대 왕
생몰년: ?-765
재위기간: 742-765

일반정보

성은 김씨.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제33대 성덕왕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태후(炤德太后)이고, 제34대 효성왕의 동복동생(同母弟)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비는 이찬(伊飡) 김순정(金順貞)의 딸인 삼모부인(三毛夫人)과 의충(義忠) 각간(角干)의 딸인 만월부인(滿月夫人)이다. 그는 재위 24년(765) 6월에 승하하여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경지사(頃只寺)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서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다. 후에 이를 양장곡(楊長谷)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신라 제35대 경덕왕은 제33대 성덕왕의 아들로, 제34대 효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소덕태후(炤德太后)이고, 제34대 효성왕의 동복동생(同母弟)이다.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경덕왕은 효성왕 3년(739)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742)에서는 “효성왕에게 자식이 없어 헌영을 태자로 세웠으므로 왕위를 이었다.(孝成無子 立憲英爲太子 故得嗣位)”라 하여 효성왕이 후자가 없어 헌영을 태자로 세웠으므로 이후 왕위를 이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덕왕의 태자 책봉 과정은 효성왕대의 정치상황과 맞물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는 해석들이 대부분이다. 즉 효성왕 3년(739) 3월 김순원(金順元)의 딸인 혜명이 효성왕의 후비(後妃)가 되었는데, 새 왕비를 통해 얼마든지 왕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2달 후 헌영을 태자로 책봉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김순원 세력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인 이후, 보다 더 세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역시 그의 손자인 헌영을 통해 태자책봉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임을 알 수 있다.(이기백, 1974; 김수태, 1996)

경덕왕은 모두 두 명의 왕비를 맞이하는데,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즉위년조(742)의 “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妃伊?順貞之女也)”라는 기록과 『삼국유사』 왕력의 “처음 왕비는 삼모부인으로, 궁중에서 폐출되어 후사가 없다.(先妃三毛夫人 出宮無後)”에 따르면 첫 번째 부인으로 김순정의 딸인 삼모부인을 맞이하였으나,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궁중에서 폐출하였다. 이후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2년조(743)의 “서불한 김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納舒弗邯金義忠女爲王妃)”와 『삼국유사』 왕력의 “다음 왕비는 만월부인으로, 시호는 경수왕후이다. 수는 혹은 목이라고도 한다. 의충 각간의 딸이다.(後妃滿月夫人 諡景垂王后 垂一作穆 依忠角干之女)”라는 기록을 통해 경덕왕은 2년(743)에 김의충의 딸 만월부인(경수태후, 경목태후)을 후비로 맞아들이고 있는데, 그녀는 후에 혜공왕을 낳게 된다.

성덕왕대부터 경덕왕대에 이르기까지 정국 운영의 큰 세력이었던 김순원 세력에 대해 그를 왕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세력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경덕왕대의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이 대별된다. 먼저 이 때의 김순원 세력에 대해 그들을 경덕왕대 왕당파(王黨派)로 규정하여, 경덕왕대의 정치적 성격을 왕당파와 진골귀족간의 대립구도로 보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르면, 경덕왕은 왕당파세력과 함께 왕권강화책을 실시한다. 이는 대표적으로 일련의 관제개혁에서 보여지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의 실시를 들 수 있다. 경덕왕은 보다 획일화된 관료제의 수립을 통해 왕권을 전제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서도 그러한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강화책은 곧 상대등(上大等) 김사인(金思仁) 등 반전제주의적 귀족들의 반발을 받게 된다. 즉 경덕왕 15년(756) 김사인은 시정(時政)과 관련하여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데, 이 때의 내용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한화정책 등 경덕왕의 왕권 전제화정책에 대한 반발, 비판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아울러 경덕왕 16년(757)에는 녹읍이 부활되고, 경덕왕 19년(760)에는 왕권과 대립되는 성격으로 파악되는 김옹(金邕)이 중시(中侍)에 임명됨으로써 경덕왕의 정책들은 더 이상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옹의 경우는 『속일본기(續日本紀)』의 내용을 통해 그가 경덕왕의 첫째 부인이었던 삼모부인의 아버지인 김순정의 손자로 파악되는데, 삼모부인이 출궁되는 사건을 통해 그는 명확히 반전제주의세력으로 분류되었다. 이렇듯 경덕왕대의 정치적 성격은 경덕왕의 전제주의적 정책을 옹호하는 왕당파와 이에 반대하는 반전제주의적 귀족들 간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이기백, 1974; 김수태, 1996)

반면 김순원 세력을 외척세력으로 규정하여 경덕왕대의 정치적 성격을 왕권과 외척세력과의 대립으로 규정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 이 때의 외척세력에는 김순원 뿐만 아니라 경덕왕의 장인이 되는 김순정(金順貞), 의충(義忠), 그리고 김순정의 손자인 김옹 등도 포함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외척 세력이 경덕왕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경덕왕의 정국 운영은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약은 대표적으로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을 기리는 비를 세우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제작을 계획하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이는 성덕왕의 권위를 빌어 그의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것은 경덕왕대 왕권이 불안정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경덕왕은 태후(김순원의 딸인 혜명)를 신궁(新宮)으로 이거(移居)시킴으로써 김순원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고,(『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7년조) 관부와 지방제도의 정비를 통해 새로운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다. 한편 이 견해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경덕왕 16년(757)에 실시된 녹읍(祿邑)의 부활을 경덕왕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파악하는 점인데, 이를 통해 부족한 국가 재정을 확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한 것으로 보고 있다.(전덕재, 2006) 또한 경덕왕 15년(756) 상소를 올린 김사인을 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파악한 점도 주목된다. 즉 기존의 견해에서는 그가 상대등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그를 반전제왕권적 인물로 파악하였지만, 그가 김춘추의 아들인 문왕(文王)의 후손이라는 견해에 근거한다면(김정숙, 1983) 왕족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덕왕은 김사인을 통해 외척 중심의 정국 운영에 제동을 걸고자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덕왕의 반외척적 정책은 외척인 김옹이 경덕왕 19년(760)에 시중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경덕왕대의 정치적 성격을 왕권과 외척세력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견해에서 경덕왕대를 전제주의적 시기로 보는 관점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파악된다.(박해현, 2003)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에 따르면 경덕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으며, 3월 3일에는 왕이 귀정문(歸正門)에 행차해 충담사(忠談師)를 맞이하여 「안민가(安民歌)」를 받았다고 한다. 또 경덕왕에게 자식이 없자 표훈대덕(表訓大德)을 통해 천제(天帝)에게 부탁해 아들을 얻고자 하였는데, 천제는 딸은 가능하겠지만 아들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덕왕은 아들을 얻고자 하여 표훈에게 다시 천제에게 부탁하도록 청했는데, 천제는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경덕왕은 그렇게 되더라도 기어이 아들을 얻겠다고 하였고, 이후 결국 경덕왕비 만월부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이가 곧 혜공왕(惠恭王)이다. 혜공왕은 8세에 경덕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태후가 섭정하게 되어 이후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표훈은 천제에게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한 죄로 이후 다시는 하늘로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경덕왕은 재위 24년째인 765년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모지사(毛只寺), 『삼국유사』에서는 경지사(頃只寺)의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이후 양장곡(楊長谷)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김정숙, 1983, 「金周元 世系의 성립과 그 변천」 『白山學報』28.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박해현, 2003, 『신라 중대 정치사 연구』, 국학자료원.
전덕재, 2006, 『한국고대사회경제사』, 태학사.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五 景德王 [金氏 名憲英 父聖德 母炤德太后 先妃三毛夫人 出宮無後 後妃滿月夫人 諡景垂王后 垂一作穆 依忠角干之女 壬午立 理二十三年 初葬頃只寺西岑 鍊石爲陵 後移葬楊長谷中]
제35 경덕왕 [김씨이며, 이름은 헌영이다. 아버지는 성덕왕이고, 어머니는 소덕태후이다. 처음 왕비는 삼모부인으로, 궁중에서 폐출되어 후사가 없다. 다음 왕비는 만월부인으로, 시호는 경수왕후이다. 수는 혹은 목이라고도 한다. 의충 각간의 딸이다. 임오년(742)에 즉위하여 23년간 다스렸다. 처음에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서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는데, 후에 양장곡으로 이장하였다.]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六 惠恭王 [金氏 名乾運 父景德 母<滿>月王后 先妃神巴夫人 魏正角干之女 妃昌昌夫人 金將角干之女 乙巳立 理十五年]
제36 혜공왕 [김씨이며, 이름은 건운이다. 아버지는 경덕왕이고, 어머니는 만월왕후이다. 처음 왕비는 신파부인으로, 위정 각간의 딸이다. 왕비는 창창부인으로, 김장 각간의 딸이다. 을사년(765)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德經等 大王備禮受之 王御國二十四年 五岳三山神等 時或現侍於殿庭 三月三日 王御歸正門樓上 謂左右曰 誰能途中得一員榮服僧來 於是適有一大德 威儀鮮潔 ??而行 左右望而引見之 王曰 非吾所謂榮僧也 退之 更有一僧 被衲衣 負櫻筒[一作荷?] 從南而來 王喜見之 邀致樓上 視其筒中 盛茶具已 曰 汝爲誰耶 僧曰 忠談 曰 何所歸來 僧曰 僧每重三重九之日 烹茶饗南山三花嶺彌勒世尊 今玆旣獻而還矣 王曰 寡人亦一?茶有分乎 僧乃煎茶獻之 茶之氣味異常 ?中異香郁烈 王曰 朕嘗聞 師讚耆婆郞詞腦歌 其意甚高 是其果乎 對曰 然 王曰 然則爲朕作理安民歌 僧應時奉勅歌呈之 王佳之 封王師焉 僧再拜固辭不受 安民歌曰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生以支所音物生 此??惡支治良羅 此地?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國惡支持以 支知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讚耆婆郞歌曰
咽鳴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王玉莖長八(寸) 無子廢之 封沙梁夫人 後妃滿月夫人 謚景垂太后 依忠角干之女也 王一日詔表訓大德曰 朕無祐 不獲其嗣 願大德請於上帝而有之 訓上告於天帝 還來奏云 帝有言 求女卽可 男卽不宜 王曰 願轉女成男 訓再上天請之 帝曰 可則可矣 然爲男則國殆矣 訓欲下時 帝又召曰 天與人不可亂 今師往來如隣里 漏洩天機 今後宜更不通 訓來以天語諭之 王曰 國雖殆 得男而爲嗣足矣 於是滿月王后生太子 王喜甚 至八歲 王崩 太子卽位 是爲惠恭大王 幼?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爲宣德與金<敬信>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도덕경 등을 보내니 대왕이 예를 갖추어 받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五岳)?삼산(三山)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의 뜰에서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각 위로 행차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능히 길 위에서 한 명의 영복승(榮服僧)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마침 한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태도가 위엄 있고 깨끗했다. 길에서 배회하며 가니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다가 보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영승(榮僧)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있었는데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삼태기라고도 한다]을 진 채 남쪽으로부터 왔다. 왕이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그 통 안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니, 승려는 “충담(忠談)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디에서 오십니까?”라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南山)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올리는데, 지금도 이에 올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도 차를 한 잔 나눌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승려가 이에 차를 달여 바쳤다. 차의 향기와 맛이 이상하고, 다구 속에 특이한 향기가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들으니 사(師)가 지은 기파랑(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합니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승(僧)이 곧바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였으나, 승은 재배(再拜)하고 굳이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안민가에 이르길,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하실지면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라. 꾸물거리며 사는 물생(物生)에게 이를 먹여 다스린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됨을 알리이다.”라고 하였다. 후렴구는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리이다.”라고 하였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에 이르기를,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가는 것이 아닌가. 새파란 시내에 파랑의 모습이 있도다. 일오천 조약돌에서 낭이 지니신 마음 가를 좇으려 하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드높아 서리 모를 화판(花判)이여.”라고 하였다.
왕의 옥경(玉莖)이 8촌의 길이였는데,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하였다. 후비(後妃)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의충(依忠) 각간의 딸이다. 왕이 하루는 표훈(表訓) 대덕을 불러 말하기를 “짐이 도움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하니 원하건대 대덕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후사가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표훈이 올라가 천제(天帝)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가 말하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가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원컨대 딸을 아들로 바꿔주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표훈은 다시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 수는 있으나 그렇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인간은 혼란시켜서는 안되는데 지금 대사가 이웃 마을과 같이 왕래하여 천기를 누설하니 지금 이후로는 마땅히 다시 통행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 깨우치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 것으로 족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게 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여덟 살에 이르러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朝政)에 임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막을 경황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에 징험이 있었다. 소제(小帝)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이 되는 날부터 즉위할 때까지 항상 부녀의 놀이를 하며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함께 놀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며 마침내는 선덕(宣德)과 김경신(金敬信)에게 시해되었다. 표훈 이후로부터 신라에 성인(聖人)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