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
  •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인쇄 문화원형 스크랩

삼국유사 키워드사전선덕왕

연관목차보기

선덕왕

기본정보

신라 제37대 왕.
생몰년: ?-785
즉위기간: 780-785

일반정보

신라 제37대 왕으로 이름은 양상(亮相) 혹은 양상(良相)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효방각간(孝方海干)이고 어머니는 사소부인(四召夫人)이다. 아버지인 효방각간이 원훈각간의 아들이므로 선덕왕은 원훈각간(元訓角干)의 손자가 되며, 어머니인 사소부인은 성덕왕(聖德王)의 딸이므로 또한 성덕왕의 외손도 된다. 780년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고 한다.

전문정보

선덕왕은 즉위하기 이전의 행적이 여러 사료에서 드러난다. 먼저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23년(764)조에 시중이 되었다고 전하며, 혜공왕 7년(771)년 주성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명문(銘文)에 의하면 “숙정대령(肅正臺令)”, “수성부령(修城府令)”, “검교감은사사(檢校感恩寺使)” 등의 관직을 겸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0년(774)조에서는 “이찬 양상(良相)을 상대등으로 삼았다(拜伊?良相爲上大等)”고 하므로 이때 상대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양상은 상대등이 된 이후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이는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3년(777)조에 “상대등 양상(良相)이 왕에게 글을 올려 시국의 정치를 극론(極論)하였다(上大等良相上疏 極論時政)”는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다.

김양상(선덕왕)의 정치적 성격은 대체로 “반전제주의(反專制主義)”적인 것으로 본다. 신라 중대의 성격은 무열왕의 한화정책으로 대표되며 “전제주의적”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고 여겨서, 경덕왕 18년(759)에 한식으로 개칭한 관직과 관부의 명칭을 혜공왕 12년(776)에 모두 복구시키는 개혁은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므로 김양상이 “반전제주의적” 임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반전제주의적 정책을 막기 위해 혜공왕은 혜공왕 9년(773)부터 동왕 12년(776)에 이르는 시기동안 견당사를 8차례나 파견하였다고 하며 김양상(선덕왕)은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혜공왕 13년(777) 시정(時政)을 극론(極論)하는 것으로 반대의 뜻을 표명한 것이라고 추측한다.(이기백, 1974)

한편 선덕왕의 즉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내용이 다르므로 두 사료 중 어느 한쪽을 중시하느냐에 상반된 의견이 제시되었다.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혜공왕 16년(780)조에는 “2월에 …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무리를 모아 궁궐을 에워싸고 침범하였다. 여름 4월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경신(敬信)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죽였으나, 왕과 왕비는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二月 … 伊?金志貞叛 聚衆 圍犯宮闕 夏四月 上大等金良相與伊?敬信 擧兵誅志貞等 王與后妃爲亂兵所害)”고 전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에서는 “마침내 왕은 선덕(宣德)과 김양상(金良相)에게 시해된 바 되었다(修爲宣德與金良相所弑)”고 전한다.

위 두 기록 중 『삼국유사』 권2 기이2 경덕왕(景德王)· 충담사(忠談師)· 표훈대덕(表訓大德)조에는 “선덕과 김양상(宣德與金良相)”이라고 같은 인물이 두 번 열거 되어 있지만 김양상을 『삼국사기』의 내용에 따라 김경신(원성왕)으로 보고, 『삼국사기』의 내용보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신뢰하여 김양상(선덕왕)과 김경신(원성왕)이 함께 혜공왕을 시해한 후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1974)

반면, 『삼국사기』의 내용을 더 신뢰하여 혜공왕은 김지정의 반란군에게 살해되었고 난을 진압한 김경신(원성왕)은 무열계인 김주원을 견제하고 그들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측면에서 왕위에 대한 야심이 없는 김양상(선덕왕)을 즉위하도록 뒷받침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신형식, 1977)

이에 더 나아가 선덕왕은 김경신의 도움으로 즉위하였지만 선덕왕의 왕위계승은 정당했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조에서는 혜공왕 말년에 (김지정의) 반란이 일어나 양상이 진압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경신이 난을 평정시킨 공이 있어 선덕왕의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다고 하므로 선덕왕의 즉위에 김경신이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 김양상이 정당하게 왕위를 계승했다고 몇 가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김양상(선덕왕)은 성덕왕의 외손이었으므로 계보 상 혜공왕의 이종사촌이 되므로 혈연상 왕위계승권에 가까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혜공왕이 김지정의 반란군으로 인해 시해될 때, 정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을 경우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상대등의 위치에 김양상이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9 선덕왕 6년조에 실린 선덕왕이 내린 조서에서 “과인은 본래 재주와 덕이 없어 왕위에 마음이 없었으나 추대함을 피하기 어려워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寡人本惟菲薄 無心大寶 難逃推戴 作其卽位)”고 하는 것을 보아 선덕왕은 상대등으로서 귀족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김수태, 1996)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신라종묘지제(祭祀新羅宗廟之制)조에 의하면 “제37대 선덕왕 때에 이르러 사직단(社稷壇)을 세웠다(至第三十七代宣德王 立社稷壇)”고 하는데, 이 사직단은 천자의 지제(地祭)가 아닌 제후의 예를 행하는 곳이라 한다.(신종원, 1992) 그리고 이러한 사직단이 세워진다는 것은 신라에 오묘제와 함께 중국적 제사체계가 편성됨을 의미한다고 한다.(최광식, 1994)

선덕왕은 재위 6년째인 785년 정월에 병상에 누워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하므로 교서를 내려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하고 그 뼈를 동해에 뿌려달라고 한 뒤 13일에 죽었다.

참고문헌

이기백,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신형식, 1977,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 『한국사논총』2.
신종원, 1992, 『신라초기불교사연구』, 민족사.
최광식, 1994,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김수태, 1996, 『新羅中代政治史硏究』,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第三十七 宣德王 [金氏 名亮相 父孝方海干 追封開聖大王 卽元訓角干之子 母四召夫人 諡(貞)懿大后 聖德王之女 妃具足王后 狼品角干之女 庚申立 理五年]
제37 선덕왕 [김씨이고 이름은 양상이다. 아버지는 효방해간이며 개성대왕으로 추봉되니, 곧 원훈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소부인으로 시호는 정의태후이며 성덕왕의 딸이다. 왕비는 구족왕후로 낭품각간의 딸이다. 경신년에 즉위하여 5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