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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애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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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장왕

기본정보

신라 제40대 왕.
생몰년 : 788-809
재위기간 : 800-809

일반정보

애장왕(哀莊王)은 신라 제40대 왕으로, 아버지는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이고, 어머니는 계화왕후(桂花王后)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인 각간언승(角干彦昇)이 섭정을 맡았다. 애장왕대에는 오묘제(五廟制)의 확립과 율령(律令)의 개정으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다. 애장왕 10년(809)에 숙부들이 일으킨 반란에 의해 시해 당했다.

전문정보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의 이름은 중희(重熙) 또는 청명(淸明)이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청명(淸明)이었으나 즉위한 해(800) 가을 7월에 중희(重熙)로 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당서』와『신당서』에서는 중흥(重興)으로 표기하고 있다.

아버지는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이고 어머니는 계화왕후(桂花王后)이다. 언승(彦昇), 중공(仲恭, 또는 忠恭), 준옹(俊邕) 등 여러 명의 숙부가 있었으며, 또 체명(體明)이라는 아우가 있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6년조에 의하면 박씨성을 가진 왕비를 왕후로 삼았다(妃朴氏爲王后) 하나 자세히 알 수 없고,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3년조에는 후궁으로 김주벽(金宙碧) 아찬의 딸이 기록되어있다.(阿?金宙碧女 入後宮)

소성왕이 재위 1년 반만인 800년에 죽자, 태자이던 애장왕이 13세에 즉위하였다. 애장왕대는 왕의 숙부인 각간 언승(角干 彦昇, 후의 헌덕왕)의 섭정기(攝政期)였으며, 비록 단기간에 그치고 말았으나 율령(律令)의 개정, 오묘제(五廟制)의 확립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먼저 율령 개정에 있어서 애장왕 6년(805) 공식(公式) 20여조를 반시(頒示)하였다. 비록 그 구체적인 법규의 내용에 대하여는 잘 알 수 없으나 위화부(位和府)의 장,차관직명(長次官職名)이 이 해에 종래의 금하신(衿荷臣), 상당(上堂)에서 각기 영(令), 경(卿)이라는 한식명(漢式名)으로 개정된 것이라든지, 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비롯한 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 봉덕사(奉德寺) 봉은사(奉恩寺) 등 사찰 관계 관부(官府)의 장·차관직명(長次官職名) 역시 개명(改名)된 것으로 미루어 애장왕대에, 특히 805년을 기하여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이 시도되어 국왕의 권력집중을 꾀한 것으로 볼 수 있다.(이기동, 1984)

둘째로, 오묘제(五廟制)에 있어서는 애장왕 2년(801) 2월에 근본적인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 영세불변(永世不變)의 묘(廟)로 되어있던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을 오묘에서 탈락시키는 한편 애장왕 고조(高祖)까지의 직계존속을 이에 대치(代置)하고 태종과 문무 두 대왕을 위해서 따로 이묘(二廟)를 세웠다. 사실 제37대 선덕왕(宣德王)도 오묘제를 정할 때에 태종, 문무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만을 태묘(太廟)에 입부(入?)시켰을 뿐이며, 제38대 원성왕도 겨우 자기 아버지만을 오묘에 입부(入?)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801년에 마침내 직계존속을 모시는 오묘제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801년 완성된 오묘제가 그 후 원성왕계 혈족집단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이로써 왕위계승에 있어 직계상속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나아가 이러한 직계 존중은 자연히 방계(傍系)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결과가 되어 내물왕계 혹은 태종무열왕계라고 하는 광범위한 씨족연대의식을 약화시키게 되었다. 이와 함께 원성왕계 내부의 혈족집단 자체를 점차 가족 규모의 적은 단위로 분지화(分枝化) 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이기동, 1984)

애장왕은 재위 6년(805) 정월에 어머니 김씨를 대왕후(大王后)로, 왕비 박씨를 왕후(王后)로 책봉하였다. 또 이 해에 애장왕 자신도 당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고, 어머니와 왕비 역시 “대비(大妃)”와 “비(妃)”로 책봉되었다. 왕모나 왕비에 대한 책봉은 즉위 후에 바로 행하는 것이 관례이고, 또 신라왕의 중국으로부터의 책봉 역시 즉위 초반에 행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애장왕 6년의 이 책봉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주목되며, 이 시기를 애장왕의 친정 개시 시점으로 보기도한다.(이문기,1999)

애장왕대에는 국내 정치의 개혁과 병행해 대당외교 외에 일본과도 국교를 맺었다. 애장왕 3년(802) 12월 균정을 대아찬에 임명하고 가왕자(假王子)로 삼아 왜국에 사신으로 보내고자 했으며, 애장왕 4년(803) 일본국과 우호해 수교하였다. 그리하여 804년, 806년, 808년에 각각 일본국 사신이 내조(來朝)하였다.

애장왕은 재위 10년만인 809년 숙부에게 시해 당했다.『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10년조에는 “왕의 숙부 언승이 그 아우 제옹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대궐 안에 들어와 난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였다. 왕의 아우 체명도 왕을 시위하다가 해를 입었다. 왕을 추봉하여 애장이라 하였다. (王叔父彦昇與弟伊?悌邕將兵入內 作亂弑王 王弟?明侍衛王 幷害之 追諡王爲哀莊)”라 하였고, 『삼국유사』왕력편에도 “원화 4년 기축 7월 19일에 왕의 숙부인 헌덕, 흥덕 두 이간에게 시해되었다.(元花四年己丑七月十九日 王之叔父憲德興德兩伊干所害而崩)” 고 전하고 있다. 애장왕 사후 숙부 헌덕왕(憲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이기동, 1984,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일조각.
이문기, 1999, 「新羅 惠恭王代 五廟制 改革의 政治的 意味」『白山學報』52.

관련원문 및 해석

第四十 哀莊王[金氏 名重熙 一云淸明 父昭聖 母桂花王后 己卯立 理十年 元和四年己丑七月十九日 王之叔父憲德興德兩伊干所害而崩]
제40 애장왕 [김씨이며, 이름은 중희 또는 청명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소성왕이고, 어머니는 계화왕후이다. 기묘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원화 4년 7월 19일에 왕의 숙부인 헌덕, 흥덕 두 이간에게 시해되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