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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흥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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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

기본정보

신라 제42대 왕.
생몰년 : ?-836
재위기간 : 826-836

일반정보

흥덕왕은 신라 제42대 왕으로 이름은 수종(秀宗), 경휘(景暉, 景徽)이며 제41대 헌덕왕과 형제이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삼아 중국 해적의 침입을 막게하였고, 사치를 금하는 교서를 내리는 등 개혁조치에 힘썼다. 재위 11년(836)에 죽어, 유언에 따라 왕비 창화부인(昌花夫人)과 함께 합장되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으로 비정된다.

전문정보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은『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이름은 수종(秀宗)으로, 후에 경휘(景徽)라 개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경휘(景暉)로 기록되었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며, 곧 원성왕의 첫째 아들인 인겸(仁謙)의 아들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인 정목왕후이다. 형으로는 신라 제39대 소성왕(昭聖王)인 준옹(俊邕),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인 언승(彦昇)이 있고 동생으로는 충공(忠恭)이 있다.

신라 제41대 헌덕왕과 42대 흥덕왕의 관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흥덕왕 즉위조에서 “동모제(同母弟)”로,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흥덕왕 2년조에는 “모제(母弟)”로, 『구당서』, 『신당서』에는 “자(子)”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애장왕 10년조에 “애장왕의 숙부 언승과 그 아우 이찬 제옹(王叔父彦昇與弟伊?悌邕)”이라는 기록과 더불어 『삼국유사』왕력편 애장왕조의 “왕의 숙부 헌덕, 흥덕 두 이간에게 시해되었다.(王之叔父憲德興德兩伊干所害)”는 기록이 있음을 참고하면, 제옹(悌邕)은 흥덕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헌덕왕과 흥덕왕이 모두 애장왕의 숙부로서 서로 형제간임을 알 수 있다.

809년 이르러 경휘(흥덕왕)과 형제인 상대등 언승(彦昇)이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헌덕왕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유사』 왕력편에 “애장왕이 헌덕, 흥덕 두 이간에 해를 입었다”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러나 흥덕왕이 혹여 조카인 왕을 죽이는 형제들의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애장왕의 누이 창화부인과 혼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주동적인 입장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기동, 1997)

경휘는 애장왕 5년(804) 정월에 집사부(執事部) 시중(侍中)이 되었고 헌덕왕 11년(819)에는 상대등에 오르는 등 정치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아왔고, 특히 헌덕왕 14년(822)에는 부군(副君)이 된다. 이 부군제도는 신라에서는 전례가 없는 것이나 『삼국사기』권45 열전5 녹진(祿眞)전에서 보듯 헌덕왕이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흥덕왕으로서 “태자”를 삼은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태자에 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이기동, 1997)

경휘는 826년 헌덕왕이 죽자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흥덕왕의 즉위사정에 대해 왕위 쟁탈의 내란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헌덕왕의 훙년(薨年)에 이설이 있는 점, 그리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덕왕에게 왕자로 김헌장(金憲章), 김장렴(金張廉), 김흔(金昕) 등이 있었던 점을 들어 무력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1954)

그러나 김헌장, 김장렴, 김흔 등은 헌덕왕 때 당에 파견된 사신들로 양국 사서에는 모두 왕자로 기록되어 있으나, 반드시 헌덕왕 당시 국왕의 아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발해에서도 당에 보내는 사신 중에 왕자라고 칭한 경우가 있어 “왕자”라는 것이 하나의 통칭이었는지 혹은 선왕(先王)의 아들인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헌덕왕 말년경에 흥덕왕에게는 달리 왕위 경쟁자가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으며 따라서 흥덕왕의 즉위는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동, 1997)

흥덕왕 3년(828)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장보고로 하여금 중국무역을 위협하고 있던 중국해적을 소탕하도록 하였다. 청해진 설치로 중앙의 직접 통제를 받는 진(鎭)의 특성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지방통치를 꾀하였고, 새로운 항로 개척을 통해서 발해의 영역 확대로 어려움을 가지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였다.(김호범, 2007) 흥덕왕 9년(834) 교서에서 진골 귀족의 법도에 맞는 생활규범을 제시했으며 율령체제 강화작업에 주력하여 격식의 개정을 통해서 전제화를 꾀하였다. 색복(色服), 거기(車騎), 기용(器用). 거사(居舍) 등의 규정은 진골귀족에 의한 육두품과 진골신분의 준별이라는 목적을 지니기도 하였다.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고친 것도 이러한 전제화 정책의 일환이었다.(김동수, 1982)

『삼국유사』 권2 기이2 흥덕왕앵무조에는 흥덕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하는데, 흥덕왕이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져왔는데, 오래지않아 암컷이 죽자 수컷이 거울에 비친 제 그림자를 보고 죽은 암컷인 줄 알고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때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알 수 없다고 한다.

흥덕왕 11년(836)은 죽어, 유언에 따라 왕비 창화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능은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으로 비정된다.

참고문헌

末松保和, 1954,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김동수, 1982,「新羅 憲德 · 興德王代의 改革政治 」『韓國史硏究』39.
이기동, 1997, 『新羅社會史硏究』, 일조각.
김호범, 2007, 「新羅 興德王代의 淸海鎭 設置 背景」『歷史學硏究』29.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四十二 興德王[金氏 名景暉憲德母第 妃昌花夫人 諡定穆王后 昭聖之女 丙午立 理十年 陵在<安>康北比火壤 與妃昌花合葬]
제42 흥덕왕[김씨이며, 이름은 경휘이다. 헌덕왕의 동복동생이다. 비는 창화부인으로 시호는 정목왕후이니 소성왕의 딸이다. 병오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으니 비 창화부인과 합장되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흥덕왕앵무)
興德王鸚鵡
第四十二興德大王 寶曆二年丙午卽位 未幾有人奉使於唐 將鸚鵡一雙而至 不久雌死 而孤雄哀鳴不已 王使人掛鏡於前 鳥見鏡中影 擬其得偶 乃?其鏡而知影 乃哀鳴而死 王作歌云 未詳
흥덕왕과 앵무새
제42대 흥덕대왕이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하고 얼마 안되어 어떤 사람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갖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었다. 홀로 남은 수컷이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자, 왕이 사람을 시켜 앞에 거울을 걸게 하였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짝을 얻은 줄로 여겨 이내 그 거울을 쪼다가, 그것이 제 그림자임을 알고는 애처롭게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