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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경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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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

기본정보

신라 제48대 왕
생몰년 : ?-875
재위 : 861-875

일반정보

신라 제48대 왕인 문성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며 아버지는 김계명(金啓明),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왕비는 헌안왕의 딸인 문자황후(文資皇后)이다. 집권 당시의 빈번한 모반을 평정하고 신라하대 경문왕가(景文王家)의 왕위계승이 성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문정보

신라 제48대 왕인 문성왕의 이름은 응렴(膺廉)이며 아버지는 김계명(金啓明,) 어머니는 광화부인(光和夫人)이다. 그의 즉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권2 기이2 48경문대왕(四十八景文大王)조와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헌안왕 4년 기사에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료에 의하면 헌안왕 4년(860) 9월에 왕은 당시 15세인 응렴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유학(遊學) 중에 선인(善人)을 본적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귀인으로서 겸손한 자, 부자로서 검소한 자, 세력가로서 남을 누르지 않는 자를 선행자로 들어 응답하였다. 이에 왕은 감복하고 응렴을 사위로 삼고자 하여 장녀와 차녀의 두 딸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니 그는 부모에게 상의한 후 미색이 뛰어난 차녀를 얻고자 하였으나 흥륜사 스님이며 화랑이었던 범교사(範敎師)의 충고를 받아 3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장녀와 혼인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왕위에 오른 응렴은 뒷날 범교사(範敎師)를 불러 그 3가지 이익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첫째, 왕의 뜻에 맞았으므로 총애가 깊어진 것, 둘째 이로 인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것, 셋째 바라던 둘째 딸도 취하게 된 것이 그것이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 속에서 헌안왕이 응렴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택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헌안왕은 이미 심중에 두고 있었던 응렴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자 곧 불러 그 심성과 자질을 시험하였고 왕위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 하였다. 그 후 병환으로 죽음이 임박하게 되었을 때 유조를 내리어 다음 왕으로 응렴을 지적하였는데 이 모든 일련과정은 왕위계승 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헌안왕의 노력이라고 하겠다. 경문왕은 이와 같은 치밀한 과정 속에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한편 그의 즉위에 중심이 되는 세력기반은 아버지인 계명과 화랑도(花郞徒)이었다. 계명은 희강왕의 아들이며 신무왕의 사위였고 문성왕의 누이와 혼인하고 있어서 누구보다도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다. 또한 그는 문성왕, 헌안왕에 걸쳐 14년간 시중을 역임하였으며 김양(金陽)의 사후에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왕위계승에도 직접적으로 간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계명은 평소 자신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해오던 문성왕의 숙부인 의정(誼靖)을 왕위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조를 문성왕에게서 받아냈던 것이다. 계명의 정치적 책략에 의해 헌안왕으로 즉위한 의정은 계명의 아들인 응렴을 사위로 삼고, 이어 응렴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유조를 내리는데 이는 헌안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계명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한 결과였다. (송은일, 2004)

또한 화랑도는 신라통일기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크게 활약하였지만 이후 전란의 위기가 사라짐으로 하여 그 군사적 존재가 크게 부각되지는 못하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있었다. 경문왕은 화랑 출신이었으며 그에게 장녀와의 결혼을 권함으로써 왕위계승에 도움을 주었던 흥륜사의 승려는 화랑 가운데 상수(上首)인 범교사였다. 더욱이 경문왕대에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뜻이 있어 노래 세 수를 지어 경문왕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삼국유사』권2 기이2 제48대 경문대왕조의 기록은 화랑이 왕을 도아 정치에 관여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경문왕의 즉위에 따른 분쟁에 있어서도 세력기반으로 작용하였을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전기웅, 1989)

경문왕은 재위 6년(866) 헌강왕을 태자로 봉하였는데 그해 10월에 이찬(伊?) 윤흥(允興), 숙흥(叔興), 수흥(秀興) 형제들의 모반이 있었고 8년에는 이찬 김예(金銳), 김현(金鉉) 등이, 14년에는 이찬 근종(近宗)이 각기 모반을 일으켜 모두 복주(伏誅) 되거나 참수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경문왕가의 왕위계승에 대한 반발과 도전이 계속되었고 이들의 철저한 숙청에 의하여 경문왕계의 왕위 독점이 가능하였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헌강왕대의 정치는 경문왕대의 정치를 계승 유지하였으며 지방사회의 반발과 혼란의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안정 고착화 되는 것은 경문왕대의 정치적 안정이 지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삼국유사』권2 기이2 48경문대왕(四十八景文大王)조에는 경문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를 전하고 있다. 경문왕은 즉위 후 갑자기 귀가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는데, 이 사실은 왕의 두건을 만드는 장인(匠人)만이 알고 있었다. 평생 왕의 비밀을 지켰던 장인은 죽기 전에 도림사 대나무 숲 속에 들어가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쳤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바람이 불 때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왕이 이 소리를 싫어하여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는데, 이후에는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만 들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전기웅, 1989,「新羅 下代末의 政治社會와 景文王家」『釜山史學』16.
송은일, 2004,「新羅下代 景文王系의 成立」『전남사학』2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四十八 景文王 [金氏 名膺廉 父啓明角干 追封義[一作懿]恭大王 卽僖康王之子也 母神<武>王之女光和夫人 妃文資(皇)后 憲安王之女 辛巳立 理十四年]
제48 경문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응렴이다. 아버지는 계명각간으로 추봉된 의(義)[또는 의(懿)]공대왕이니 즉 희강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무왕의 딸 광화부인이다. 왕비는 문자황후로 헌안왕의 딸이다. 신사(861)에 즉위하여 14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제48대 경문대왕)
王諱膺廉 年十八爲國仙 至於弱冠 憲安大王召郞 宴於殿中 問曰 郞爲國仙 優遊四方 見何異事 郞曰 臣見有美行者三 王曰 請聞其說 郞曰 有人爲人上者 而?謙坐於人下 其一也 有人豪富 而衣儉易 其二也 有人本貴勢 而不用其威者 三也 王聞□其言 而知其賢 不覺墮淚而謂曰 朕有二女 請以奉巾櫛 郞避席而拜之 稽首而退 告於父母 父母驚喜 會其子弟 議曰 王之上公主貌甚寒寢 第二公主甚美 娶之幸矣 郞之徒上首範敎師者聞之 至於家 問郞曰 大王欲以公主妻公 信乎 郞曰 然 曰 奚娶 郞曰 二親命我宜弟 師曰 郞若娶弟 則予必死於郞之面前 娶其兄 則必有三美 誡之哉 郞曰 聞命矣 旣而王擇辰 而使於郞曰 二女惟公所命 使歸以郞意奏曰 奉長公主爾 旣而過三朔 王疾革 召群臣曰 朕無男孫 ??之事 宜長女之夫膺廉繼之 翌日王崩 郞奉遺詔卽位 於是 範敎師詣於王曰 吾所陳三美者 今皆著矣 娶長故 今登位 一也 昔之欽艶<弟>主 今易可取 二也 娶兄故 王與夫人喜甚 三也 王德其言 爵爲大德 賜金一百三十兩 王崩 諡曰景文 王之寢殿 每日暮 無數衆蛇俱集 宮人驚怖 將驅遣之 王曰 寡人若無蛇 不得安寢 宜無禁 每寢吐舌滿胸鋪之 乃登位 王耳忽長如驢耳 王后及宮人皆未知 唯?頭匠一人知之 然生平不向人說 其人將死 入道林寺竹林中無人處 向竹唱云 吾君耳如驢耳 其後風吹 則竹聲云 吾君耳如驢耳 王惡之 乃伐竹而植山茱萸 風吹 則但聲云 吾君耳長[道林寺 舊在入都林邊] 國仙邀元郞譽昕郞桂元叔宗郞等 遊覽金蘭 暗有爲君主理邦國之意 乃作歌三首 使心弼舍知 授針卷 送大炬和尙處 令作三歌 初名玄琴抱曲 第二大道曲 第三問群曲 入奏於王 王大喜稱賞 歌未詳
왕의 이름은 응렴(應廉)으로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20살이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이 낭(郎)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며 묻기를, “낭은 국선이 되어 사방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어떤 기이한 일을 보았는가?”라고 하였다. 낭이 대답하기를, “신은 행실이 아름다운 자, 셋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들려 달라.”라고 하자, 낭이 말하기를, “남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 사람이면서도 겸손하여 남의 아래 있는 이가 하나이고, 세력이 있는 부자이면서도 검소하게 옷 입는 사람이 둘이며, 본래부터 귀하고 세력이 있는데도 그 위력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셋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고 그의 어짊을 알아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고 말하기를, “짐에게는 두 딸이 있으니 (그대에게) 시집보내기를 청한다.”라고 하였다. 낭이 자리를 피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물러간 뒤, 부모에게 고하였다. 그 부모는 놀라고 기뻐하며 그 자제들을 모아 의논하기를, “왕의 첫째 공주는 외모가 무척 못생겼고, 둘째 공주는 매우 아름다우니 둘째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낭의 무리 중 우두머리인 범교사(範敎師)가 그것을 듣고서는 낭의 집에 이르러 묻기를, “대왕께서 공주를 공의 아내로 주고자 한다는데 사실입니까?”라고 하자, 낭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범교사가) 다시 묻기를, “어느 공주에게 장가가시겠습니까?”라고 하자 낭이 대답하기를, “부모님께서는 저에게 아우가 좋겠다고 분부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범교사가 말하기를, “낭께서 만일 아우에게 장가를 드신다면 저는 반드시 낭의 면전에서 죽을 것이고, 언니에게 장가드신다면 필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경계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낭이 “말씀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왕이 날을 가려 사자를 보내 낭에게 말하기를, “두 딸은 공의 명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자가 돌아가서 낭의 뜻을 아뢰기를, “첫째 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3개월이 지나 왕의 병이 위독해지자 군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짐은 남손(男孫)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마당히 맏딸의 남편 응렴이 이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왕이 죽자 낭은 유조(遺詔)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이때 범교사가 왕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제가 세 가지 좋은 일이라고 말한 것이 지금 모두 드러났습니다. 맏딸에게 장가들었으므로 지금 왕위에 오르셨으니 첫째이고, 전에 흠모하던 둘째 공주를 지금 쉽게 취할 수 있으니 둘째이며, 맏딸에게 장가들어 왕과 왕비가 크게 기뻐했던 것이 셋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고맙게 여겨 작위를 내려 대덕(大德)으로 삼고 금 130냥을 내려주었다. 왕이 죽었는데 시호를 경문(景文)이라고 하였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다. 궁 안의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 그것들을 몰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만약 뱀이 없으면 편안히 잘 수 없으니 마땅히 쫓아내지 말라.”라고 하였다. 매번 (왕이) 잘 때마다 (뱀들이) 혀를 날름대며 온 가슴을 덮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 왕의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길어졌다. 왕후나 궁 안의 사람들 모두 알지 못했고 오로지 복두장(?頭匠) 한 사람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으나 평생동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 도림사 대밭 속 아무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대나무를 향해 외치기를,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하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에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는 소리가 났다. 왕은 그것이 싫어서 이내 대나무를 베고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단지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라는 소리만 났다.[도림사는 예전의 입도림 주변에 있었다.] 국선(國仙)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郞),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을 유람할 때 몰래 임금을 위하여 나라를 다스릴 뜻이 있었다. 이에 노래 세 수를 지어, 심필(心弼) 사지(舍知)를 시켜 공책을 주고 대거화상의 처소에 보내어 세 가지 노래를 짓게 하였다. 첫 번째 곡의 이름은 “현금포곡(玄琴抱曲)”이요, 두 번째는 “대도곡(大道曲)”이며, 세 번째는 “문군곡(問群曲)”이다. 왕에게 들어가 아뢰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칭찬하고 상을 주었다. 노래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