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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헌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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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강왕

기본정보

신라 제49대 왕
생몰년 : ?-886
재위 : 875-886

일반정보

신라 제49대 헌강왕은 이름은 정(晸)이며 아버지는 경문왕, 어머니는 문자황후이다
경문왕대의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유교와 불교를 통한 왕권강화책을 실시하며 당과 일본과의 대외관계에도 우호적인 교류를 시도한다. 헌강왕 당시의 왕경(王京)의 모습은 최전성기의 번영을 이루게 된다.
헌강왕 12년(886) 가을 7월 5일에 죽어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전문정보

신라 제49대 헌강왕은 이름은 정(晸)이며 아버지는 경문왕, 어머니는 문자황후이다. 875년 아버지인 제48대 경문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11년간 재위하였다. 헌강왕은 여러 면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총명한 인물이었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성품이 명민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고 하며, 국학(國學)에 행차하여 강론케 하고 삼랑사(三郞寺)에서는 문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는 등 문장과 유교적 소양도 깊었다. 또한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망해사(處容郞望海寺)조에 의하면, 헌강왕은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하여 남산신(南山神)의 춤을 그대로 재현해 추어 보였다는 기사가 있다. 아울러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7년 (881) 봄 3월조에 의하면,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얼근하게 취하자 임금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각기 가사(歌詞)를 지어 바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그쳤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헌강왕은 예술적 감각과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헌강왕은 경문왕대의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원성왕계 내의 균정계나 인겸계 귀족들의 반발을 쉽게 진압하기 어려웠다.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聖住寺郎慧和尙白月?光塔碑)」에는 나이 어린 헌강왕이 낭혜화상에게 자신을 보필해 줄 것을 요청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헌강왕 즉위 초의 정치상황이 불안하였으며 왕권이 미약하였음을 뜻한다. 헌강왕 5년(879) 6월 일길찬 신홍(信弘)이 반역하다 사형을 당한 사건 또한 이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즉 당시 신라 조정 내에 헌강왕의 왕위계승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헌강왕은 왕권을 위협하는 자들을 제압하고 국왕의 권위를 높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헌강왕은 낭혜화상을 측근으로 삼고자 하였으며 낭혜화상은 “능관인(能官人)”을 잘 등용해야 한다는 조언으로 화답하였다. (전미희, 1989)

또한 헌강왕 5년(879)에는 국학(國學)에 행차하였다. 당시 신라에서 국왕의 국학순행은 상례적인 일이 아니었으며 행차 뿐만 아니라 박사(博士)와 그 이하 사람들에게까지 강론하게 했다는 것은 헌강왕이 국학에 특별한 관심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헌강왕의 이와 같은 국학에 대한 관심은 국학이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리의 양성을 통하여 왕권의 지지 기반을 확충하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헌강왕은 문치(文治) 중심의 정치를 펼쳐 한화정책을 바탕으로 유교적 통치이념의 구현에 주력하면서 유교적 소양이 깊은 신료를 측근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당과 일본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특히 헌강왕은 즉위한 다음 해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고 이러한 헌강왕의 노력으로 헌강왕 4년(878)에는 당의 희종은 헌강왕을 “사지절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대도독계림주제군사신라왕(使持節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大都督鷄林州諸軍事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에서 활약하였던 최치원을 기용하여 당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풀어나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도 확보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박미선, 2004)

한편 헌강왕은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해 유학계 뿐만 아니라 불교계도 포섭하려고 노력하였다. 원성왕의 원찰이며 경문왕이 중건한 「숭복사비문(崇福寺碑文)」의 찬술을 명하는 한편, 선종사문(禪宗沙門)들을 국왕 측근기구에 직접 예속시킨다. 즉 흥녕선원(興寧禪院)과 가지산사(迦智山寺)를 각기 중사성과 선교성에 소속시켜 국왕의 내정기관화 하려고 하였는데 이는 국왕의 권력강화를 확립하려는 왕실의 노력으로 여겨진다. 특히 사자산문(獅子山門)이 위치한 영월지역이나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무주지역은 후삼국 동란기의 주역들이 등장하는데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지역인 점을 감안하면 반신라적 분위기를 감지하고 국왕 측근기구에 속하게 하였을 것이다. 왕실의 안정을 위해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립한 선종사원 및 선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그들을 포섭함으로써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방사회를 효율적으로 끌어안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치국에 대한 자문의 요청도 선사들의 영향력을 통하여 불안해진 통치체체를 유지해 보려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박미선, 2004)

또한 헌강왕대의 왕경은 번영과 사치스런 모습의 절정기를 이루게 된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헌강왕 6년 기사에는 민간에서 조차 짚이 아닌 기와를 사용하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 한편 풍년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1 진한(辰韓) 조와 사절유택(四節遊宅) 조에서는 신라 왕경 규모의 거대함을 서술하고 있다. (전기웅, 2005)

참고문헌

전미희, 1989,「신라 경문왕, 헌강왕대의 ‘能官人’ 등용정책과 국학」『동아연구』17.
박미선, 2004,「숭복사비문을 통해 본 헌강왕과 최치원의 정치적 성격」『호남문화연구』34.
전기웅, 2005,「헌강왕대의 정치사회와 處容郞望海寺條 설화」『신라문화』26.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四十九 憲康王 [金氏 名晸 父景文王 母文資皇后 一云義明王后 乙未立 理十一年]
제49대 헌강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정이다. 아버지는 경문왕이며 어머니는 문자황후이다.
혹은 의명왕후라고 한다. 을미(875)에 즉위하여 11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隱吾下於叱古 二?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 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唱歌云 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에는 서울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잇닿아 있고 초가(草家)는 하나도 없었다. 생황소리와 노래가 도로에서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大王)은 개운포(開雲浦)[학성(鶴城) 서남쪽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에 유람하였다. 왕이 장차 돌아가려고 하여,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깜깜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東海) 용(龍)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짓게 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개운포라고 이름하였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여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의 정사를 보좌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고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뜻이 머무르게 하고자 하였고, 또 급간(級干)의 관직(官職)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그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변하여 밤에 그의 집에 몰래 가서 잤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동경(東京) 밝은 달에/ 밤들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로리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이고/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 앗음을 어찌하리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어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부인을 부러워하여 지금 그를 범하였는데, 공이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고 그를 아름답게 여기며, 맹세코 지금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것을 피하고 경사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왕은 돌아와 이내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점지하여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는데,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도 이름하였으니, 곧 용을 위해 세운 것이다.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했을 때 남산신(南山神)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좌우는 보지 못했으나, 왕만 홀로 그것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니, 왕이 몸소 춤을 추어 그 모양을 보였다. 신(神)의 이름을 혹 상심(詳審)이라고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혹은 이미 신(神)이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본떠 새겨서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 한다고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는 그 형상으로 그를 일컬은 것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신(北岳神)이 나타나 춤을 추었으므로, 옥도검(玉刀鈐)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동례전(同禮殿)에서 잔치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지백급간(地伯級干)이라고 이름하였다.『어법집(語法集)』에 이르기를, 그때 산신(山神)이 춤을 추어 바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 등이라고 하였다. 대개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알고 많이 도망하여 도읍(都邑)이 장차 파괴된다는 것을 이른다. 이에 지신(地神)과 산신(山神)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으므로 춤을 추어 그것을 경고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났다고 여겨 탐락(耽樂)이 더욱 심하였으므로,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