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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진성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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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

기본정보

신라 제51대 왕
생몰년 : ?~897
재위 : 887-897

일반정보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曼憲)으로 경문왕의 딸이다. 남편인 위홍(魏弘)의 보필로 인해 왕위에 즉위하고 그의 사후 실정과 혼란한 정국운영으로 신라의 쇠망을 촉진하게 된다.

전문정보

신라 제51대 진성여왕은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曼憲)이다. 아버지는 제48대 경문왕이고 어머니는 제49대 헌안왕의 첫째 딸인 문자왕후(文資王后)이다. 제50대 정강왕이 재위 2년도 못 가 죽자 경문왕가 내의 왕위계승을 이어나가려는 남편 위홍(魏弘)의 보필을 통해 왕에 즉위하게 된다.

진성여왕 즉위 이후 신라 정치사회는 세도정치를 방불케하는 위홍일파에 의한 권력전횡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위 초기에는 죄인을 사면하고 조세를 감면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으나, 진성여왕 2년(888) 위홍이 죽자 그간 위홍의 세도정치 하에서 복종을 강요당해 왔던 진골세력 및 이들과 연계된 주군(州郡)의 통치자들이 위홍의 죽음을 계기로 중앙정부에 대해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시작했다. 이후 지방세력의 이탈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급속히 확산되면서 끝내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 가운데서 지방 상호간에 내란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호족(豪族)의 성장과 대두를 야기하였고 결국에는 후삼국의 성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황선영, 2006)

진성여왕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로 음란하여 정치기강이 문란하였다는 부정적인 면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사료에 등장하는 청소년 장부(丈夫)와의 음란한 관계에 대한 기록은 오히려 위홍이 죽자 그의 측근 세력인 화랑세력을 이용하여 왕권의 안정을 꾀하려한 면모로 해석할 수 있으며 상대(上代)의 선덕여왕(善德女王)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국정운영과의 유사점을 통해 혼란의 시기에 국내정세의 위기를 구하려는 호국의 상징으로서의 여왕추대의 불교사상적인 면을 파악해 볼 수도 있다. (이배용, 1985)

『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眞聖女大王) 거타지(居?知)조에는 진성여왕대 여왕의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위홍(魏弘) 등이 권세를 휘둘렀는데, 문사 왕거인(王居仁)이 국정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옥에 갇혔다가 하늘의 도움으로 풀려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왕의 막내아들인 양패(良貝)가 당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무사 거타지를 남겨두었는데, 거타지가 서해약(西海若)의 요청대로 그 가족을 해치려는 늙은 여우를 죽이고 서해약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진성여왕 11년(897)에 6월 왕위를 조카 요(嶢)에게 양위하였으며 그 해 12월에 죽어 『삼국유사』왕력에 의하면 모량리(牟梁里) 서악(西岳) 혹은 미황산(未黃山)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11년조에는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고하여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이배용, 1985,「신라하대 왕위계승과 진성여왕」『천관우선생 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황선영, 2006,「신라하대 경문왕가의 왕위계승과 정치적 추이」『신라문화』2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五十一 眞聖女王 [金氏 名曼憲 卽定康王之同母妹也 王之匹(魏)(弘)大角干 追封惠成大王 丁未立 理十年 丁巳遜位于小子孝恭王 十二月崩 火葬 散骨于牟梁西岳 一作未黃山]
제51 진성여왕 [성은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으로 즉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대각간이니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정미(887)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정사(897)에 소자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12월에 돌아가시니 화장하여 모량 서악 또는 미황산에 뼈를 뿌렸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진성여대왕 거타지)
眞聖女大王 居?知
第五十一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與其夫魏弘?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羅尼隱語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謂曰 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訴于天 天乃震其獄 <因>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干干三阿<干>(者 言三四寵臣)也 鳧伊者言鳧好也 此王代阿<飡>良<貝>王之季子也 奉使於唐 聞百濟海賊梗於津<島> 選弓士五十人隨之 舡次鵠島[鄕云骨大島] 風濤大作 信宿<浹>旬 公患之 使人卜之 曰 島有神池 祭之可矣 於是 具奠於池上 池水湧高丈餘 夜夢有老人 謂公曰 善射一人 留此島中 可得便風 公覺而以事諮於左右曰 留誰可矣 衆人曰 宜以木簡五十片 書我輩名 沈水而?之 公從之 軍士有居?知者 名沈水中 乃留其人 便風忽起 舡進無滯 居?愁立島嶼 忽有老人從池而出 謂曰 我是西海若 每一沙彌 日出之時 從天而降 誦?羅尼 三繞此池 我之夫婦子孫 皆浮水上 沙彌取吾子孫肝腸 食之盡矣 唯存吾夫婦與一女爾 來朝又必來 請君射之 居?曰 弓矢之事 吾所長也 聞命矣 老人謝之而沒 居?隱伏而待 明日扶桑旣暾 沙彌果來 誦呪如前 欲取老龍肝 時居?射之中 沙彌卽變老狐 墜地而斃 於是老人出而謝曰 受公之賜 全我性命 請以女子妻之 居?曰 見賜不遺 固所願也 老人以其女變作一枝花 納之懷中 仍命二龍 捧居??及使舡 仍護其舡入於唐境 唐人見新羅舡有二龍負之 具事上聞 帝曰 新羅之使 必非常人 賜宴坐於群臣之上 厚以金帛遺之 旣還國 居?出花枝 變女同居焉
진성여대왕 거타지
제51대 진성여왕이 나라 정사에 임한 지 몇 해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잡간 등 서너 명의 총신이 권세를 잡고 정사를 휘두르니,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났다. 나라 사람이 이를 근심하여 다라니의 은어를 지어 써서 길바닥에 던져 두었다. 왕과 권신들이 이를 얻어 보고 말하기를, “왕거인이 아니고야 누가 이 글을 지었겠는가?”라고 하고, 곧 거인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쳐서 벗어나게 되었다. 시에 이르길, “(연나라태자)단의 피눈물에 무지개가 해를 뚫고 (제나라사람)추연의 품은 원한 여름에 서리 내렸네. 지금의 내 신세 예전과 같건만 황천은 어찌하여 아무 조짐을 내리지 않는가.” 다라니에는 “나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우우삼아간 부이사파하”라고 하였다. 풀이하는 이가 말하기를,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소판니는 소판 두 사람을 말한다.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사람의 총신을 말하고) 부이는 부호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 왕의 시대에 아찬 양패는 왕의 막내아들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백제의 해적이 진도에서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 50인을 뽑아 데리고 갔다. 배가 곡도[우리말로 곡대도라고 한다]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열흘 남짓 묵게 되었다. 공이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니, 말하기를, “섬에 신령한 못이 있으니 그곳에 제사지내야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못 위에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한 길 남짓 솟아올랐다. 그날 밤 꿈에 노인이 공에게 말하기를,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머물게 하면 순풍을 얻을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공이 꿈에서 깨어나 좌우에게 이 일을 묻기를, “누구를 머물게 하면 좋을까?”라고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나무조각 50쪽에 우리 이름들을 써서 물에 띄워 가라앉는 것으로 제비를 뽑읍시다.”고 하였다. 공이 이에 따랐다. 군사 중에 거타지란 이가 있어 그의 이름이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머물게 하니, 순풍이 갑자기 일어나 배는 지체없이 나아갔다. 거타지가 수심에 쌓여 섬에 서있었더니, 갑자기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하기를, “나는 서해약(西海若)인데, 매번 한 승려가 해 돋을 때면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우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에 떠오릅니다. 승려는 내 자손의 간과 창자를 다 취해 먹고, 우리 부부와 딸 하나가 남았을 뿐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반드시 올 것이니, 청컨대 그대는 이를 쏘아 주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이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노인이 감사하고 물 속으로 돌아가고, 거타는 숨어서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승려가 과연 와서 전과 같이 주문을 외워 늙은 용의 간을 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 거타가 활을 쏘아 맞추니 승려는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이 때 노인이 나타나 감사하며 말하기를, “공의 덕택으로 우리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거타가 말하기를, “따님을 주시고 저버리지 않으시니 진실로 원하던 바입니다.”고 하였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 꽃으로 바꿔 그의 품 속에 넣어 주고, 또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를 받들고 사신이 탄 배를 따라가 그 배를 호위하게 하여 당나라 경계에 들어갔다. 당나라 사람들이 두 용이 신라의 배를 지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일 것이다.”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에 돌아와서 거타가 꽃가지를 꺼내니, 꽃이 여자로 변하였으므로 함께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