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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효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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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

기본정보

신라 제52대 왕
생몰년 : ?-912
재위기간 : 897-912

일반정보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요(嶢)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이고, 어머니는 문자왕후(文資王后), 또는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김씨이다. 효공왕은 진성여왕의 양위에 따라 897년 즉위하였다. 그는 재위 16년(897)에 죽었는데, 시호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서 화장하여 뼈를 구지제(仇知堤) 동쪽산 허리에 묻었다. 효공왕대는 신라 하대 왕실이 박씨로 넘어가는 분수령이었다. 효공왕대에는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각기 후백제와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후삼국(後三國)시대가 개막되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효공왕의 아버지를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어머니를 문자왕후(文資王后)라고 하였으나『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즉위년조에서는 효공왕을 헌강왕의 서자(庶子)라 하였으며 어머니를 김씨라고 하였다. 재위 2년 봄 정월에 어머니 김씨를 높여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로 삼았고, 3년 봄 3월에는 이찬 예겸(乂兼)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효공왕의 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모계쪽이다.『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효공왕은 헌강왕의 서자이므로, 효공왕의 어머니는 헌강왕의 정비(正妃)가 아니었다.『삼국사기』와『삼국유사』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효공왕의 어머니는 김씨이며, 의명왕태후(義明王太后) 또는 문자왕후(文資王后)라고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에서는 경문왕의 첫째 왕비인 영화부인(寧花夫人)의 시호도 문자왕후라고 하였므로, 잘못된 기록이라 따를 수 없으며, 효공왕의 어머니는『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의명왕태후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다시 말해 의명왕태후가 효공왕의 생모로 추정된다는 것이다.(김창겸, 2003)

효공왕의 왕위 계승은 경문왕의 가계, 즉 헌강왕계를 이어가려는 골품제적인 왕위계승의 원칙 내에서 이루어졌다는 견해가 있다.『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요의 나이가 15세에 이르러 물려줄 시기가 되었다는 뜻은 진성여왕의 왕위계승이 어디까지나 요의 성장을 기다린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이배용, 1985)

또한『삼국사기』에 따르면 원래 효공왕은 어머니의 골품이 진골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골이 될 수 없었는데, 그런 효공왕이 즉위한 데에는 헌강왕의 아들이라는 혈연적 요인과 더불어 당시의 정치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진성여왕이 요에게 선위한 일은 일면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실정(失政)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강제로 퇴위한 사건이었다. 즉 나라 안의 혼란에 대하여 6두품 지식인층과 국인(國人)으로 표현되는 정치집단이나 관료들, 혹은 귀족세력 등의 여왕에 대한 책임추궁 및 퇴진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진성여왕은 왕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움을 인식하고 선위 후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목적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입장이 아닌 자를 왕위계승자로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찾아낸 인물이 요였다.『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9년조에 따르면 여왕은 “내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다.(孤之兄弟姉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라고 하고 그 해 10월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즉 진성여왕은 요의 골법(骨法)이 경문왕가(景文王家)의 그것과 닮았음을 근거로 자신의 후계자로 세웠던 것이다. 이를테면 효공왕의 왕위계승은 자신의 자격이나 능력보다는 진성여왕의 의지와 당시 정치권에서 모종의 타협의 결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김창겸, 2003)

효공왕이 진성여왕의 유조로 인해 즉위했음을 주목하면서 그가 왕위 계승상 취약성을 지닌 인물이지만 지금까지 치열한 왕위쟁탈전의 혼란을 겪어왔던 하대왕실이 왕위계승상 분쟁의 여지가 있는 계승자의 지위를 전왕의 유조를 통하여 확고히 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파악하기도 한다. 즉 효공왕은 헌강왕의 딸과 혼인한 효종(孝宗), 유력 귀족인 예겸(乂兼)의 후원을 받고 있으나, 나중에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이 되는 경휘(景徽)의 존재로 인하여 분쟁의 소지를 갖고 있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여왕 생존시에 후계자를 즉위하게 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진성여왕이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음을 알리는 양위표(讓位表)를 당에 보낸 것도 왕위계승상의 취약성을 변명하고 당의 인정을 얻어 이를 보완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또한 진성여왕의 퇴위와 효공왕의 즉위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졌음에 주목하면, 효공왕대의 왕위계승은 김씨왕실의 세력들과 6두품 유학자 같은 신진세력이 공존하며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진 채 진행되었다고 한다. 효공왕의 즉위과정에서 김씨왕실과 진골귀족의 반발은 시중 준흥(俊興)과의 타협을 통해 무마되었던 듯하며, 왕실과 가까운 존재인 준흥과 효종은 이후에도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였다고 하였다. 진성여왕 이후 효공왕대를 거치는 동안 왕경에서는 정치적 모반이나 반란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하였다.(전기웅, 2006)

한편 효공왕 4년(900)에는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5년(901)에 궁예(弓裔)가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우고 왕을 칭함으로써 후삼국(後三國)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라의 영역은 경상도 일원으로 축소되었고, 후고구려와 후백제는 세력을 넓히기 위해 치열한 쟁패전을 벌여 나갔다.

효공왕은 재위 15년(912)에 죽어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화장하고 뼈를 구지제(仇知堤)동쪽 산허리에 묻었다.『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12 효공왕 16년조 4월에서는 왕이 죽자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배용, 1985,「新羅下代 王位繼承과 眞聖女王」『千寬宇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정음문화사.
김창겸, 2003,『新羅 下代 王位繼承 硏究』, 경인문화사.
전기웅, 2006,「신라말 효공왕대의 정치사회 변동」『新羅文化』27.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五十一 眞聖女王 [金氏 名曼憲 卽定康王之同母妹也 王之匹(魏弘)大角干 追封惠成大王 丁未立 理十年 丁巳遜位于小子孝恭王 十二月崩 火葬散骨于<牟>梁西<岳> 一作未黃山]
제51 진성여왕 [김씨이며, 이름은 만헌으로서 곧 정강왕의 누이동생이다.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이고 혜성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정미년에 즉위하여 10년간 다스렸다. 정사년에 소자(小子) 효공왕에게 양위하였다. 12월에 돌아가니 화장하여 뼈를 모량 서악에 뿌렸다. 또는 미황산이라고도 한다.]


第五十二 孝恭王 [金氏 名嶢 父憲康王 母<文>資王后 丁巳立 理十五年 火葬師子寺北 骨藏于仇知堤東山脇]
제52 효공왕 [김씨이며, 이름은 요이다. 아버지는 헌강왕이고, 어머니는 문자왕후이다. 정사년에 즉위하여 15년간 다스렸다. 사자사 북쪽에 화장하고 뼈는 구지제 동쪽 산허리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