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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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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기본정보

신라 제56대 왕
생몰년 : ?-978
재위 : 927-935

일반정보

신라 제56대 경순왕은 김씨이며 이름은 부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 이간(孝宗 伊干)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경애왕 4년(927)년 후백제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으나 경순왕 9년(935) 고려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였다.

전문정보

신라 제56대 경순왕(927-935)은 김씨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으로 추봉된 효종 이간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조부는 의흥대왕으로 추봉된 관□각간이다. 조선 순조14년(1814)에 건립된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는 문성왕의 6대손인 그의 가보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金傅大王)조에 경순왕의 즉위 및 경순왕의 고려로의 귀부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경순왕 김부는 경애왕 4년(927) 11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 왕도를 침입하여 왕을 시해한 후 견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이후 경순왕 9년(935) 10월에 사방 땅은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가 약해지고 형세는 고립되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다 하여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한 뒤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에 태조는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하고, 경순왕을 정승(正承)으로 삼아 태자보다 높은 자리로 하였으며 신라를 식읍으로 주었다. 또한 태조는 경순왕의 백부 억렴(億廉)의 딸에게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

견훤이 경애왕을 폐위시키고 경순왕을 옹립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고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박씨 왕족에 대한 숙청 이후 정권교체의 의미로 김씨 왕족을 즉위시켰다는 견해와(음선혁, 1997), 견훤의 신라 침입에 김부의 김씨 왕족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이었다는 견해가 있다.(신호철, 1989; 조범환 1991)

경순왕의 집권 이후 정치지배세력간의 분열이나 상호대립의 양상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경순왕을 정점으로 한 권력 체제가 안정되어 가는 추세였다. 경순왕은 집권 이 후 한동안 신라를 둘러싼 주변의 세력동향, 특히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경쟁과 양국의 신라에 대한 정책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피고 있었다. 이후 집권 초기의 소극적인 대외정책의 추진에서 벗어나 집권 후반기로 올수록 적극적으로 대중국, 고려와의 외교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외형적 체제의 안정 속에서도, 경순왕은 9년(935)에 고려 왕조에 귀부할 것을 결정하였다.

경순왕은 신라 왕조의 영토 상실과 국세의 고립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자신의 왕위와 신라의 국가체제의 유지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고려에 귀부를 결정한 것이었다. 또한 왕도와 가까운 지역과 고려와 신라에 이르는 교통로 주변의 호족들의 고려 귀부는 신라 영토의 축소와 세력의 미약을 가속화 시켰다. 특히 경순왕 5년(931) 태조의 경주 방문을 계기로 경순왕의 왕권과 위상의 전락, 경주인의 친고려적 경향과 민심의 이탈 조짐, 관리들을 포함한 정치지배세력의 친왕건적 경향과 응집력의 약화 등은 고려 귀부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음선혁, 1997)

그 후 경순왕은 왕건으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78년에 사망하여 경기도 연천군에 장사지냈다. 왕비로는 『고려사』 권2 태조14년(931)조에 기록되어 있는 죽방부인 박씨(竹房夫人 朴氏)와 고려 태조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가 있다. 죽방부인과의 소생으로는 속세를 등진 마의태자(麻衣太子)와 승려가 된 범공(梵空) 등이 있었다.

참고문헌

신호철, 1989,「新羅의 衰亡과 甄萱」『忠北史學』2.
조범환, 1991,「新羅末 朴氏王의 登場과 그 政治的 性格」『歷史學報』128.
음선혁, 1997,「新羅 敬順王의 卽位와 高麗 歸附의 政治的 性格」『全南史學』11.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五十六 敬順王 [金氏 (名)傅 父孝宗伊干 追封神興大王 祖官□角干 (追)封懿興大王 母桂娥(大后) (憲)康之(女) 乙未納土歸于(大祖) 陵(在)□□□東向洞 自五鳳甲子至乙未 合九百九十二年]
제56 경순왕 [김씨이며 이름은 부이다. 아버지는 효종 이간으로 신흥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조부는 관□각간이니 의흥대왕으로 추봉되었고 어머니는 계아태후로 헌강왕의 딸이다. 을미년에 영토를 바치고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능은 □□□동향동에 있다. 오봉 갑자년으로부터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합하여 992년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김부대왕조)
金傅大王
第五十六金傅大王 諡敬順 天成二年丁亥九月 百濟甄萱侵羅至高鬱府 景哀王請救於太祖 命將以勁兵一萬往救之 救兵未至 萱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奔走 爲賊所虜 無貴賤匍匐乞爲奴婢 萱縱兵?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爲王 王爲萱所擧 卽位 前王尸殯於西堂 與群下慟哭 我太祖遣使弔祭 明年戊子春三月 太祖率五十餘騎巡到京畿 王與百官郊迎 入相對曲盡情禮 置宴臨海殿 酒? 王言曰 吾以不天 侵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如之 因泫然涕泣 左右莫不鳴咽 太祖亦流涕 因留數旬乃廻駕 麾下肅靜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 如見父母 八月 太祖遣使遺王錦衫鞍馬 幷賜群僚將士有差 淸泰二年乙未十月 以四方地盡爲他有 國弱勢孤 不已自安 乃與群下謀擧土降太祖 群臣可否紛然不已 王太子曰 國之存亡必有天命 當與忠臣義士收合心 力盡而後已 豈可以一千年之社稷 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齎書 請降於太祖 太子哭泣辭王 徑往皆骨山 麻衣草食以終其身 季子祝髮 隷華嚴爲浮圖 名梵空 後住法水海印寺云 太祖受書 送太相王鐵迎之 王率百僚歸我太祖 香車寶馬連?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一區[今正承院] 以長女樂浪公主妻之 以王謝自國居他國 故以鸞喩之 改號神鸞公主 諡孝穆 封爲正承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王納土來降 太祖喜甚 待之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婚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王答曰 我伯父億廉[王之考孝宗角干追封神興大王之弟也]有女子 德容雙美 非是無以備內政 太祖娶之 是爲神成王后金氏[本朝登仕郞金寬毅所撰王代宗錄云 神成王后李氏 本慶州大尉李正言爲俠州守時 太祖幸此州 納爲妃 故或云俠州君 願堂玄化寺 三月二十五日立忌 葬貞陵 生一子 安宗也 此外二十五妃主中 不載金氏之事 未詳 然而史臣之論 亦以安宗爲新羅外孫 當以史傳爲是] 太祖之孫景宗? 聘政承公之女爲妃 是爲憲承皇后 仍封政承爲尙父 太平興國三年戊寅崩 諡曰敬順 冊尙父誥曰 勅姬周啓聖之初 先封呂主 劉漢興王之始 首<冊><蕭>何 自大定?區 廣開基業 立龍圖三十代 ?麟趾四百年 日月重明 乾坤交泰 雖自無爲之主 乃<關>致理之臣 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承食邑八千戶金傅 世(處)鷄林 官分王爵 英烈振凌雲之氣 文章騰擲地之才 富有春秋 貴居茅土 六韜三略拘入胸襟 七縱五申撮歸指掌 我太祖<始修陸隣>{擲}之好 早認餘風 尋{時}頒駙馬之姻 內酬大節 家國旣歸於一統 君臣宛合於三韓 顯播令名 光崇懿範 可加號尙父都省令 仍賜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號 勳封如故 食邑通前爲一萬戶 有司擇日備禮冊命 主者施行 開寶八年十月日 大匡內議令兼摠翰林臣?宣奉行 奉勅如右 牒到奉行 開寶八年十月日 侍中署 侍中署 內奉令署 軍部令署 軍部令無署 兵部令無署 兵部令署 廣坪侍郞署 廣坪侍郞無署 內奉侍郞無署 內奉侍郞署 軍部卿無署 軍部卿署 兵部卿無署 兵部卿署 告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尙父都省令上柱國樂浪{都}王食邑一萬戶金<傅> 奉勅如右 符到奉行 主事無名 郞中無名 書令史無名 孔目無名 開寶八年十月日下 史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爲實事 今但<原>厥初在上者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宿衛 入學而誦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 可謂盛矣 然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 景哀王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出遊鮑石亭 置酒燕<衍> 不知甄萱之至 與門外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佳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卽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甚大 昔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過於彼遠矣我太祖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卽寶位 此後繼統者皆其子孫 豈非陰德也歟 新羅旣納土國除 阿干神會罷外署還 見都城離潰 有黍離離嘆 乃作歌 歌亡未詳
김부대왕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鬱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은 고려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구하러 가게 했으나 구원병이 미처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겨울 11월에 서울로 쳐들어갔다.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갑작스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기며 노비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관청과 개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서 거처하였다. 이에 좌우에게 명하여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영 가운데로 잡아서 왕에게 자결하도록 명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바가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이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서 조상하였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가 서로에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해지자 왕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을 불러들였고, 견훤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였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라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일을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은 엄숙하고 정제해서 조금도 범하지 않으니 왕경의 사녀들이 서로 경하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 8월에 태조는 사자를 보내 왕에게 금삼과 안장 갖춘 말을 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사들에게도 차등있게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고립되어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 끝나지 않자 왕태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의 사직을 경솔하게 남에게 내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참혹한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하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범공(梵空)이라 이름하였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는 국서를 받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의하니, 향차(香車)와 보물과 말들이 30여 리에 이르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고 해서 이를 난새에 비유하여 신란공주(神鸞公主)로 칭호를 고치고, 시호를 효목(孝穆)이라고 하였다. 왕을 봉해서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의 위이며 녹봉 1천 석을 주었다. 시종과 관원?장수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여 이를 공(경순왕)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항복해오자 태조는 무척 기뻐하여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시니 주시는 것이 매우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해서 장인과 사위의 좋은 의를 길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우리 백부 억렴(億廉)[왕의 아버지 효종(孝宗) 각간(角干),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이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과 용모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을 맡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에게 장가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이다.[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신성왕후 이씨는 본래 경주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태조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 때문에 그를 협주군(俠州君)이라고도 한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라고 하였다. 이 밖에 25비주(妃主) 중에 김씨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論)에 또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하겠다]
태조의 손자 경종 주는 정승공의 딸을 맞아 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이다. 이에 정승을 봉해서 상보라고 하였고, 태평흥국 3년 무인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이라고 하였다. 상보(尙父)로 책봉하는 고(誥)에서 말하기를 “조칙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성인의 사업을 열기 시작하였을 때 먼저 여주(呂主)를 봉했고, 유한(劉漢)이 왕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하였다. 이로부터 온 천하를 평정하였고 기업을 널리 열었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인지(麟趾) 4백년을 밟아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하였으니,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로서 시작하였으나, 역시 보좌하는 신하로 해서 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천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거주하였고 벼슬은 왕의 작위를 받았고, 그 영특한 기상은 구름을 뚫고 올라서고 문장의 재주는 땅을 진동할만한 하였다. 장래가 넉넉하고, 봉토에서 귀하게 거주하였으며, 가슴 속에는 육도삼략이 들어 있었고, 손바닥에는 칠종오신을 잡아 쥐었다. 우리 태조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를 닦으시니, 일찍이 전해 내려오는 풍도를 알아서 이내 부마의 혼인를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보답하였다. 이미 나라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전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올바른 규범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 도성령의 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호를 주니, 훈과 봉작은 전과 같고 식읍은 전후를 합쳐서 1만호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택하고 예를 갖추어 책명(冊名)하고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 10월 일. 대광 내의령 겸 총한림 신 핵선은 받들어 행하여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직첩이 도착하는대로 봉행하라. 개보 8년 10월 일. 시중 서명, 시중 서명 내봉령 서명, 군부령 서명, 군부령 무서, 병부령 무서,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 서명, 광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없음, 내봉시랑 서명, 군부경 서명없음, 군부경 서명, 병부경 서명없음, 병부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 도성령 상주국 낙랑왕 식읍 1만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령을 받들고 부(符)가 도착하는 대로 봉행하라. 주사 이름없음, 낭중 이름없음, 서령사 이름없음, 공목 이름없음. 개보 8년(975) 10월 일에 내림.”이라 하였다. 사론에서 말하기를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오고, 김씨는 금궤 속에 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혹은 금으로 된 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더욱 황당해서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이는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했고 남을 위해서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하였다. 정성스럽게 중국을 섬겨서 바다 건너 조빙하는 사신이 서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으며, 항상 자제들을 중국에 보내 숙위하게 하고 입학하여 외우고 익히게 하였다. 이리하여 성현의 풍화를 이어받고 미개한 풍속을 고치어 예의있는 나라로 만들었다. 또 천자의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을 삼았으니 가히 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여 마을에는 탑과 절이 이어지고, 백성들은 사찰로 도망가 중이 되게 하니 병사와 농민은 줄어들고, 나라가 날로 쇠퇴해가니 어찌 어지러워지고 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 경애왕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 바빠 궁인들과 좌우 근신들과 더불어 포석정에 나가 술자리를 베풀고 즐겨 견훤이 오는 것도 몰랐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나 누각 위의 장려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과 같은 것은 비록 마지못하여 한 것이지만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다. 그 때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 왕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힘은 꺾이고 형세가 궁지에 몰렸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멸망당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조정에 대해서는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 대해서는 덕이 있는 것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옛날 전씨가 오월의 땅을 송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은 충신이라고 했는데 이제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하였다.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며 그 후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 신회는 외직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도성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