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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기본정보

고려 제1대 왕
생몰년 : 877-943
재위 : 918-943

일반정보

태조 왕건은 송악지방 호족의 자제로 태어나 궁예의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궁예가 실정하자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을 통일 한 후 지방세력을 회유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한다.

전문정보

고려를 건국한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송악(松嶽)지방 호족(豪族)의 자제였다. 태조 왕건의 선세(先世)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첫머리에 실려 있는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전승되어 있어 대체적인 윤곽만은 살필 수 있다.

왕건의 선대는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 칭한 호족이 백두산으로부터 부소산(夫蘇山) 좌곡(左谷)에 이르러 혼인하고 가정을 마련한 것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서 강충(康忠)이 태어나 역시 서강 영안촌 부인(西江 永安村 富人)의 딸인 구직의(具直義)에게 장가들어 살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부소군(扶蘇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서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나리라」는 풍수설에 따라 그대로 하고는 인하여 송악군(松嶽郡)이라 이름을 바꾸고 그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다고 한다. 강충은 슬하에 윤제건(尹帝建)과 손호술(損乎述, 寶育으로 改名) 두 아들을 두었고, 보육에게는 다시 두 딸이 있었는데, 때마침 잠저(潛邸) 시의 당(唐)나라 숙종(肅宗)이 산천을 둘러보고자 바다를 건너 이곳에 왔다가 언니의 꿈을 산 차녀 진의(辰義)와 인연을 맺어 작제건(作帝建)을 낳았다. 그 후 작제건이 성장하여 아버지를 만나고자 상선을 타고 가던 중 서해 용왕을 괴롭히는 늙은 여우를 처치해 주고는 그의 딸 용녀와 혼인을 하여 되돌아오니 백주(白洲)의 정조(正朝)인 유상희(劉相晞) 등이 소식을 듣고 큰 경사라 하여 개주(開州)?정주(貞州)?고주(?州)?강화(江華)?교동(喬桐)?하음(河陰) 등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이들을 위해 영안성(永安城)을 쌓고 궁실(宮室)을 지어 주었다. 용건(龍建, 隆으로 改名)은 작제건과 용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사람됨이 크고 도량이 넓어서 삼한을 통합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뒤에 그는 꿈에서 본 여인을 만나 혼인하여 태조 왕건을 얻게 되었다.

왕건의 세계는 설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으나 중요한 사실은 그의 집안이 바다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강충이 서강, 곧 예성강구(禮成江口)의 영안촌 부녀의 딸과 결혼한 사실이나 당나라 숙종이 바다를 건너온 이야기 및 작제건과 용녀와의 혼인설화 등은 모두 바다와 관련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왕건의 선세는 신라 말에 크게 일어났던 해상세력가 중의 하나였다고 짐작된다.

또한 왕건의 가문은 강충 때 이미 자의로 군(郡)의 위치를 옮기고 그곳의 상사찬이 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작제건에 이르러서는 개주(개성), 정주(예성강 하류), 고주(연안), 백주(백천), 강화, 교동, 하음 등의 인원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집을 지은 것으로 미루어 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와 강화도 및 한강 하류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왕건의 세력기반은 그가 궁예의 부장(部將)으로서 여러 전선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움에 따라 더욱 다져질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우세한 수군력(水軍力)을 가지고 서남해 방면의 공략에 힘써 금성(錦城-나주), 진도(珍島) 등을 점령함으로써 후백제의 중국, 일본과의 통로를 막고 또 북방에 대한 정면 공격을 견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왕건은 그 같은 전공에 의해 시중(侍中)의 자리에까지 오르지만, 경명왕 2년(918)에 폭군화된 궁예가 축출되면서 홍유(洪儒), 배현경(裴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로 마침내 왕위에 올라 새로이 고려를 개창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이처럼 일거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그의 높은 덕망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세력기반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왕조를 연 태조 왕건은 도읍을 철원으로부터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으로 옮기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치적, 군사적 지반을 확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 오대(五代)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한편 신라에는 우호적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에 대하여는 무력으로 대결해 나가는 정책을 썼다. 이와 같은 태조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고려는 경순왕 9년(고려 태조 18년, 935)먼저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평화리에 신라를 병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서 이듬 해에는 왕실이 내분을 일으켜 분열된 후백제를 일리천(一利川) 싸움에서 격파하고 당시의 후백제 왕인 신검(神劍)의 항복마저 받아내 마침내는 후삼국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태조는 호족들을 회유 억압하는 정책으로 혼인정책을 실시하여 29명의 후비(后妃)를 맞아 들였으며 25명의 왕자와 9명의 왕녀를 얻었다. (박용운, 1985)

참고문헌

박용운, 1985, 『고려시대사』,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五十六 敬順王 [金氏 (名)傅 父孝宗伊干 追封神興大王 祖官□角干 (追)封懿興大王 母桂娥(大后) (憲)康之(女) 乙未納土歸于(大祖) 陵(在)□□□東向洞 自五鳳甲子至乙未 合九百九十二年]
제56 경순왕 [김씨이며 이름은 부이다. 아버지는 효종 이간으로 신흥대왕으로 추봉되었다. 조부는 관□각간이니 의흥대왕으로 추봉되었고 어머니는 계아태후로 헌강왕의 딸이다. 을미년에 영토를 바치고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능은 □□□동향동에 있다. 오봉 갑자년으로부터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합하여 992년이다.]

太祖 [戊寅六月裔死 太祖卽位于鐵原京 己卯 移都松岳郡 是年 創法王 慈雲 王輪 內帝釋 舍那 又創天禪院[卽普濟] 新興 文殊 (圓)通 地藏 前十大寺 皆是年所創 庚辰乳岩下立油市 故今俗利市云乳下 十月創大興寺 或系壬午 壬午又創日月寺 或系辛巳 甲申 創外帝釋 神衆院 興國寺 丁亥創妙寺 己丑 創龜山 庚寅安] 丙申 統三
태조 [무인년 6월에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하였다. 기묘년에 도읍을 송악군으로 옮겼다. 이 해에 법왕(法王), 자운(慈雲), 왕륜(王輪), 내제석(內帝釋), 사나(舍那) 절을 세우고 또 천선원(天禪院) [즉 보제(普濟)], 신흥(新興), 문수(文殊), 원통(圓通), 지장(地藏) 절을 세웠으니 앞의 10대 사찰은 모두 이 해에 창건되었다. 경진년에 유암(乳岩) 아래에 유시(油市)를 세웠다. 이 때문에 지금 항간에서는 이시(利市)를 유하(乳下)라고 한다. 10월 대흥사(大興寺)를 창건하였는데 혹은 임오년의 일이라고 한다. 임오에 또 일월사(日月寺)를 창건하니 혹은 신사년의 일이라고도 한다. 갑신년에 외제석(外帝釋), 신중원(神衆院), 흥국사(興國寺)를 세우고 정해년에는 묘사(妙寺)를 세웠다. 기축년에는 귀산(龜山)을 세우고 경인년에 안 (이하 미상)] 병신년에 삼국을 통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