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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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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기본정보

백제 제13대 왕
생몰년: ?-375
재위기간: 346-375

일반정보

백제의 제13대 왕으로 제11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이다. 계왕(契王)의 뒤를 이어 346년부터 375년까지 재위하였다. 재위 30년에 죽자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이 왕위에 올랐다.

전문정보

백제의 제13대 왕으로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진서(晋書)』에는 여구(餘句),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근속고왕(近速古王), 『고사기(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 초고, 속고, 조고는 모두 같은 음을 달리 표현한 예로서, 백제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할 때 생긴 차이로 보인다. 그리고 『진서(晋書)』의 여구는 백제 왕실의 성씨인 부여를 간략하게 줄여 ‘여’자만 취하고 근초고 혹은 초고에서도 앞의 글자를 생략한 채 뒷글자 '고'만 취하는 바람에 생긴 중국식의 새로운 표기로 본다.(김기섭, 2000)

근초고왕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을 불신하는 입장에서는 근초고왕대 새로운 왕조의 출현이라는 의견이 있었지만,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직자(直子)인가 아닌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없었다. 그러나 비류왕의 왕명이 온조(溫祚)의 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비류(沸流)와 음이 비슷한 것과, 재위시의 정책성향이 비류와 크게 다른 점을 들어 비류와 근초고왕이 직자(直子)관계가 아닐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있었으며,(김두진, 1999) 최근에는 비류왕과 근초고왕을 이질적인 계통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김기섭, 2000)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고 있으며, 왕위계승 문제가 없는 듯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근초고왕이 즉위과정에 대해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첫째, 비류왕 사후 초고계가 계속해서 왕위를 잇지 않고 고이계인 계왕이 즉위하고 있다.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직자(直子)였다면 비류왕 사후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고이계인 계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있는 것은 계왕의 왕위계승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근초고왕은 왕명(王名)에서 초고계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앞에 ‘近’ 자를 붙이고 있다. 초고계로의 왕위계승이 비류왕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대에 이를 다시 강조하는 것은 비류왕이 초고왕의 직계가 아니고 근초고왕이 초고왕과 직계관계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강종원, 1997) 근초고왕의 왕명에 ‘近’ 자를 붙여 사용한 것은 초고왕과의 계승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임과 동시에 왕위계승상에 있어서 초고계 직계의 등장을 공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노중국, 1988) 셋째, 근초고왕은 정치성향이 비류왕과 전혀 다르다. 근초고왕은 활발한 대외정책을 펴고 있음에 비해 비류왕은 주로 내정에 치우치고 있다. 정치성향만을 통해 직자관계를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으나, 만일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직자라고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부왕(父王)의 정치노선이 근초고왕에게로 이어졌을 것이다. (강종원, 1997) 넷째, 비류왕 후기의 정국 운영상에 보이는 현상을 보면, 비류왕이 재위 전?중기를 거치면서 왕권을 확립하였음은 『삼국사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진씨(眞氏)세력이 재등장한 비류왕 30년(333) 이후가 되면, 정국운영이 위축되고 있다. 진씨세력은 근초고왕대 이후부터 왕비족(王妃族)으로 등장하는데, 근초고왕이 비류왕의 직자라고 한다면 진씨세력이 비류왕과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비류왕이 활발한 정치운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비류왕의 정치활동에 대한 기록이 지극히 소략하게 기술되고 있어 진씨세력의 재등장은 비류왕의 왕권위축과 동시에 근초고의 대두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강종원, 1997)

한편,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 나타난 제 2자(子)로 왕위에 오르는 인물은, 직자관계가 아니라 전왕과 혈연관계를 부회하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경우도 단지 비류왕과의 혈연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둘째 아들로 기록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근초고왕의 ‘近’이 초고왕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면, 근초고왕의 왕계는 초고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진서(晋書)』간문제기(簡文帝紀) 함안(咸安) 2년 6월조의 “遣使拜百濟王餘句爲鎭東將軍領樂浪太守”를 통해 근초고왕의 성이 부여씨(扶餘氏)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1 온조왕 즉위년조에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 온조왕 역시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초고왕에 ‘近’자를 붙여 이루어진 근초고왕이 부여씨이므로 초고왕 역시 부여씨였을것으로 추정된다면, 근초고왕의 계통은 온조-초고계로 연결될 수 있다.(강종원, 1997)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며, 근초고왕 27년(372)에는 동진(東晋)에 조공하고 진동장군령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 라는 작호를 받았다. 『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때 백제가 군사적으로 고구려를 압도하여, 북쪽 영토를 대동강 근처까지 확장한 사실만 대략적으로 적어놓았지만, 근초고왕의 군사활동이 북방으로만 전개되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를 해석하여, 369년 무렵에 전라도지역에까지 진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한을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 일대까지 미쳤고(이병도, 1976) 이와 함께 낙동강유역에 진출하여 가야제국에 대한 지배권도 확립했다는 견해가 있다.(천관우, 1989)

근초고왕릉으로는 석촌동 3호분이 추정되고 있다. 석촌동 3호분은 고구려 계통인 기단식 적석총이다. 3호분의 규모는 장축을 동서로 하는 장방형이고, 동서 49.6m, 남북 43.7m, 높이 4.0m 내외이다. 충적대지의 약간 높은 곳에 판축으로 지형을 정리한 후에 외곽기단을 대형 돌로 돌려 쌓은 후에 내부를 할석(割石)으로 충전해가는 방법으로 만들었으며 각 단(段)에는 다듬은 할석으로 축조하고 내부는 할석으로 채워 넣었다. 각 단의 폭은 약 5m내외이다.

참고문헌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천관우, 1989, 『古朝鮮史 ? 三韓史硏究』, 일조각.
이기동, 1996, 『百濟史硏究』, 일조각.
김두진, 1999, 『韓國古代의 建國神話와 祭儀』, 일조각.
김기섭, 2000, 『백제와 근초고왕』, 학연문화사.
강종원, 2002, 『4세기 백제사 연구』, 서경.
김원룡?배기동, 1983, 『石村洞 3號墳 發掘調査報告書』, 서울대박물관.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三 近肖古王 [比流第二子 丙午立 理二十九年] 辛未 移都北<漢>山
제13 근초고왕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병오년에 즉위하여 29년간 다스렸다.] 신미년에 도읍을 북한산으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