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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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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왕

기본정보

백제 제21대 왕
생몰년: ?-475
재위기간: 455-475

일반정보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제20대 비유왕(毗有王)의 아들이다. 근개로왕(近蓋鹵王), 경사(慶司)라고도 한다. 비유왕의 뒤를 이어 455년부터 475년까지 재위하였다. 재위 21년(475)에 고구려에 의해 한성(漢城)이 공격 받아 죽자 문주왕(文周王)이 왕위에 올랐다.

전문정보

백제의 제21대 왕으로 제20대 비유왕(毗有王)의 아들이다. 근개로왕(近蓋鹵王), 경사(慶司)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근개루(近蓋婁)라 하고 이름은 경사(慶司),『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3 개로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비유왕의 맏아들이며, 비유가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毗有王之長子 毗有在位二十九年薨嗣)”라고 하였는데, 『삼국유사』왕력에는 양자의 혈연관계가 이례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또한 개로왕이 즉위한 뒤 13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록이 보이지 않고, 한성(漢城)이 함락된 후 개로왕을 죽인 고구려군의 장수 재승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이 본래 백제인 이었으나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간 자였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개로왕초에 어떤 정변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하기도 하였다.(천관우, 1989) 정변의 성격에 대해서는 개로왕이 이제까지 쇠약해 있던 왕권을 강화하고 확립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보기도 한다.(노중국, 1988)

개로왕이 왕권을 확립하고자 왕족출신의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여 친위세력으로 삼으려고 하였고, 고구려의 압력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책도 추진하였다. 비유왕이 신라와 맺은 우호관계의 유지에 노력하였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어 군사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개로왕 7년(461)에 왕제(王弟) 곤지(琨支, 군군軍君)를 왜에 파견하였다. 곤지의 왜국 파견 목적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구려의 남진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왜의 군사력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이도학, 1995) 그리고 성곽과 궁실을 짓고 부왕(父王)의 능묘(陵墓)를 새롭게 조영하는 대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대토목공사가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기 위한 고구려 첩자인 승(僧) 도림(道琳)의 계책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개로왕이 왕권의 신장과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실행한 정책이라고 보기도 한다.(이도학, 1995)

한편, 개로왕 21년(475) 고구려는 대대적으로 백제를 공격하였다. 왕도(王都) 한성(漢城)을 공격함에 미쳐 먼저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성(南城)을 공격하였다. 남성(南城)에 있던 개로왕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아단성하(阿旦城下)에서 죽임을 당한다.

참고문헌

천관우, 1989, 『古朝鮮史 ? 三韓史硏究』, 일조각.
노중국,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이도학, 1995, 『백제 고대국가 연구』, 일지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一 盖鹵王 [一云近盖鹵王 名慶司 <乙>未立 治二十年]
제21 개로왕 [근개로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경사이다. 을미년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