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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문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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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왕

기본정보

백제의 제22대 왕
생몰년 : ?-477
재위기간 : 475-477

일반정보

문주왕(文周王)은 백제의 제22대 왕으로 문명(文明)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버지는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이지만 개로왕의 동생이라는 주장이 있다. 아들은 제23대 삼근왕(三斤王)이다. 475년 고구려군에게 피살된 부왕을 이어 폐허가 된 한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귀족세력의 도움을 받아 웅진으로 천도하였지만 귀족들의 정쟁을 제어하지 못하고, 재위 3년(477)에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피살되었다.

전문정보

백제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삼국유사』왕력편에는 문명(文明)이라고도 하였다.『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즉위년조의 세주에는 문주(汶洲)로 되어 있다. 문주왕의 가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이 아버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권14 웅략기 21년조에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되어 있다. 이 모순되는 견해에 대해 문주왕이 개로왕 즉위 후에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고 상좌평과 같은 최고위직은 대체로 왕제(王弟)가 임명되는 사실을 볼 때,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다.(1996, 이기백) 한편, 『남제서』 권58 열전 백제전에 따르면 모대(牟大) 즉 24대 동성왕이 망조부(亡祖父)인 모도(牟都)를 이어 백제왕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때 모도를 문주왕으로 파악하고, 『송서』 권97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여도(餘都)와 같은 인물이라 보기도 한다.(이기동, 1996) 제21대 개로왕(蓋鹵王)이 고구려군에게 피살된 475년에 한성에서 즉위하여 3년동안 재위하였다.

문주왕은 고구려군이 개로왕을 피살하고 수도인 한성을 함락한 국가적 위기 상황속에서 왕위에 즉위하였다. 그가 왕자로 있었을 때는 개로왕을 보좌하고 최고관직인 상좌평(上佐平)에 있으면서 지위를 누렸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군의 침입을 받자 개로왕이 신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특임을 그에게 맡긴 것은 차기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의 구원병을 이끌고 돌아왔을 때는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고구려군에게 패배를 당하고 왕이 되었지만 그 권위는 떨어졌고 개로왕의 왕권 강화정책에 억눌려 있던 귀족들의 불만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개로왕 정권에 참여한 지배계급이 패전과 천도의 혼란기에 몰락하면서 문주왕은 개로왕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귀족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세력이 해씨(解氏)이다. 해씨는 목씨(木氏) 세력과 함께 웅진 천도를 주도함으로써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해씨는 고구려의 재침입을 고려하면서 자신들의 근거지이었던 북방(北方) 지역에서 멀지 않고 토착세력이 강하지 않은 지역인 웅진(熊津)을 선택하였다. 동시에 그들에게 우호적인 연씨(燕氏) 세력이 웅진 근처에 있었던 것도 고려되었을 것이다.(정재윤, 2000) 연씨 입장에서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유력한 귀족인 해씨의 후원이 필요했었을 것이다.(이기백, 1982)

『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문주왕은 성품이 부드러우나 결단력이 없다고 하였다. 건국 이후 최대의 혼란기를 맞은 백제에는 강한 지도력을 갖춘 왕이 필요했지만 문주왕은 과단성이 부족하고 유약한 인물이어서 한 국가를 이끌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것이다. 패전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웅진에서 유약한 왕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주왕은 본거지를 잃은 부여족계통의 구귀족인 해씨?진씨와 남부에 기반을 두고 있던 사택씨(沙宅氏)?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정권쟁탈전을 제어하지 못했다.(정재윤, 2000) 결국 정권을 잡은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사냥을 기회로 삼아 문주왕을 살해하고(477) 왕의 맏아들인 삼근(三斤)을 옹립하였다.『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문주왕 4년조에 의하면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법을 어지럽히며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왕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兵官佐平解仇 擅權亂法 有無君之心 王不能制)”고 서술했다. 한편『삼국사기』에서는 문주왕이 재위 4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따른『삼국유사』의 기록과 재위 3년이라 언급한『삼국사기』권30 연표에 따라 재위기간이 3년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이병도, 1977)

참고문헌

이병도, 1977,『國譯篇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이기백, 1982, 「熊津時代 百濟의 貴族勢力」『백제연구』특집호.
이기백, 1996,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이기동, 1996, 『百濟史硏究』, 일조각.
정재윤, 2000, 「文周?三斤王代 解氏 세력의 동향과 昆支系의 등장」『사학연구』60.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二 文周王 [一作文明 盖鹵子 乙卯立 移都熊川 理二年]
제22대 문주왕[또는 문명이라고도 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하여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2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