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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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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기본정보

백제의 제26대 왕
생몰년 : ?-554
재위기간 : 523-554

일반정보

성왕(聖王)은 백제의 제26대 왕으로 이름은 명농(明?)이다. 제25대 무령왕(武寧王)의 아들로 523년에 즉위하였다. 무령왕의 왕권 안정을 바탕으로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는 체제정비를 이룩하였고 잠시 한강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위 32년(554)에 신라와 벌인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아들은 제27대왕인 위덕왕(威德王)이며, 1995년에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을 통해 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문정보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의 이름은 『삼국유사』 왕력편에 명농(明?)으로 나오며,『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성왕 즉위년조에는 명농(明?)으로 되어 있다.『양서』권54 열전48 백제전에는 명(明)으로 나오며,『일본서기』권19 흠명기 15년조에는 명왕(明王) 혹은 성명왕(聖明王)?성왕(聖王)으로 표기되었다. 제25대 무령왕(武寧王)의 아들로 523년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권26 백제본기4 성왕 즉위년조에 따르면 성왕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결단성이 있었고, 무령왕이 돌아가자 왕위를 이었는데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 하였다(智識英邁 能斷事 武寧薨 繼位 國人稱爲聖王)”고 전한다. 수도를 사비(泗?)로 옮기고 잠시나마 오래동안 상실했던 한강지역을 다시 찾은 그의 업적은 동성왕 이후 꾸준히 추진되어 온 왕권강화의 한 결과이기도 했다.

성왕은 재위 16년(538) 봄에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泗?)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사비 즉 오늘날의 부여는 이전 수도인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을 끼고 있는 지역이었다. 백제의 사비천도 계획은 동성왕 때부터 시도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노중국, 1988) 동성왕은 여러 차례 사비로 사냥을 나갔다. 이때 사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새로운 수도를 찾기 위한 탐색과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동성왕이 백가(?加)에 의해 살해되어 사비천도 계획은 중단되었다. 동성왕의 무리한 왕권강화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안 무령왕은 40세에 즉위하면서 사비천도보다는 왕권의 안정과 국력 부흥에 힘썼다.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百濟更爲强國)”고 중국에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무령왕의 업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왕은 무령왕이 이룬 왕권강화와 사회안정을 바탕으로 사비천도를 다시 추진하였다. 고구려에 밀려 쫓기듯이 내려와 수도가 되었던 웅진을 벗어나 사비로 천도함으로써 국가경영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성왕은 천도와 더불어 지방통치제도와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지방을 방(方)-군(郡)-성(城) 체제로 구획하여 지방의 전면적인 지배를 단행하였으며,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개의 관서를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제정비는 왕권강화 정책의 핵심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다.(노중국, 1988)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새로 정한 것은 시조인 온조왕으로부터 시작된 부여족으로서의 정체성 확립과 역사적 정통성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동시에 대립하고 있던 같은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를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이외에 겸익(謙益)과 같은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의 진흥을 꾀하고 국가의 정신적 토대를 굳게 하였다. 밖으로는 양(梁)과 왜(倭)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양으로부터는 새로운 문물을 수입하였고 왜에게 불교와 함께 오경(五經)?의(醫)?역(易)?역(歷) 박사 등 여러 방면의 기술자를 보내주었다.

성왕은 체제정비에 따른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의 옛 땅을 차지하려 하였다. 그는 신라 진흥왕과 동맹하였는데, 재위 29년(551)에 고구려의 내분을 틈타 북진을 시작하였다.『삼국사기』권44 열전4 거칠부전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하여 고구려의 한강 유역으로 진공하였다. 백제군은 옛 수도가 있는 한강 하류 지역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고, 신라군은 한강 상류로 올라-가 10개 군(郡)을 차지 하였다. 그러나 2년 뒤에 백제는 나제동맹을 어긴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아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다. 이에 분격한 성왕은 이듬해(554) 7월에 대가야(大伽倻) 군대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관산성(管山城)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백제는 동성왕 이후 꾸준히 추진해오던 왕권중심의 정치 운영체제가 흔들리고 다시 귀족들이 득세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성왕을 이어 맏아들인 위덕왕(威德王)이 즉위하였으며, 1995년에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을 통해 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성왕의 능은 묘제 형식을 근거로 부여 능산리에 있는 중하총(2호분)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이남석, 2002)

참고문헌

노중국, 1988,『百濟 政治史硏究』, 일조각.
이남석, 2002, 『백제묘제의 연구』, 서경문화사.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六 聖王 [名明? <武>寧子 癸<卯>立 理三十一年] 戊午 [移都泗 稱南扶余]
제26대 성왕[이름은 명농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 무오년[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하였다.]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六 聖王 [名明? <武>寧子 癸<卯>立 理三十一年] 戊午 [移都泗 稱南扶余]
제26대 성왕[이름은 명농으로 무령왕의 아들이다. 계묘년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 무오년[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남부여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