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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위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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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기본정보

백제의 제27대 왕
생몰년 : ?-598
재위기간 : 554-598

일반정보

위덕왕(威德王)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제26대 성왕(聖王)의 맏아들로 554년에 즉위하였다. 관산성(管山城) 전투의 패배로 왕권의 권위가 위축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위덕왕은 재위 45년(598)에 사망하고 아들로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있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王興寺)터 사리함을 통해 또 다른 아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전문정보

백제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의 이름은 『삼국유사』왕력편에 의하면 고(高) 또는 명(明)이며,『삼국사기』권27 백제본기5 위덕왕 즉위년(554) 조에는 창(昌)으로 되어 있다. 1995년 부여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에서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에는 창왕(昌王)이라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위덕왕은 성왕 전사 이후 바로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이나, 『일본서기』 흠명기 18년조에 위덕왕이 성왕 사후 3년에 즉위한 것으로 보아 관산성 전투 이후 즉위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덕왕은 성왕이 신라군의 습격으로 사망했던 관산성(管山城) 전투에서 선봉에 있었다. 그러나 성왕이 사망하고 3만에 가까운 사졸들이 전사할 정도로 큰 패배를 당한 백제는 충격에 휩싸였다.『일본서기』권19 흠명기 16년(555)조에 의하면 위덕왕은 왜국(倭國)에 군사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해 왜국은 백제의 건국신으로 추정되는 건방신(建邦神)을 잘 받들라고 충고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눈에 비친 백제의 상태가 매우 절망적이었던 같다. 이같은 실정이었기에 위덕왕은 즉위하면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고, 신흥세력인 사씨(沙氏)?연씨(燕氏) 등이 주축이 된 귀족세력이 대두하여 왕권은 크게 위축되었다.(이기백?이기동, 1982)

『삼국사기』에서 위덕왕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왕으로서 45년 동안 있었지만 중국에게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백제의 국내 상황을 전해주는 내용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위덕왕의 권력이 상당히 위축되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는 결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위덕왕이 점차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덕왕은 집권초기에 관산성 전투를 주도한 목씨(木氏)?진씨(眞氏) 세력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정권에서 배제시켰다. 그리고 사씨(沙氏)?연씨(燕氏)등의 주화파를 등용하면서도 동시에 전쟁을 통한 방법으로 꾸준히 왕권을 강화시키려 했다. 위덕왕 14년(567) 이후에는 거의 전쟁이 없었고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형성되었다.『삼국사기』에는 위덕왕의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지만, 이 시기 왕은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을 높였고, 중국과 활발한 외교를 통해 왕권을 점차 높였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양기석, 1990)

위덕왕이 즉위한 이후 왕권의 동향이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위덕왕을 이은 혜왕이나 법왕이 1년만에 왕위에서 물러난 것을 고려하면 당시 백제 정세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위덕왕은 재위 45년(598)에 사망하였다. 당시 아들인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있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했으며, 동생으로 추정되는 혜왕(惠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2007년에 발견된 왕흥사(王興寺)터 사리함을 통해 또 다른 아들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이기백?이기동, 1982,『韓國史講座』I, 일조각.
양기석, 1990, 「百濟 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百濟硏究』21.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七 威德王 [名<高> 又明 甲戌立 理四十四年]
제27대 위덕왕[이름은 고 또는 명이다. 갑술년에 즉위하여 44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