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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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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기본정보

백제 제31대 왕
생몰년: ? -660
재위기간: 641-660

일반정보

백제 제31대 왕으로 백제패망의 군주이다. 아버지는 무왕(武王)으로, 641년에 즉위하여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까지 다스렸다. 초기에는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왕실측근을 제거하는 등 왕권강화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함락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년에 사치와 방종에 빠져, 어진 신하를 살해하는 등 폭정을 하였고, 빈번한 전쟁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재위 20년(660년)에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에 압송되어 가서 거기서 병사하였다.

전문정보

백제 제31대 왕으로 무왕의 맏아들이다. 641년 무왕이 돌아가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삼국유사』기이2 무왕조에 무왕의 부인이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라고 나오기 때문에 의자왕의 어머니를 선화공주(善花公主)로 보기도 한다.(신채호, 1948)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에는 의자왕의 아들로서 태자 효(孝)와 왕자 융(隆), 태(泰), 연(演) 등의 이름이 전해지는데(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 『구당서』권199상 백제국전에서는 왕자 융(隆)을 태자로 보고 있어(虜義慈及太子隆,小王孝,演),(前百濟太子司稼正卿扶餘隆) 차이가 난다.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에서도 융을 태자라고 하고 있다(其王扶餘義慈及太子隆自外王餘孝一十三人)

의자왕의 출생년도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국 낙양의 북망(北邙)에서 출토된 「부여융묘지명(夫餘隆墓誌銘)」에 의하면 의자왕의 적장자로 볼 수 있는 부여융이 615년에 태어나서 68세인 682년에 사망(春秋六十有八薨于私第……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卄四日癸酉葬于北芒淸善里)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의자왕이 만약에 열 다섯 살에 부여융을 낳았다고 한다면 의자왕은 6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의자왕이 태자에 책봉된 것은 632년으로서 그의 나이 40세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책봉시기가 대단히 늦었다는 것은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데, 아마 그의 어머니가 신라왕녀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도학, 2004)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용감하며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고(雄勇有膽決)”,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하여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로까지 칭송되었다(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효를 바탕으로 한 인내심과 노련한 처신이 그를 결국 왕위에 즉위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융묘지명(夫餘隆墓誌銘)에서도 “과단성 있고, 침착하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홀로 높았다(果斷沈深聲芳獨?)”고 기록되어 있다.(이도학, 2004) 의자왕은 아들의 이름을 효(孝)로 지을 정도로 효도의 덕을 강조하였는데,(이기백, 1996) 이러한 유교정치사상의 강조는 자제를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키는 등 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아버지인 무왕의 영향이 컸으리라 생각된다(노중국, 1988)

의자왕은 성왕32년(554) 관산성(管山城: 충청북도 옥천군) 패전 후 진행되었던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즉위 초에 정치적 변혁을 단행하였다.『일본서기』황극기(皇極紀) 원년(元年, 642) 2월조에 의하면 “금년 정월에 임금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생의 아들 교기(翹岐)를 비롯하여 누이의 딸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유명한 인사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今年正月, 國主母薨, 又弟王子兒翹岐及其母妹女子四人內佐平岐味有高名之人四十餘 被放於島)”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병도, 1959)

그리고 국내를 순무하고 사형수 이외의 죄수를 방면하는 등 민심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지금까지 고구려와 중국에 대해 취해온 양면적인 외교노선을 수정하여 친고구려정책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변경은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집권한 뒤, 대중국 강경노선정책을 추진한 것과 깊이 관련된 것 같다. 재위 2년(642) 2월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신라 서쪽의 40여성을 함락시켰다.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어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항복한 김춘추의 사위인 성주 품석(品釋)과 그 처자를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왕도에 전하는 등 신라를 큰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신라에 대하여 강경책을 구사한 것은 그가 신라왕녀인 선화공주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4)

그러나 의자왕은 말년에 이르러 사치와 방종으로 궁중내부의 갈등과 부패를 초래하게 되고, 마침내 백제정국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궁중 내에서 왕이 총애하는 군대부인(君大夫人)이 권력을 장악하고 나아가 정치에 관여하여 어진 신하들을 제거함에 따라 지배층 내부에 알력이 발생하고, 지배질서는 붕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자왕이 만년에 사치와 방종으로 빠진 이유에 대하여 정치적 긴장의 완화로 인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즉 의자왕이 왕실측근의 정치세력을 제거하였다는 『일본서기』황극기(皇極紀) 원년(元年, 642)의 기사를 재위 15년(655)에 발생한 일로 파악하고, 계모가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정변을 단행하여 대대적인 숙청에 나선 것으로 본 것이다. 의자왕은 정적을 제거한 후 귀족세력의 견제에서 벗어나 권력독주가 가능해지자, 정치적 긴장에서 해방되었고, 이것이 음황과 궁중부패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도학, 2004)

신라에 대한 빈번한 전쟁은 승리에 못지않게 국력을 피폐시키고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였다. 또한 친고구려정책으로의 전환은 당나라의 불만을 가져와 한반도에서 고립에 빠진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을 하게하는 원인이 되었다. 의자왕 20년(660)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공격을 개시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거느린 당군은 바다를 건너 백강(白江: 금강)으로 쳐들어오고,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신라군은 탄현(炭峴: 충북 옥천군 소재 식장산)을 넘어 황산(黃山: 충남 연산)에서 계백(階伯)의 5000결사대를 물리치고 육박해왔다. 사세가 다급해지자 왕은 사비성(泗泌城: 부여)을 버리고 태자와 함께 웅진성(熊津城: 공주)으로 피했다가 사비성이 함락되자 마침내 당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백제는 개국한 지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왕은 태자 효, 왕자 융 및 대좌평 사택천복(沙宅千福) 등 대신(大臣)·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000여명과 더불어 당나라로 압송되어 갔는데,『구당서』권199상 백제국전에 의하면 의자왕은 낙양에 이른지 수일 만에 병사하였고, 패망한 군주들인 오(吳)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손호(孫皓)와 진(陳)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곁에 묻혔다고 한다.(及至京, 數日而卒, 贈金紫光祿大夫, 尉尉卿, 特許其舊臣赴哭, 送就孫皓, 陳叔寶墓側葬之,幷??碑)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의자왕대 백제의 멸망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의자왕은 처음에 해동(海東)의 증자(曾子)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져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고 하였다. 왕 4년(659)에서 5년(660)에 걸치는 시기에는 각종 괴변이 생겼으며, 외적을 탄현(炭峴)과 기벌포(伎伐浦)에서 막아야 한다는 성충(成忠)과 흥수(興首) 등의 간언이 무시되어 신라의 당의 연합군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마침내 멸망하였고 의자왕은 왕족, 백성들과 함께 당의 수도로 끌려갔다고 하였다.

충청남도와 부여군에서는 1995년부터 중국 낙양의 북망산 일대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백제 역사찾기” 사업의 하나로 2007년 9월에 사적 14호인 부여 능산리고분군에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가묘(假墓)및 제단과 부여융묘지석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신채호, 1948,『朝鮮上古史』,종로서원.
이병도, 1959,『韓國史』古代篇, 乙酉文化社.
노중국, 1988,『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김주성, 1988,「義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과 百濟滅亡」 『百濟硏究』19
이기백, 1996,『韓國古代政治史硏究』, 일조각.
이기동, 1996,『백제사연구』, 일조각.
양종국, 2004,『백제멸망의 진실』, 주류성.
이도학, 2004,『백제의 인물』, 주류성.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왕력)
第三十一 義慈王 [武王子 辛丑立 治二十年 庚申國除 自溫祚癸卯至庚申 六百七十八年]
제31 의자왕 [무왕의 아들이다. 신축년에 즉위하여 20년간 다스렸다. 경신년에 나라가 없어졌다. 온조왕 계묘년에서 경신년에 이르기까지 678년간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 名春秋 姓金氏 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 ?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 妃文明皇后文姬 卽庾信公之季妹也 初文姬之?寶姬 夢登西岳捨溺 ?滿京城 旦與妹說夢 文姬聞之謂曰 我買此夢 ?曰 與何物乎 曰 ?錦裙可乎 ?曰 諾 妹開襟受之 ?曰 疇昔之夢 <傳>付於汝 妹以錦裙酬之 後旬日 庾信與春秋公 正月午忌日[見上射琴匣事 乃崔致遠之說] 蹴鞠于庾信宅前[羅人謂蹴鞠爲弄珠之?] 故踏春秋之裙 裂其襟紐曰 請入吾家縫之 公從之 庾信命阿海奉針 海曰 豈以細事輕近貴公子<乎> 因辭[古本云 因病不進] 乃命阿之 公知庾信之意 遂幸之 自後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之曰 爾不告父母 而有娠何也 乃宣言於國中 欲焚其妹 一日俟善德王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何烟 左右奏曰 殆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無夫有娠 王曰 是誰所爲 時公?侍在前 顔色<大>變 王曰 是汝所爲也 速往救之 公受命馳馬 傳宣沮之 自後現行婚禮 眞德王薨 以永徽五年甲寅卽位 御國八年 龍朔元年辛酉崩 壽五十九歲 葬於哀公寺東 有碑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太子法敏 角干仁問 角干文王 角干老且 角干智鏡 角干愷元等 皆文姬之所出也 當時買夢之徵 現於此矣 庶子曰 皆知文級干 車得令公 馬得阿干 幷女五人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饍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城中市價 布一疋租三十碩或五十碩 民謂之聖代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時百濟<末>王義慈乃<武>王之元子也 雄猛有膽氣 事親以孝 友于兄弟 時號海東曾子 以貞觀十五年辛丑卽位 耽?酒色 政荒國危 佐平[百濟爵名]成忠 極諫不聽 囚於獄中 瘦困濱死 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嘗觀時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審擇其地 處上流而迎敵 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炭峴[一云 沈峴 百濟要害之地] 水軍不使入伎伐浦[卽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 據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 <顯>慶四年己未 百濟烏會寺[亦云 烏合寺] 有大赤馬 晝夜六時 ?寺行道 二月 衆狐入義慈宮中 一白狐坐佐平書案上 四月 太子宮雌?與小雀交婚 五月 泗[扶餘江名]岸大魚出死 長三丈 人食之者皆死 九月 宮中槐樹鳴如人哭 夜鬼哭宮南路上 五年庚申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邊小魚出死 百姓食之不盡 泗水血色 四月 蝦?數萬集於樹上 王都市人無故驚走 如有捕捉 驚死者百餘 亡失財物者無數 六月 王興寺僧皆見 如舡揖隨大水入寺門 有大犬如野鹿 自西至泗岸 向王宮吠之 俄不知所之 城中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而散 有一鬼入宮中 大呼曰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 百濟圓月輪 新羅如新月 問之巫者 云 圓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新月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圓月輪盛也 如新月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寢微乎 王喜 太宗聞百濟國中多怪變 五年庚申 遣使仁問請兵唐 高宗詔左<武>衛大將軍荊國公蘇定方 爲神丘道行策摠管 率左衛將軍劉伯英字仁遠 左<武>衛將軍馮士貴 左驍衛將軍龐孝公等 統十三萬兵來征[鄕記云 軍十二萬二千七百十一人 舡一千九百隻 而唐史不詳言之] 以新羅王春秋 爲?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定方引兵 自城山濟海 至國西德勿島 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義慈王聞之 會群臣問戰守之計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不習水 羅人恃大國之援 有輕敵之心 若見唐人失利 必疑懼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可也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羅人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師老 先使偏師擊羅 折其銳氣 然後伺其便而合戰 則可得全軍而保國矣 王猶預不知所從 時佐平興首 得罪流竄于古馬?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何 首曰 大槪如佐平成忠之說 大臣等不信曰 興首在??之中 怨君而不愛國矣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卽伎伐浦]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竝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如在籠之? 罹網之魚也 王曰 然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偕伯 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然兵寡力盡 竟敗而偕伯死之 進軍合兵 薄津口 瀕江屯兵 忽有鳥廻翔於定方營上 使人卜之曰 必傷元帥 定方懼 欲引兵而止 庾信謂定方曰 豈可以飛鳥之怪 違天時也 應天順人 伐至不仁 何不祥之有 乃拔神劍擬其鳥 割裂而墜於座前 於是定方出左涯 垂山而陣 與之戰 百濟軍大敗 王師乘潮 軸?含尾 鼓?而進 定方將步騎 直趨都城一舍止 城中悉軍拒之 又敗死者萬餘 唐人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隆[或作孝 誤也]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之子文思謂王泰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率左右?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起堞 立唐旗幟 泰窘迫 乃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隆王子泰 大臣貞福與諸城皆降 定方以王義慈及太子隆王子泰 王子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 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其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至是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擢>渠長爲都督刺史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見 上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 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七年 壬戌 命定方爲遼東道行軍大摠官 俄改平壤道 破高麗之衆於浿江 奪馬邑山爲營 遂圍平壤城 會大雪 解圍還 拜?州安集大使 以定吐蕃 乾封二年卒 唐帝悼之 贈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 諡曰莊[已上唐史文] 新羅別記云 文<武>王卽位五年乙丑秋八月庚子 王親統大兵 幸熊津城 會假王扶餘隆 作壇 刑白馬而盟 先祀天神及山川之靈 然後?血爲文而盟曰 往者百濟先王 迷於逆順 不<敦>隣好 不睦親姻 結托句麗 交通倭國 共爲殘暴 侵削新羅 破邑屠城 略無寧歲 天子憫一物之失所 憐百姓之被毒 頻命行人 諭其和好 負險恃遠 悔慢天經 皇赫斯怒 恭行弔伐 旌旗所指 一戎大定 固可?宮汚宅 作誡來裔 塞源拔本 垂訓後昆 懷柔伐叛 先王之令典 興亡繼絶 往哲之通規 事<必>師古 傳諸?冊 故立前百濟王司(稼)正卿扶餘隆爲熊津都督 守其祭祀 保其桑梓 依倚新羅 長爲與國 各除宿憾 結好和親 恭承詔命 永爲藩服 仍遣使人右威衛將軍魯城縣公劉仁願 親臨勸諭 具宣成旨 約之以婚姻 申之以盟誓 刑牲?血 共敦終始 分災恤患 恩若兄弟 祗奉綸言 不敢墜失 旣盟之後共保歲寒 若有乖背 二三其德 興兵動衆 侵犯邊? 神明鑒之 百殃是降 子孫不育 社稷無宗 ?祀磨滅 罔有遺餘 故作金書鐵契 藏之宗廟 子孫萬代 無或敢犯 神之聽之 是享是福 ?訖 埋弊帛於壇之壬地 藏盟文於大廟 盟文乃帶方都督劉仁軌作 [按上唐史之文 定方以義慈王及太子隆等送京師 今云 會扶餘王隆 則知唐帝宥隆而遣之 立爲熊津都督也 故盟文明言 以此爲驗] 又古記云 總章元年戊辰 [若總章戊辰 則李勣之事 而下文蘇定方 誤矣 若定方則年號當龍朔二年壬戌 來圍平壤之時也] 國人之所請唐兵 屯于平壤郊 而通書曰 急輪軍資 王會群臣問曰 入於敵國 至唐兵屯所 其勢危矣 所請王師粮? 而不輪其料 亦不宜也 如何 庾信奏曰 臣等能輸其軍資 請大王無慮 於是庾信仁問等 率數萬人 入句麗境 輸料二萬斛 乃還 王大喜 又欲興師會唐兵 庾信先遣然起兵川等<二>人 問其會期 唐帥蘇定方 紙畵鸞犢二物廻之 國人未解其意 使問於元曉法師 解之曰 速還其兵 謂畵犢畵鸞二切也 於是庾信廻軍 欲渡浿江<令><曰>後渡者斬之 軍士爭先半渡 句麗兵來掠 殺其未渡者 翌日信返追句麗兵 捕殺數萬級 百濟古記云 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 知其未免 相謂曰 寧自盡 不死於他人手 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태종춘추공
제29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이고 성은 김씨이다. 용수[또는 용춘라고도 한다]각간 추봉 문흥대왕(文興大王)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왕비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로, 곧 유신공의 막내 누이이다.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寶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흘러서 서울에 가득 찼다. 아침에 아우에게 꿈 이야기를 했는데 문희가 듣고 말하기를 “내가 그 꿈을 사겠습니다.”라고 했다. 언니가 말하기를 “무엇을 주겠느냐?”라고 하니, 문희가 말하기를 “비단치마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여, 언니가 “좋다.”고 하였다. 동생이 옷깃을 벌려 받았는데, 언니가 말하기를 “어젯밤 꿈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니 동생은 비단치마로 값을 치렀다. 후에 10일이 지나 유신이 춘추공과 더불어 정월 오기일(午忌日)[위의 사금갑(射琴匣)조에 보이는데, 최치원(崔致遠)의 설이다]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다가[신라 사람들이 말하는 축국은 공을 가지고 노는 것을 이른다] 고의로 춘추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떼어버리고 말하기를 “청컨대 우리 집에 들어가서 꿰맵시다”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유신이 아해(阿海)에게 명하여 꿰매드리라고 하니, 아해가 말하기를 “어찌 작은 일로써 귀공자를 가벼이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사양하였다.[고본(古本)에는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아지(阿之)에게 명하였더니 공이 유신의 뜻을 알고 드디어 관계하였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이 그의 누이가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어 말하길 “네가 부모님께 고하지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하고, 이에 온 나라 안에 말을 퍼뜨리고 누이를 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하는 것을 기다려, 뜰 가운데 땔감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자 연기가 일어났다.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가 아뢰기를 “아마도 유신이 그의 누이를 태우는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의 누이가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누구의 짓인가?”라고 하였는데, 마침 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이 한 일이니 가서 구하시오”라고 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여 이를 막고, 그 후 드러내어 혼례를 행했다. 진덕왕이 세상을 떠나자 영휘(永徽) 5년 갑인(654)에 왕위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59세였다. 애공사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를 세웠다. 왕은 유신과 더불어 지모와 힘을 합해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사직(社稷)에 큰 공을 세웠으므로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고 하였다.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 인문(仁問), 각간 문왕(文王), 각간 노차(老且), 각간 지경(智鏡), 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니, 당시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서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 거득(車得) 영공(令公) 마득(馬得) 아간과 딸을 합하여 모두 5명이다. 왕의 식사는 하루에 쌀 3말과 꿩 9마리였는데, 경신년(660) 백제를 멸망시킨 후로는 점심은 하지 않고 다만 조석만 들 뿐이었다. 그러나 하루를 계산해보면 쌀 6말, 술 6말, 꿩 10마리였다. 성 중 시장의 값은 베 한 필에 조(租) 30석 혹은 50석이었다.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했다. 동궁에 있을 때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청하러 당나라에 들어갔더니, 당나라 황제가 그 풍채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는, 굳이 머물러두고 시위(侍衛)하게 했으나, 힘써 청하여 이에 돌아왔다. 이때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義慈)는 무왕(武王)의 맏아들로서 용감하고 담력이 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정관(貞觀) 15년 신축(641)에 왕위에 오르자 주색에 빠져 정사가 문란해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었다. 좌평(佐平)[백제의 관작 이름] 성충(成忠)이 극력으로 간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니, 몸이 여위고 지쳐 거의 죽게 되었다. 글을 써서 아뢰기를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으니 원컨대 한 말씀 드리고 죽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시세의 변화를 살펴보니 반드시 전쟁이 있겠습니다. 무릇 군사를 씀에는 그 지세를 잘 가려야 할 것이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니 백제의 요해처이다]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곧 장암(長?)이니 또는 손량(孫梁), 혹은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 한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하여 막은 연후에 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살피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기미(659)에 백제의 오회사(烏會寺)[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한다]에 크고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하루 종일 절을 돌아다녔다. 2월에는 여우떼가 의자의 궁중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올라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부여의 강 이름] 언덕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3장이었으며 그 고기를 먹은 사람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의 괴수(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우는 것과 같았고, 밤에는 귀신이 대궐 남쪽 길 위에서 울었다. (현경) 5년 경신(庚申, 660) 봄 2월에는 서울의 우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변에 작은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다 먹을 수가 없었으며, 사비수가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서울의 저자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마치 무엇이 잡으러 오는 것처럼 놀라 엎어져서 죽은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사람은 다 셀 수 없었다. 6월 왕흥사 승려들이 모두 배가 큰 물결을 따라 절문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광경을 보았고, 들사슴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수 언덕까지 와서 왕궁을 향해 짖더니 별안간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성중의 여러 개들이 길 위에 모여 혹은 짖고 혹은 울다가 잠시 후에 흩어졌다. 한 귀신이 궁중에 들어가 크게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하고는 즉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이를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 3자 가량 되는 곳에서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거북의 등에는 글이 쓰여 있기를, “백제는 둥근달이요.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을 무당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둥근달이란 꽉 찬 것이니, 차면 이지러지는 법이며, 초승달이란 차지 않은 것이니, 차지 않으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둥근달은 융성한 것이고 초승달은 미약한 것이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융성하고 신라는 미약해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태종은 백제국에 괴변이 많다는 것을 듣고 5년 경신(庚申, 660)에 김인문(金仁問)을 당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고종(唐高宗)은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형국공(荊國公)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총관(神丘道行軍摠管)을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이며 자(字)가 인원(仁遠)인 유백영(劉伯英)과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병으로써 와서 (백제를) 치게 하였다[향기(鄕記)에는 군졸이 122,711인이며 배가 1,900척이라 하였으나, 당사(唐史)에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에 이르니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시켜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싸우게 하였다.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군신(群臣)을 모아놓고 싸워서 막아낼 계책을 물으니 좌평(佐平) 의직(義直)이 아뢰기를, “당나라 군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지만 물에는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군사는 대국(大國)의 원조만 믿고 적을 가벼이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당나라 사람의 불리함을 보면 반드시 겁을 내 감히 날카롭게 달려들지 못할 것이므로 먼저 당나라 사람과 결전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하였다. 그러나 달솔(達率) 상영(常永)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멀리 왔으므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니, 그 예봉(銳鋒)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며 신라 군사는 우리에게 여러 번 패전했으므로 지금 우리의 군세(軍勢)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당나라 군사의 길을 막아서 그 군사가 피로해질 때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한 부대로써 신라군을 쳐서 그 예기(銳氣)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접전하면, 군사는 온전히 살리고 나라를 보전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은 주저하여 누구의 말을 따를지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가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 귀양가 있었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 묻기를, “사세가 위급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흥수가 말하기를,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고 하였다. 대신들이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가 옥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군사가 백강[즉 기벌포]에 들어와 강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배 두척이 나란히 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에 올라와 지름길을 밟되,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함이 좋을 것이니, 이때 군사를 놓아 적군을 치면 마치 조롱 속의 닭과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럴 것이다.”고 하였다. 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죽기를 각오한 5천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가서 신라군사와 싸우게 하였다. 4번 접전하여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전하여 계백은 전사하였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 전진하여 나루 어구에 닥쳐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키자, 문득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서 빙빙 돌아다니므로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반드시 원수가 부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유신이 정방에게 말하기를 “어찌 내가 새의 요괴스러운 일을 가지고 천시를 어기겠소. 하늘의 뜻에 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지극히 불인한 자를 치는데 무엇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라고 하고, 곧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가) 찢어져서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정방이 백강의 왼쪽 가에 나아가 산을 등지고 진을 쳐서 함께 싸우니 백제군은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를 이용하여 병선이 꼬리를 물고 서로 연이어 북을 치며 전진하였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서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성 중에서 전군이 이를 막았으나, 또 패전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성에 들이닥치니, 의자왕은 최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고 하였다. 마침내 태자 융[또는 효라고도 하나 잘못이다.]과 함께 북쪽 변읍으로 달아나니, 소정방은 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 태에게 말하기를, “왕이 태자와 함께 달아났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들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측근자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가니, 백성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나 태는 막을 수 없었다. 정방은 군사들을 시켜 성첩을 넘어 당나라 깃발을 세우니, 태는 매우 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청하였다. 이에 왕,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이 여러 성들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은 왕 의자,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이때 와서 (당은 이곳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나눠두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과 자사를 삼아 이곳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또 좌위낭장 왕문도로 웅진도독을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황제를 찾아뵈니, 황제는 그들을 꾸짖고 죄를 용서하였다. 의자왕은 (그곳에서) 병들어 죽으니,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을 증직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조상함을 허용하고, 손호,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게 하고 함께 비를 세워주었다. 7년 임술(壬戌, 662)에 (당나라 황제는) 소정방을 임명하여 요동도 행군총관을 삼았다가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개칭하여,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 진영으로 정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때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돌아가 (소정방을) 양주 안집대사로 임명하여 토번을 평정하였다. (소정방이) 건봉 2년(667)에 죽으니, 당나라 황제가 애도하여 좌효기대장군 유주도독을 증직하고 시호를 장(莊)이라고 하였다.[이상은 당사(唐史)의 글이다.] 신라별기에서 말하길, “문무왕 즉위 5년 을축(665) 가을 8월 경자에 왕이 친히 대병을 거느리고 웅진성에 갔다. 가왕 부여융을 만나 단을 만들고 흰말을 잡아서 맹세할 때,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뒤에 삽혈하고 글을 지어 맹세하기를, ‘지난번에 백제의 先王이 역리와 순리에 어두워, 이웃과의 우호를 두텁게 하지 않고, 인친과 화목하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폭한 행동을 하여, 신라를 침해하여 성읍을 파괴하고 무찔러 죽임으로써 조금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천자는 사물 하나라도 제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독 입는 것을 불쌍히 여기어 자주 사신을 보내어 화호하기를 달랬다. (그러나 백제는) 지리의 험함과 거리가 먼 것을 믿고 하늘의 법칙을 업신여기므로 황제가 이에 크게 노하여 죄를 묻는 정벌을 삼가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마다 한번 경계하여 크게 평정하였다. 진실로 그 궁택을 웅덩이로 만들어 자손을 경계하고 근원을 막고 뿌리를 빼어 후인에게 교훈을 보일 것이나, 복종하는 자를 품고 반란자를 정벌함은 선왕의 명령과 법이고, 망한 것을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을 잇게 함은 전대 현인의 통해온 법이며, 일은 반드시 옛것을 본받아야 함은 모든 옛 서적에 전해온다. 그리하여 전 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 고향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우방이 되어 각각 묵은 감정을 풀고 우호를 맺어 화친할 것이며, 삼가 조명을 받들어 길이 속방이 되라. 이에 사자 우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을 보내어 친히 임하여 권유하고 달래어 내 뜻을 갖추어 선포하니, (그대들은) 혼인을 약속하고 맹서를 아뢰며 희생을 잡아 삽혈을 하고 함께 시종을 두터이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환란을 구원하여 형제와 같이 은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삼가 조칙을 받들어 감히 잃지 말고, 이미 맹서한 후에는 함께 변하지 않는 지조를 지켜야 할 것이다. 만일 여기에 위배하여 그 덕이 변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서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신명이 이를 살펴 많은 재앙을 내리어 자손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사직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제사도 끊어져 남김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를 지어 종묘에 간직해두니 자손들은 만 대토록 혹 어기거나 범하지 말라. 신이여 이를 듣고 흠향하고 복을 주소서’라고 하였다. 삽혈이 끝난 후 폐백을 제단 북쪽에 묻고 맹서한 글을 대묘에 간직하니, 이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가 지은 것이다.”[위 당사의 글을 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서울에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부여왕 융을 만났다고 하니 당 황제가 융의 죄를 용서하고 놓아 보내어 웅진도독을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세문에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증거가 된다] 또 고기에 이르기를, “총장 원년 무진(668)[총장 무진이면 이적의 사실이니, 아래 글에 소정방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만일 정방의 일이라면 연호는 용삭 2년 임술(662)에 해당하니 평양에 와서 포위 했을 때의 일이다]에 국인이 청한 당의 원병이 평양 교외에 와서 진을 치고 (신라에) 서신을 보내어, 급히 군사물자를 보내달라고 하였다. 왕이 군신을 모아놓고 묻기를, ‘적국에 들어가서 당군의 진영에 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당군이 군량을 청했는데 그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것도 또한 마땅치 못한 일이니 어찌하면 좋으냐?’고 하였다. 유신이 아뢰어 말하길, ‘신 등이 능히 그 군수물자를 수송할 것이니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유신?인문 등이 군사 수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 2만 곡을 가져다주고 돌아오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 당군과 연합하려고 유신이 먼저 연기?병천 등 두 사람을 보내어 그 만날 시기를 물으니 당장 소정방이 종이에 난새와 송아지 두 동물을 그려서 보내었다. 국인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원효법사에게 물으니 법사가 해석하여 말하기를, ‘속히 군사를 돌이키라 하는 것이다. 송아지와 난새를 그린 것은 두 반절을 이른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을 건너려 할 때 명령을 내려, ‘뒤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벤다’고 하였다. 군사가 서로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병이 쫓아와서 미쳐 건너지 못한 자를 죽였다. 이튿날 유신은 고구려병을 반격하여 수만 명을 잡아죽였다.” 백제고기에는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가 아래로 강물에 닿아있는데, 전해오는 말로는 의자왕과 모든 후궁이 함께 (화를) 면하지 못할 줄 알고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자살할지라도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와서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하여 세상에서는 타사암이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속설이 잘못된 것이다. 다만 궁인이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도,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백히 적혀 있다. 또 신라고전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의 경계에 당교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당사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 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지 혹은 향전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662)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 신라인이 정방의 군사를 죽였다고 하면, 후일 총장 무진(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662)에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가) 신하가 되지 않고, 마음대로 고구려의 땅을 소유한 일은 있으나,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