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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유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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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2대 왕
생몰년: ?∼18
재위기간: 기원전 19-기원 후 18

일반정보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해(解)씨이고, 이름은 유리(類利), 누리(累利) 또는 유류(孺留)라고 한다. 동명왕 주몽(朱蒙)의 맏아들로서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왕비 송씨가 죽은 후 계실(繼室)로서 치희(雉姬)와 화희(禾姬)가 있었다. 아들로는 첫째인 도절(都切)과 둘째인 해명(解明), 넷째인 여진(如津)이 있었으나 모두 죽었고, 왕이 사망 후에 무휼(無恤)이 뒤를 이었다. 그 밖에 후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인 무휼(無恤)의 뒤를 이어 민중왕(閔中王)에 오른 해색주(解色朱)와 태조왕(太祖王)의 아버지로 전하는 재사(再思)가 있었다.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양맥(梁貊)을 정벌하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서기 18년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사망했으며 두곡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전문정보

고구려 제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기원전 19년∼기원 후 18년이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왕력편에 의하면 이름은 누리(累利) 또는 유류(孺留)라고 하고, 『삼국사기』에는 유리(類利) 또는 유류(儒留)라고 한다. 『위서』권100 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들을 유리왕 이전의 실전(失傳)한 왕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 유리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주몽이 졸본부여로 피신할 때 부인인 예씨(禮氏)는 임신 중이었다. 동명왕 19년(기원전 19) 4월에 아버지를 찾아 부여에서 고구려로 와서 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유리왕2년(기원전 18) 7월에 다물후(多勿侯) 송양(松壤)의 딸을 비(妃)로 삼았다. 다음 해 10월에 왕비가 죽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1 대무신왕 즉위년조에는 대무신왕은 유리왕 33년(기원전 14)에 나이 11세로 태자에 책립되었고, 그의 어머니는 다물국왕(多勿國王) 송양(松壤)의 딸이라고 하여 기사의 정확성에 의문을 주고 있다.

왕비가 죽은 후 유리왕은 다시 두 여자를 취(聚)하여 계실(繼室)을 삼았는데, 골천인(?川人)의 딸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 치희(雉姬)였다. 두 여자가 사랑싸움으로 불화하던 중 화희(禾姬)가 치희(雉姬)에게 한인(漢人)으로서 무례하다고 꾸짖자, 치희(雉姬)가 이를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도망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갔으나 치희(雉姬)가 화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다가 황조(黃鳥: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낀 바 있어, “펄펄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라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1에는 유리왕에게 모두 6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먼저 태자인 도절(都切)이 있었으나 유리왕 20년에 죽었고, 뒤를 이어 왕자 해명(解明)이 유리왕 23년에 태자에 책립되었는데, 이 해 국내(國內)로 천도할 때 원래의 수도인 졸본(卒本)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힘이 세고 용감하다는 소문을 들은 이웃의 황룡국(黃龍國) 왕이 강한 활을 보내자, 고구려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활을 꺾어 황룡국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인접국인 해룡왕(黃龍王)과 원(怨)을 맺었다 하여 유리왕이 자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유리왕 33년에 셋째 아들인 무휼(無恤)이 태자에 책립되어 후에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되었다. 그 밖에 유리왕 37년에 물에 빠져 죽은 넷째 왕자 여진(如津)이 있었고, 대무신왕(大武神王) 다음에 왕위에 오른 민중왕(閔中王)인 해색주(解色朱)와, 유리왕의 아들이자 태조왕(太祖王)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재사(再思)가 있었다.

유리왕은 재위 21년째인 서기 3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재위 31년(12)에는 한(漢)을 찬탈하고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 군사를 징발하려 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한(漢)나라를 공격하였다. 왕망(王莽)은 엄우(嚴尤)에게 명하여 고구려 장수인 연비(然丕)를 참수했다고 하는데, 『한서』왕망전(王莽傳)에는 고구려왕 추(鄒)를 참수했다고 하여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하여 당시 한나라 측에 잘못 전해진 기사거나 과장된 기록으로 보거나(이병도, 1996) 고구려 사회에서는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영웅들을 일반적으로 “추(鄒)”나 “주몽(朱蒙)”이라고 불렀던 데서 비롯된 중국측의 오인(誤認)이라고 보는 것이(김현숙, 1994) 대체적인 시각이다.

왕망은 그 후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는데 이는 고구려의 반발을 사서 고구려는 한나라에 대해 침략을 가속화하였다. 재위 32년(13)에 부여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 재위 33년(14)에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사망했으며 두곡 동원(東原)에 장사지냈고, 시호를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였고, 유리왕의 왕위계승도 부자상속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 되어 있다. 때문에 주몽과 유리왕 사이에는 혈연관계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池內宏, 1951)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태조왕 때에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지』권30오한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 실린 “본래는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점차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였다(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해씨에서 고씨로의 왕실교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증거로써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일반적인 비문의 형식과는 달리 시조인 주몽 이외에도 유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과 유리의 남행할 때의 모습이 비슷하며,『동명왕편』에는 주몽과 유리왕이 모두 주술적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들을 들어 유리왕은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김용선, 1980) 그렇기 때문에 유리왕 이후의 왕들은 유리왕에 대한 시조의식이 있었으나, 왕권이 약화되고 계루부의 태조왕이 즉위하여 주몽에 대한 시조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유리설화는 주몽설화의 부속적인 종결부로만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이종태, 1990)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병도, 1996, 『譯註三國史記』, 을유문화사.
김용선, 1980, 「高句麗琉璃王考」『歷史學報』87.
이종태, 1990, 「高句麗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成立」『北岳史論』2.
김현숙,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16.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 琉璃王 [一作累利 又孺留 東明子 立壬寅 理三十六年 姓解氏] 癸亥 [移都國內城 亦云不而城]
제2 유리왕 [또는 누리, 유류라고도 한다. 동명의 아들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여 36년간 다스렸다. 성은 해씨이다. 계해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불이성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