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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국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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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6대 왕
생몰년: 47-165
재위기간: 53-165

일반정보

고구려 제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53년∼146년이다.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왕(太祖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여사람이다. 아들은 막근(莫勤)과 막덕(莫德)이 있었으나, 태조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대왕(次大王)에 의해서 막덕은 살해되고, 막근은 자살하였다. 재위 4년(56)에 동옥저를 정복하고, 16년(68)에는 갈사국(曷思國), 20년(72)에는 조나(藻那), 22년(72)년에는 주나(朱那)를 병합하는 등, 압록강 중류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주변 소국들을 모두 고구려의 지배체제 하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재위 70년(122)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고, 재위 24년(146)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전문정보

고구려 제6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53년∼146년이다.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왕(太祖王) 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로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부여사람이다. 아들은 막근(莫勤)과 막덕(莫德)이 있었으나, 태조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대왕(次大王)에 의해서 막덕은 살해되고, 막근은 자살하였다. 태조왕, 국조왕 등 시조적 의미가 있는 시호를 붙인 것은 즉위과정에서 정상적인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혁명적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거나, 중국과의 빈번한 충돌하는 과정에서 그 활약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에 의해 붙여졌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즉위년조에 의하면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 알았고 어려서부터 출중하였다. 모본왕 6년(53)에 모본왕이 살해되고, 태자가 불초하였기 때문에 여러 관리들이 재사(再思)를 왕으로 추대했으나, 재사(再思)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7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그의 성씨가 고씨(高氏)라는 것과 태조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 유리왕의 손자로 나타나는 왕계상의 무리 등은 태조왕과 그 전대 사이에 왕통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주된 근거가 되었다.

고구려에서 왕실교대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 기록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 교대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일찍이 주몽설화를 근거로 주몽왕 대에 왕실교대가 있었음을 인정한 견해가 있었는데(이병도, 1959) 이에 대하여 왕실교대는 태조왕 대에 이루어졌다고 보고, (김용선, 1980) 태조왕 이후의 왕들은 그 이전의 해씨왕계의 왕들과는 달리 졸본부여족의 방계에서 등장하여 새롭게 고씨라고 칭하였다고 하였다.(김철준, 1959) 또한 제2대 유리왕부터 제5대 민중왕까지 기록되어 있는 해씨와 고씨의 차이 및 태조라는 왕호에서 풍기는 시조적 성격에서 출발하여 민중왕과 태조왕과의 단절을 인정하고 태조왕계에 의하여 주몽에 대한 시조의식이 성립하였다고 보았다.(이종태, 1990)

그러나 초기 5왕은 해씨, 태조왕계는 고씨로 파악하지만, 주몽이후는 모두 계루부왕계로 보아 왕실 교대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다.(김현숙, 1994) 또한 태조왕계는 해씨족 내에서 보다 좁은 범위의 계보 친족으로서 계루부 내의 방계로 인식하고, 해씨와 고씨계의 변화를 친족집단의 분화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모본왕까지의 초기왕계와 그 이후의 왕계가 결합하여 추모왕을 시조로 하는 새로운 왕계로 정리된 시점을 소수림왕대로 추정하기도 한다.(노태돈, 1999) 한편 고구려 왕호의 성격을 통해 왕호성립의 배경과 단계성을 검토한 후, 국조왕(國祖王) 등 초기 3왕의 왕호 및 국양왕(國壤王) 이하의 장지명(葬地名) 왕호(王號)가 먼저 성립하고, 뒤에 초기 5왕의 왕호가 추가 정리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임기환, 2004)

태조왕은 재위 4년(56)에 동옥저를 정복해 성읍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16년(68)에는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였다. 20년(72)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고, 22년(74)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압록강 중류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주변 소국들을 모두 고구려의 지배체제 하에 편입시켰다.

태조왕은 재위 46년(98)에 책성(柵城)의 순수, 50년(102)의 책성 안무(安撫), 62년(114)의 남해(南海)지방 순행 등을 통해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다.(김영하, 2002) 이후 압록강 중류유역을 중심으로 전고구려족 사회는 통합력을 바탕으로 대외정복전쟁을 강력히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김현숙, 1994)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後漢)에 대해서 때로는 사절을 파견해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해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재위 69년(121) 1월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지만, 오히려 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해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예맥과 함께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94년(146)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왕은 재위기간동안 후한의 압력차단과 서방진출기도를 통해 고구려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위의 나집단(那集團)을 복속시키고, 이것을 오부체제(五部體制)로 재편하는 동시에 패자(沛者), 우태(于台), 조의(?衣) 등의 관료체제를 정비하였다. 태조왕 이후에는 비류부(沸流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의 4부 명칭만 보여 적어도 태조왕 22년경에는 5부체제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된다.(노태돈, 1999)

태조왕은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도모하자, 재위 94년(146)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차대왕 20년(165) 나이 119세로 죽었다. 『삼국유사』왕력편에서는 이 때 신대왕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있다. 그런데 태조왕이 죽은 해에 대해서 『삼국사기』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조와 『삼국유사』왕력편에서는 모두 165년이라고 한 반면에, 『후한서』권85 동이열전 고구려조에는 건광(建光) 원년(元年)인 121년 “이해 궁이 죽고 아들인 수성이 즉위하였다(是歲宮死 子遂成立)”라고 되어 있고, 『자치통감』권50 연광(延光) 원년 7월조에도 “(122년) 고구려 왕 수성이 한나라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현도에 가 투항했다(高句麗王遂成還漢生口 詣玄?降)”라고 되어 있어, 만약 『후한서』와 『資治通鑑』등의 기사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고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왕의 업적이 아닌 것이 되므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이병도, 1959, 『한국사』고대편, 을유문화사.
김철준, 1976,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정조묘, 1979, 「高句麗王系小考」『朝鮮歷史論集』上. 旗田巍先生古稀紀念會編.
김용선, 1980, 「高句麗琉璃王考」『歷史學報』87.
이종태, 1990, 「高句麗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成立」『北岳史論』2.
김현숙. 1994, 「高句麗의 解氏王과 高氏王」『大丘史學』16.
이기백, 1996, 『韓國古代政治史硏究』11, 일조각.
노태돈, 1999,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김영하, 2002, 『한국고대사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학교민족문화연구원.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관련원문 및 해석

第六 國祖王 [名宮 亦云太祖王 癸丑立 理九十三年 後漢傳云 初生開目能視 後遜位于母弟次大王]
제6 국조왕 [이름은 궁으로 태조왕이라고도 한다. 계축년에 즉위하여 93년간 다스렸다. 후한전에서는 처음 태어나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후에 동복동생인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