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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산상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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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10대 왕
생몰년: ?-227
재위기간: 197-227

일반정보

고구려 제1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97년∼227년이다.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며 신대왕의 아들이고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고국천왕의 비인 우씨(于氏)의 지원을 받아 형인 발기(發岐)를 대신하여 왕위에 올랐다. 산상왕은 이로 인해 그의 형수인 우씨(于氏)를 왕비로 삼았다.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발기(發岐 또는 拔奇)의 모반을 물리치고, 환도성(丸都城)을 쌓아 천도했다. 재위31년(227) 5월에 죽은 후 산상릉(山上陵)에 장사지냈다.

전문정보

고구려 제10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97년∼227년이다. 이름은 연우(延優) 또는 이이모(伊夷模)이며 신대왕의 아들이고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백고(伯固)가 죽은 후에 장자인 발기(發岐)가 불초하여 국인(國人)이 소자(小子)인 이이모(伊夷模)를 왕으로 추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권16 고구려본기4 산상왕 즉위년조에는 신대왕 백고(伯固)에 이어 그 아들인 고국천왕 남무(男武)가 즉위하였으며, 고국천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그 동생들인 발기(發岐)와 연우(延優)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있었는데, 고국천왕의 비인 우씨(于氏)의 지원을 받은 연우(延優)가 승리하여 왕이 되었다고 한다. 산상왕은 이로 인해 그의 형수인 우씨(于氏)를 왕비로 삼았는데, 이것은 그때까지 고구려 사회에 널리 행해져 오던 취수혼의 구체적인 예로써,(노태돈, 1989) 고구려 사회에 왕위의 부자상속을 부정하려는 요소 즉 형제상속의 경향이 아직도 잠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이기백,1996)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부(消奴部) 세력과 함께 모반하였다. 이렇듯 발기를 도와 고구려의 분열을 조장하는 등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공손씨(公孫氏)와의 긴장 관계가 재위 기간 동안 계속되어, 공손씨(公孫氏)의 영역인 현도군을 공격하기도 하고, 평주(平州) 사람인 하요(夏瑤)가 이끄는 1,000여 호를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산상왕은 아들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주통촌(酒桶村)의 여자를 소후(小后)로 삼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교체(郊?)라 했다. 교체는 산상왕 17년(213)에 태자로 책봉되고 31년(227) 5월에 산상왕이 죽은 후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한 후에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동천왕(東川王)이다. 동천왕 이후에 계속 부자에 의해 왕위가 상속되어 가므로 고구려는 산상왕대부터 부자상속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본다.(이기백, 1996)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처음부터 기본적으로 직계상속제를 원칙으로 하였다는 주장도 있어 신중을 요한다.(김광수, 1986)

산상왕은 재위 2년(198) 환도성(丸都城)을 쌓고 13년(209)에 이곳으로 천도했다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고구려의 집안(集安) 천도를 유리왕대가 아닌 산상왕대로 보기도 한다. 또한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의 “이이모가 새로 나라를 세웠다(伊夷模更作新國)”에 근거하여 고구려 초기에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다는 『삼국지』의 기사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고, 왕실교체문제와 관련하여 실제 왕위가 다른 부족으로 넘어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파악하였다.(白鳥庫吉,1914) 池內宏도 고구려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고,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는 산상왕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이전의 고구려의 왕계는 모두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池內宏, 1951)

고구려 왕계가 조작되었다는 설에 동의하고, 중국측 사서와 고구려 본기의 왕계를 비교하여 왕계의 성립의 단계화를 시도한 견해도 있다. 그리하여 최초의 왕계인 환도· 국내 왕계에서 사실상의 시조는 산상왕으로, 이후 광개토왕대까지 왕계가 이어지고, 2단계로 주몽을 시조로 하는 초기의 전설 왕계가 4세기 말에 완성되었으며, 3단계로서 『삼국지』동이전 고구려조에 근거하여 환도, 국내왕계의 두 왕이 더해지고, 4단계로서 6세기 이후 『후한서』권85 동이열전 고구려조에 의하여 태조왕 왕계가 부가되어 현전하는 고구려 왕계가 성립되었다고 추정하였다.(武田幸南,1989)

하지만 외국사료와 국내자료를 비교 검토하는 경우, 외국자료에 입각하여 국내자료를 불신하거나 취사선택하는 것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질적인 전승기사를 취합하여 일원적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생길수도 있고, 연대 등의 면에서 착오가 생길 수도 있지만 역사적인 사실의 기본 내용마저도 완전히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국내외의 사료 가운데서 차이점이 발견될 때는 당연히 불완전하고 부분적이며 단절적인 전승에 의거하여 기록한 외국사료 보다는, 계승적이며 전체적으로 기록된 국내 사료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노태돈,1999)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史學雜誌』25-4.
三品彰英, 1954, 「高句麗の五族について」『朝鮮學報』6.
김철준,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지식산업사.
김광수, 1986, 「高句麗 初期의 王位繼承 問題」『韓國史硏究』55.
노태돈, 1999, 『高句麗史硏究』, 사계절.
이기백, 1996, 『韓國古代政治史硏究』,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 山上王
제10 산상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