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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동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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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11대 왕
생몰년: 209-227
재위기간: 197-227

일반정보

고구려 제11대 왕으로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는 이름이 우위거(憂位居)라고 하는데, 소명(小名)은 교체(郊?)이다.『삼국지』에는 위궁(位宮)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산상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 소비(小妃)이다. 위(魏)의 침략을 받아 관구검(?丘儉)에게 환도성을 함락당하기도 하였다. 재위 22년(248)에 죽어, 장지를 시원(柴原)이라 하였다.

전문정보

고구려 제11대 왕으로 227년부터 248년까지 재위하였다.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하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관노부(灌奴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 소비(小妃)이다. 아들로는 후에 중천왕이 된 연불(然弗)과 예물(預勿), 사구(奢句) 등이 있다. 『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즉위년조에는 이름이 우위거(憂位居)이고, 소명(小名)은 교체(郊?)라고 하였다.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위궁(位宮)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궁(位宮)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본 것이 태조왕 궁(宮)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이것은 왕실세계에 있어서 전대의 왕들과 혈연적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태조왕을 동천왕 당시에 혈연적으로 중요시하여 태조왕의 이름으로써 동천왕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조인성, 1991) 동천왕은 산상왕 17년인 21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죽은 후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의 전반기에는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와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재위 12년(238)에는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공손씨 세력 멸망 이후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됨에 따라 위와도 긴장관계로 바뀌었다. 16년(242) 위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선제 공격하였지만, 위(魏)의 반격을 불러와서 관구검(?丘儉)에게 환도성을 함락당하고, 동천왕은 남옥저를 거쳐 북옥저 지역으로 피신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장군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활약으로 국토를 회복했지만, 이후 40년동안 고구려의 요동공략은 소강상태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관구검은 이곳에 자신의 군공(軍功)을 돌에 새겨놓았다고 하는데, 1906년 이 군공비(軍功碑)의 일부가 집안현(集安縣) 판차령(板?嶺)에서 발견됨으로써 환도성의 위치가 현재의 길림성 집안현의 환도산성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동천왕은 이 전쟁으로 인해 환도성이 파괴되자 재위 21년(247) 평양 동황성(平壤東黃城)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재위 22년(248)에 왕이 죽자 왕의 은덕을 사모해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는데 이를 순장의 유습으로 보기도 한다.(정운용, 2007) 백성들이 나무[柴]로 죽은 사람들을 덮어 주어 장지를 시원(柴原)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池內宏, 1951, 『滿鮮史硏究』(上世篇), 吉川弘文館.
和田淸, 1955, 「魏の東方經略と扶餘城の問題」『東亞史硏究 滿洲篇』, 東洋文庫.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조인성, 1991, 「4·5世紀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韓國古代史硏究』4.
정운용, 2007, 「문헌을 통해 본 1~3세기 고구려의 묘제와 장제」『고대 동아시아 세계론 과 고구려의 정체성』, 동북아역사재단.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一 東川王
제11 동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