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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미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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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15대 왕.
생몰년 : ?-331
재위기간 : 300-331

일반정보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우불(?弗)이며 아버지는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이다. 봉상왕의 폭정으로 인해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등 한군현을 한반도 지역에서 몰아냈으며 현도군(玄?郡)과 서안평(西安平)을 정벌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미천왕을 호양(好壤)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을불(乙弗) 또는 우불(?弗)이라 하였다.『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즉위년조에는 호양왕(好壤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을불(乙弗) 혹은 우불(憂弗)이고 고추가(古鄒加) 돌고(?固)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미천왕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특히 주력하였다. 먼저 왕 3년(302) 9월에 현도군(玄?郡)을 침략하여 8천명을 잡았으며, 12년(311) 8월에는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14년(313) 10월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침략하고, 15년(314) 9월에는 대방군(帶方郡)을 침략하였으며, 16년(315) 2월에는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20년(319) 12월에는 진(晉)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으며, 21년(320) 12월에는 요동을 침략하였다.

미천왕의 업적 중에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멸한 후, 그 고지(故地)를 어떻게 지배했는지가 문제가 된다. 먼저 낙랑·대방 지역은 4세기 이상 중국계 군현이 존속했던 곳으로 재지(在地) 한인세력(漢人勢力)이 강인하게 남아서 반독립적인 정치세력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고구려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파악한다.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의 피장자로 생각되는 동수(冬壽, 289-357)는 전연(前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로서, 이후에도 동진(東晋)의 연호와 관직 등을 독자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있는, 5세기 초에 만들어진 덕흥리 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의 경우는 안악 3호분과 차이점이 있다. 이 지역은 낙랑?대방군의 위치와 가까운 곳인데, 덕흥리 벽화고분의 피장자인 중국계 망명인 진(鎭)은 고구려의 행정적인 지배를 어느 정도 받았던 인물로 생각된다. 그는 국소대형(國小大兄)의 관등을 받은 것으로 보아 순수한 중국식 관직을 받은 동수에 비해 독자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4세기에는 낙랑·대방 지역에 대해 행정력을 거세시킨 상태로 방임 내지는 간접지배하였으나 5세기가 되면 행정력을 수반하는 직접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공석구, 1998)

낙랑과 대방 지역을 지배하는데 고구려가 막부제(幕府制)를 받아들였을 가능성을 상정하기도 한다. 안악 3호분의 예를 들어 4세기에는 이 지역의 토착 호족 세력을 누르기 위해 안악 3호분의 피장자로 생각되는 동수와 같은 중국계 망명인을 대표자로 세웠다고 하였다. 낙랑?대방 지역은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기 때문에 고구려 중앙 정권은 기존의 군현 지배 체제를 해체하기보다는, 그 형식적 외연을 그대로 두면서 통치력을 서서히 강화해 가는 정책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 정치적·문화적 충격을 줄이기 위해 중국계 망명인을 등용하였는데 그 한 예가 동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5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평양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즉 광개토왕대에는 평양이 천도의 후보지로서 부(副)수도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덕흥리 벽화고분의 피장자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 332-408)이 고구려 왕권 아래에서 낙랑·대방 지역의 호족 세력을 통솔했다고 하였다. 진의 휘하에는 다수의 군태수(郡太守)직과 중리도독(中裏都督), 장사(長史) 등의 막부 관료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이 지역 토착 세력이나 중국인 망명객을 편제 통솔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막부 조직은 중앙 관료 조직과 별도로 고구려 왕권의 친위적 기반으로서 전제적 왕권의 성립에 하나의 정치적 기반이 되었으며, 평양 천도 이후에는 낙랑·대방 지역 세력이 고구려 관인 사회에 직접 편입되어 국내계 귀족 세력과 함께 정치 세력의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임기환, 2004)

한편, 덕흥리 벽화고분의 피장자인 진이 국소대형(國小大兄)의 관등을 지녔던 것을 통해 낙랑군의 중심지였던 평양 지역에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외형상 군과 같은 종류의 광역 지방 지배 단위가 구획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의 직임은 수사의 그것에 해당하였는데, 그가 이 지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국가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군(郡)과 수사(守事)라는 명칭은 6세기 후반 이후의 사서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수사라는 지방관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군의 명칭도 사용하지 않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이 만들어진 광개토왕대에는 고구려의 낙랑·대방 지역에 대한 지배가 강화되고 있었던 만큼, 늦어도 5세기 초에는 군제(郡制)가 시행되었다고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덕흥리 벽화고분에 있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의 묘지문(墓誌文)을 근거로 하여 평양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둔 사전작업이 광개토왕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구려는 평양을 비롯한 남부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나라 동쪽과 남쪽에 여러 개의 성을 동시에 구축하여 방어 체계 수립과 안정적인 지역 지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였다. 4세기 중반까지는 주요 거점 지역에만 태수, 재(宰)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였는데, 4세기 중후반경이 되면 국가 영역의 확대로 지방 통치 체제의 재편이 불가피해졌다. 즉 소수림왕대에는 재가 지배하는 지역 몇 개를 포괄하는 비교적 넓은 범위를 태수가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지방관이 관할 지역 주민을 개별적으로 파악하여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점적인 지배에서 면적인 지배로, 거점 지배에서 권역(圈域)지배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광개토왕대에는 영토의 급속한 확대로 태수의 관할권을 넘어서는 영역을 담당할 수사(守事)가 설치되었는데, 대동강 유역, 압록강 유역, 두만강 유역, 북부여 지역 등으로 권역을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김현숙, 2005)

미천왕 시기 고구려와 선비족 모용씨의 관계를 요동지역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충돌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미천왕대에 고구려와 모용씨의 관계는 처음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강하였다가 319년 고구려?우문부·단부 연합군의 모용씨 공격이 실패로 끝나면서 이후 모용씨의 세력이 우세해졌다고 하였다. 반(反) 모용씨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드러내던 고구려는 342년 모용씨 전연(前燕)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게 되고, 이후 실리적인 관점에서 전연간의 평화를 모색했다고 하였다. 당시 전연은 황제국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였으므로 고구려를 책봉국으로 삼고, 대신 요동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지배를 인정하였다. 즉 전연은 명분을 고구려는 실리를 택했다고 하였다.(강선, 2001)

미천왕은 재위 31년(331)만에 죽었으며, 아들 사유(斯由)가 뒤를 이어 고구려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이 되었다.『삼국사기』권17 고구려본기5 미천왕 32년조(331)에는 봄 2월에 왕이 죽어 미천(美川)의 들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공석구, 1998,『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서경문화사.
노태돈, 1999,『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강선, 2001,「고구려와 전연(前燕)의 관계에 대한 고찰」『고구려연구』11.
임기환, 2004,『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김현숙, 2005,『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 모시는 사람들.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五 美川王 [一云 好攘 名乙弗 又?弗 庚申立 理三十一年]
제15 미천왕 [혹은 호양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을불 또는 우불이다. 경신년에 즉위하여 31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