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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국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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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원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16대 왕.
생몰년 : ?-371
재위기간 : 331-371

일반정보

이름은 쇠(釗) 또는 사유(斯由)이며 아버지는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이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의 침입을 당해 도읍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등 국난을 당했으며 백제와의 평양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이름을 쇠(釗) 혹은 사유(斯由)라고 하였으며, 강상왕(岡上王)이라고도 하였고 아버지는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이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즉위년조에는 국강상왕(國?上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사유(斯由) 혹은 쇠(釗)라 하였다. 미천왕 15년(314)에 태자가 되었으며 32년(331)에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41년조(371)에 따르면 10월에 평양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가 화살을 맞아 10월 23일에 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冬十月 百濟王率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고 하였다.

고국원왕의 장지에 관해서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황해남도(黃海南道) 안악군(安岳郡) 오국리(五局里)에 있는 안악 3호분(安岳三號墳)이 고국원왕의 능으로 주장되기도 하였다. 즉 동수설(冬壽說), 미천왕설(美川王說), 고국원왕설(故國原王說)로 나뉘어지는데 묵서명(墨書銘)의 존재로 인해 묘주가 동수라는 주장은 북한에서 일찍부터 있어 왔다.(전주농, 1959) 그러나 이후 묘주가 고국원왕이고 동수는 배장자(配葬子)라는 견해가 제시되었고(리여성, 1955), 미천왕이 묘주란 설도 제기되었다.(박윤원, 1963)

그러다가 안악 3호분의 묘주가 동수라는 주장이 다시 나왔는데 그 근거로 ①동수에 대한 묵서명이 있는데 이것이 곧 동수의 묘지명이며, ②동수는 태수를 칭하고 있는데 묘주를 시종하는 인물들의 직명이 태수급의 속관명(屬官名)이라는 점 ③무덤의 구조가 고구려의 묘제인 적석총이 아닌 석곽묘를 비롯한 북중국의 묘제와 유사한 점 ④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복식이 고구려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김용준, 1958)

이에 다시 왕릉설이 나왔는데 그 근거로 ①묘실의 구조형식이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가장 복잡 웅대하여, 이것은 왕릉이 아니면 만들 수 없으며, ②회랑 벽화의 대행렬도에 보이는 깃발에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확실히 보여 곧 왕을 가리키는 것이며, ③서측실의 묘주도에서 묘주가 착용한 의복과 관은 고구려왕이 쓰는 것이었으며, ④묘주도에서 묘주를 시립하고 있는 인물들이 홀(笏)을 들고 있는데 홀의 성질로 미루어 왕의 신하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왕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였다.(전주농, 1959)

이후 서측실 입구 오른쪽 장하독(帳下督) 그림 위에 묵서가 확인되면서 왕릉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기왕에 알려진 묵서도 묘주의 묘지명이 아닌, 서측실 입구 왼쪽 장하독에 관한 기록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며, 나아가 묘주는 동수와 별개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북한에서는 미천왕릉설이 나왔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미천왕릉은 원래 국내성에 있었으나 고국원왕 12년(342) 전연의 침입을 받아 그 유해를 빼앗겼다가 이듬해 2월에 반환되었고 고구려는 7월에 평양동황성(平壤東黃城)으로 천도한다. 이에 고국원왕은 부왕을 재장(再葬)할 곳을 평양 이남에서 찾았고, 이에 안악 지방에 능을 축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미천왕 유해의 반환, 미천왕릉의 구축 문제 등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를 기려 왕실에서 묵서명을 써 주었다고 하였다.(주영헌, 1963) 이후 미천왕릉설은 1970년대까지 북한 학계의 통설이 되었으나 90년대에 와서 고국원왕설이 다시 나왔다. 즉 ①묵서의 주인공인 동수는 미천왕 사후에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로 미천왕과는 관련이 없으며, ②미천왕의 유해를 다시 찾아왔을 때는 아직 평양동황성으로 천도하기 전이므로 미천왕릉도 국내성이나 환도성 부근에 있었을 것이며, ③고국원왕 말기의 수도는 평양동황성인데 그가 죽은 곳은 황해도 신원군(新原郡) 하성(下星)으로 비정되는 남평양(南平壤)으로서 고국원왕릉은 국내성이나 환도성 부근에 조영되지 않았다. 이 때 고국원이란 지명이 문제가 되지만, 삼국시대에는 충주를 국원(國原)이라 했기 때문에 안악지방이 고구려 시대에는 고국원으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박진욱, 1990)

한국에서는 먼저 안악 3호분이 동수의 묘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고국원왕릉설과 미천왕릉설에 대한 비판이 시도되었다. 즉 동수가 고국원왕보다 먼저(357년) 죽었으므로 고국원왕릉에 동수에 관한 묵서가 있을 수 없고, 미천왕의 시신을 전연에서 찾아온 것이 343년인데 안악 3호분이 축조된 것은 동수가 죽은 357년이기 때문에 미천왕릉일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김원룡, 1960 ;김원룡, 1987) 이후 한국에서는 대체로 동수묘설이 타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이후 안악 3호분에 있는 문자 자료들을 치밀하게 분석한 견해도 나왔는데 ① 동수 묵서명은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발견된 당시 묘지명들과 비교해 볼 때, 문장의 체제나 형식 등이 유사하므로 묘주의 묘지명으로 볼 수 있고, ② 장하독은 문헌에 태수의 속관으로 나오는 바, 태수급인 동수와 장하독이 동일 인물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장하독이 있음으로 해서 묘주는 태수급이 될 수 있다 ③ 영화란 연호는 12년으로 끝나며 이듬해 정월 승평(升平)으로 개원하는데, 왕릉이라면 개원한 지 10개월이 지나도록 영화 13년으로 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우며, ④ 미천왕을 전후한 시기의 고구려 왕릉은 국도였던 국내성 부근에 있었는데 미천왕릉만이 안악에 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⑤ 묵서명에 열거된 관직이나 관등명은 당시 고구려의 것이 아니고 동진(東晋)에서 수여한 것도 아닌 동수가 자칭했다는 이유를 들었다.(공석구, 1998) 이후 북한을 제외한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동수묘설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한편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輯安=국내성)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고국원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즉 ①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서 가장 가까이 소재한 태왕릉은 능비에 적혀 있는 ‘국강상(國?上)’이 분명한데 그러한 태왕릉의 소재지는 국강상왕(國?上王)으로도 불렸던 고국원왕의 그것과 부합하며, ② 태왕릉은 외적 규모에 비해 관대(棺臺)가 작은데 이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고국원왕의 유해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③ 태왕릉의 고분 양식인 계단식 석실 적석총은 고국원왕의 재위 기간과 연결된다는 것이다.(이도학, 2005)

국원왕을『삼국사기』에서는 고국원왕이라고 하였다. 소수림왕 혹은 고국양왕대까지의 고구려 왕호를『삼국사기』의 본문계 왕호와 분주계 왕호로 분류하여 각각의 계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광개토왕대 이후에는 일부 왕호의 경우에는 그 계통성이 이어지지만, 전체적으로는 본문 왕호와 분주 왕호에 별도의 계통성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고국양왕까지 계통성을 달리하는 왕호의 존재와 광개토왕 이후 왕호의 또다른 양상은 고구려왕의 계보를 정리하는 사서(史書)의 계통성과도 깊이 관련된다고 하였다. 즉 7세기 초 영양왕대에 『신집(新集)』을 편찬하면서 이제까지의 분주 왕호를 본문 왕호로 바꾸었는데 이는 왕권을 재강화하려는 노력에서 나타난 결과로서, 고구려 자신의 정통성과 자존의식을 고양하려는 역사의식이 뒷받침된 것이라고 하였다.(임기환, 2002)

고국원왕은 재위 40년(371)만에 죽었으며, 아들 구부(丘夫)가 뒤를 이어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小獸林王)이 되었다.

참고문헌

리여성, 1955,「대동강반 한식 유적유물과 ‘락랑군치’설에 대하여」『력사과학』1955-5.
김용준, 1958,『고구려고분벽화연구』, 과학원출판사.
전주농, 1959,「안악 하무덤(3호분)에 대하여」『문화유산』1959-5.
김원룡, 1960,「高句麗 古墳壁畵의 起源에 대한 硏究」『震檀學報』21
박윤원, 1963,「안악 제3호분은 고구려 미천왕릉이다」『고고민속』1963-2.
주영헌, 1963,「안악 제3호무덤의 피장자에 대하여」『고고민속』1963-2.
김원룡, 1987,『韓國美術史硏究』, 일지사.
박진욱, 1990,「안악 3호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0-2.
공석구, 1998,『高句麗 領域擴張史 硏究』, 서경문화사.
임기환, 2002,「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韓國古代史硏究』28.
이도학, 2005,「太王陵과 將軍塚의 被葬者 問題 再論」『高句麗硏究』19.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六 國原王 [名釗 又斯由 或云岡上(王) 辛卯立 理四十年 (甲午)增築平壤城 壬寅八月移都安市城 卽(丸)都(城)]
제16 국원왕 [이름은 쇠 또는 사유로 혹은 강상왕이라고도 한다. 신묘년에 즉위하여 40년간 다스렸다. 갑오년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임인년 8월에 도읍을 안시성으로 옮기니, 즉 환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