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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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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19대 왕.
생몰년 : 375-413
재위기간 : 391-413.

일반정보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아버지는 제18대 국양왕이다. 재위기간 동안 거란, 후연, 동부여, 백제 등을 정벌하고 영토를 크게 넓혔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이름을 담덕(談德)이라 하였으며 아버지는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이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즉위년조(391)에서는 이름이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 3년(386)에 태자가 되었고, 8년(391)에 왕이 죽자 즉위했다고 하였다.

광개토왕은 왕 2년(393)에서 4년(395)에 걸쳐 백제를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9년(399)에서 15년(405)까지는 주로 후연(後燕)과 싸우며 요동 지역을 확보하였다. 광개토왕의 영토 확장에 대해서는「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왕릉비」에서는 특히 신묘년조(391)의 기사가 문제가 된다. 즉 다른 기년기사가 연호로 편년되어 있는 데 비해 간지기년법을 취하고 있으며, 광개토왕의 즉위년임에도 영락 5년조(395)보다 뒤에 위치하고 있다. 해당 조문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이라는 문장인데 구래의 해석에 의하면, “백잔, 신라는 원래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 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 □□,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자(缺字) 부분에 대해서는 임나(任那) 또는 가라(加羅)의 국명으로 추정한 이래(那珂通世, 1893), 이 해에 왜(일본)는 백잔(백제)·임나(혹은 가라)·신라에 미치는 광대한 지역에 출병해서 이들 국가를 고구려와의 종속관계로부터 타파하고 새로이 왜에 신속시켰다는 의미로서 파악하였다.(末松保和, 1949)

이러한 의견에 대해 새로운 해석이 나왔는데, 해당 문장을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으로 끊어 읽은 것이었다. 여기서는 ‘渡海破’의 주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破’의 객체를 왜로 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즉 백잔과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이었는데, 백잔이 왜와 상통했기 때문에 신라는 불리한 정세가 되었고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광개토왕이 영락 6년(396)에 수군을 이끌고 출진했다는 것이다.(정인보, 1955) 이후 결자 부분에 ‘招倭侵’ 혹은 ‘聯侵新’을 보입하고,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 왔기 때문에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격파했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침략하고 신라를 백제의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은 왜가 신묘년에 와서 또 바다를 건넜다는 점에 대한 의문, 고구려가 자국의 속민인 백제·신라를 침략한 왜를 토벌하지 않은 점에 대한 의문 등에서 나온 것으로 문장 논리 전개상의 문제와 역사적 상황론에 입각한 해석이었다.(박시형, 1966)

그리고 일본육군참모본부에서 만주에 간첩 사카와(酒勾景信)를 보내 비문을 변조했음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비문 변조를 은폐하기 위해 석회를 바르고 그 후 석회를 바를 때 잘못 새긴 곳에 가공을 가했다고 했다.(이진희, 1972) 그 후 변조설에서 주장한 신묘년조의 ‘來渡海破’ 중에서 ‘破’를 ‘故’로 읽으면 합리적인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조선총독부 소장 탁본에는 ‘破’가 ‘故’로 보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결자 부분에서 ‘將侵’ 혹은 ‘欲取’를 보입하고, “백제가 끌어들인 왜가 신묘년 이래 바다를 건너 백제에 왔기 때문에, 왜와 연계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하였다”라고 해석했다.(천관우, 1979)
신묘년조의 앞문장 ‘由來朝貢’의 ‘來’를 ‘未’로 판독하고, 이에 따라 신묘년조의 ‘來渡海破’를 ‘來侵湯破’로 풀이하여, “백제와 신라는 옛날 우리 고구려의 속민이었음에도 조공을 하지 않고, 왜는 신묘년부터 내침하였다. 그래서 왕은 백제와 □□를 휩쓸어 격파하고 신라를 □□하여 신민을 삼았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서 ‘未’의 판독은 조선총독부 탁본에 나오는 ‘來’와 ‘未’의 실측을 통해서 자형상 ‘未’에 가깝다고 본 데 따른 것이다.(김영만, 1980)

이후 ‘왜(倭)’자 위작설도 나왔는데 이에 의하면 신묘년조의 ‘倭’는 ‘後’의 위작이며, 비문변조설에서 제기한 ‘來渡海破’의 ‘來渡海’를 ‘不貢因’으로 파악하고 ‘破’의 주체를 광개토왕, 그리고 결자 부분을 ‘倭寇’로 보입했다. 이러한 위작설의 근거는 미야케(三宅米吉)가 사카와본을 정정해서 작성한 해석문에서 사카와본의 제4면 9행의 마지막 글자인 ‘後’가 없어지고 대신 ‘之’로 바뀐 점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제4면의 마지막 ‘後’는 원래 있었던 다른 한 글자를 쌍구가묵(雙句加墨)하고 나서 실수로 잔류시킨 것으로 보았는데, 원래 있었던 다른 한 글자는 신묘년조의 위작된 ‘倭’라고 하였다.(이형구·박노희, 1986)

원문에 대해서는 ‘倭以辛卯年來渡海’를 ‘신묘년으로부터 이래 바다를 건너와서’ 라는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 즉 고전의 용례를 들어 ‘以’를 “~부터”, ‘來’를 동사가 아니라 시간의 경과를 표시하는 조사로서의 “이래”로 볼 수 있으며, ‘破’의 주체는 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신묘년조는 문맥 전개에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신라와의 속민-조공 관계가 중단되는 계기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舊是屬民’과 은 상호 대응하는 문구이고, 인과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舊是屬民’ 에서 ‘以爲臣民’ 의 상태로 변화시킨 주체는 신묘년 이래 도해해 온 왜로 비정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하였다. 또한 결자 2자에 대해서는,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하다”, “백잔, □□, 신라를 파하다”라는 의견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나, 고구려의 ‘舊是屬民’ 이 백잔과 신라이기 때문에, ‘舊是屬民’ 에 대응하는 ‘以爲臣民’ 은 백잔·신라 이외의 제3국명이 들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전자인,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하다” 라는 쪽이 타당하다고 하였다.(연민수, 1998)

광개토왕은 재위 21년(413)만에 죽었는데 왕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으며, 아들 신련(臣連)이 뒤를 이어 고구려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이 되었다.『삼국사기』권18 광개토왕 22년조(412)에는 겨울 10월에 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광개토왕의 능에 대해서는「광개토왕릉비」의 광개토왕 호칭과 관련지어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어 왔다.(방기동, 1988; 손수호, 2001;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집안시박물관, 2004; 조법종, 2004 ; 김창호, 2006) 그러나 태왕이 광개토왕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님을 주장하며, 태왕릉의 관대(棺臺)가 능의 외적 규모에 비해 작음 등을 들어 이를 부정하고 입지 조건이나 5세기 초기로 편년되는 와당이 출토된 장군총(將軍塚)을 광개토왕릉으로 보기도 한다.(이도학, 2005) 그 외에 태왕릉의 연도(羨道)가 광개토왕릉비의 전면 방향과 다르지만, 장군총의 연도는 능비에서 정확히 동북쪽에 있음을 들어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한다.(백승옥, 2006)

참고문헌

那珂通世, 1893,「高句麗石碑考」『史學雜誌』47.48.49.
末松保和, 1949,『任那興亡史』,大八洲書店.
정인보, 1955,「廣開土境平安好王陵碑文釋略」『庸齋白樂濬博士還甲紀念論叢』
박시형, 1966,『광개토왕릉비』, 사회과학원출판사.
이진희, 1972,『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천관우, 1979,「廣開土王陵碑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김영만, 1980,「廣開土王陵碑의 新硏究(I)」『新羅加耶硏究』11.
이형구·박노희, 1986,『廣開土王陵碑新硏究』, 동화출판공사.
방기동, 1988,「千秋墓, 太王陵, 將軍塚」『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 讀賣新聞社.
연민수, 1998,『고대한일관계사』, 혜안.
손수호, 2001,『고구려고분연구』, 사회과학출판사.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집안시박물관, 2004,『集安高句麗王陵-1990~2003년 集安高句麗王陵 調査報告』
조법종, 2004,「중국 집안박물관 호태왕명문 방울」『韓國古代史硏究』33.
이도학, 2005,「太王陵과 將軍塚의 被葬者 問題 再論」『高句麗硏究』19.
김창호, 2006,「고구려 太王陵 출토 연화문숫막새의 제작 시기」『白山學報』76.
백승옥, 2006,「광개토왕릉비의 성격과 장군총의 주인공」『韓國古代史硏究』41.

관련원문 및 해석

第十九 廣開(土)王 [名談德 壬辰立 治二十一年]
제19 광개토왕 [이름은 담덕이다. 임진년에 즉위하여 21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