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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영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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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26대 왕.
생몰년 : ?-618
재위기간 : 590-618

일반정보

『삼국사기』에서는 영양왕을 평양왕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은 원(元) 혹은 대원(大元)이라고 하였다. 영양왕 9년(598)에 요서(遼西)를 공격하였으며, 같은 왕 23년(612)부터 25년(614)에 걸쳐 수(隋)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쳤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평양왕(平陽王)이라고도 하였으며 이름을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고구려 제25대 평원왕이다.『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즉위년조에서는 평양왕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고 평원왕의 맏아들이라고 하였다. 평원왕 7년(565)에 태자가 되었으며 평원왕 32년(590)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589년 수(隋)가 진(陳)을 멸하고 남북조(南北朝)를 통일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하게 되었다. 대륙을 통일한 수는 그 국세를 동쪽의 고구려로 뻗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이 주목되면서 양국간의 관계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영양왕 9년(598) 고구려의 요서 공격은 고구려와 수(隋)의 첫 번째 충돌로 주목된다. 6세기 말 수가 중국을 통일하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적대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영양왕 9년 고구려의 요서 공격은 그 결과였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와 수의 관계가 적대적인 상태만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즉 전쟁이 벌어졌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양국의 조공책봉 관계는 지속되었으며 고구려는 수와의 타협의 여지를 두려고 노력하였다. 고구려는 수의 반격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반격한 수의 입장을 헤아려 철군의 명분을 주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세력권에 대한 수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서 수와의 관계가 적대적으로 바뀌는 것 역시 바라지 않았다. 이러한 여러 조건을 고려하여 고구려의 요서 공격은 국지전의 성격을 띠었으며, 수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써 고구려는 수의 침공군을 철군시키고 고구려의 세력권을 인정받았다. 그 결과 고구려는 7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세계의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성제, 2005)

한편 고구려가 598년 수를 선제 공격할 때 영주(지금의 요녕성 조양)를 택한 것은 요서 지역의 주도권 장악이라는 상징적 의미 외에 위축된 교역망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던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수는 대운하를 완성하여 강남과 화북을 잇는 유통망을 구축한 다음 이를 주변 제국과의 대외교역망과 연결시키고자 하였으며, 토욕혼(吐谷渾), 돌궐(突厥)과의 상쟁도 그러한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하였다. 수는 이를 동북방에도 적용하여 요서 지역을 장악하고 영주도독부(營州總管府)를 설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이 지역에 이미 대외 교역의 거점을 마련하고 말갈(靺鞨), 실위(室韋), 남조(南朝)에 걸쳐 광역의 교역망을 운영하고 있던 고구려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598년 고구려와 수의 충돌은 영주를 중심을 벌어졌다고 하였다. 즉 이 전쟁은 동북아와 남조까지 포괄하는 고구려 중심의 교역망을 장악하려는 수와 이를 유지하려는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경제 패권 쟁탈전의 성격도 띠고 있다고 하였다.(김창석, 2006)

영양왕은 재위 28년(618)만에 죽었는데 동생 건세(建歲)가 즉위하여 고구려 제27대 영류왕(榮留王)이 되었다.『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8 영양왕 29년조(618)에는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이성제, 2005,『高句麗의 西方政策 硏究』, 국학자료원.
김창석, 2006,「고구려·수 전쟁의 배경과 전개 -경제적 요인을 중심으로-」『동북아역사논 총』15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六 ?<陽>王 [一云平<陽> 名元 一云大元 庚戌立 治<二>十八年]
제26 영양왕 [또는 평양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원으로 또는 대원이라고도 한다. 경술년에 즉위하여 28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