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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영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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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27대 왕.
생몰년 : ?-642
재위기간 : 618-642

일반정보

『삼국사기』에서는 영류왕의 이름을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 하였으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하였다.『삼국유사』왕력에서는 영류왕의 이름을 건세(建歲)라고 하였다. 왕 14년(631)부터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재위 25년(642) 10월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죽임을 당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왕력에서는 이름을 건세(建歲)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즉위년조에서는 이름을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고 하였으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하였다.

영류왕은 왕 2년(619)에서 6년에 걸쳐 거의 매년 사신을 당에 파견하여 조공했으며, 23년(640)에는 세자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4년(631)에는 당의 장손사(長孫師)가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경관(京觀)을 허무는 등 점차 당과의 긴장 관계가 시작되어 그 해 2월부터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의 천리장성은『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14년 2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천리장성은 보장왕 5년(646)에 완성되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이미 당은 보장왕 3년(644)부터 고구려 침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영류왕 25년(642)에 연개소문이 축성의 감독을 맡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보장왕 초에 완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신형식, 1997)

천리장성이 축조된 목적에 대해서는 그것이 고구려의 외적방어선의 목적으로 설치된 방어성이라기보다는, 요하를 따라 경제적인 이유로 건설된 교통로를 지켜주는 보호시설이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원래 농안(農安) 일대에서 요하(遼河)를 따라 영구(營口)까지 하변로(河邊路)가 있었는데, 이것은 요하를 따라 북방의 곡식과 남방 해안의 어염을 교환하는데 필요한 통로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를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서 성곽이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교통망이 결국 중국세력 침략저지의 방어선이 되기 때문에, 점차 그 의미가 군사적인 면이 강화되어 갔다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연개소문에 의해서 완성된 천리장성은 기존의 하변로를 수비했던 기존의 성곽시설을 보강하여 전시체제로 전환시킨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즉, 요하를 따라 요충지에 석성(石城)을 쌓고 기존의 하변로를 치마로(馳馬路)로 확장시켜 보급로로서 전시에 대비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신형식, 1997)

천리장성에 대해서는 그 시발점과 종착점의 확인이 문제가 된다. 이에 대해서 초기의 천리장성은 심양(瀋陽) 북방의 성곽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하고 그 북방은 회덕현(懷德縣)의 변강 일대의 토성이 그 주요한 거점이었으나, 이 지역은 수·당의 침입로와 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신성(新城)이 북방의 요충으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수·당의 침입은 수륙 양로를 택하게 되었으므로 요동반도 남단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이에 따라 원래 천리장성의 남단은 영구였으나, 수·당의 침입 이후로는 신성으로부터 비사성까지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신형식, 1997)

한편 천리장성의 시발점과 종착점이 모두 송료대평원(松遼大平原)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음에 주목하기도 한다. 즉 천리장성은 농안 일대에서 출발하여 송화강(松花江)·요하(遼河) 분수령의 대평원을 가로지른 다음, 요하 동안(東岸)을 따라 요하 하구의 영구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고구려가 기존의 산성방어체계와 다른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즉 천리장성은 기존의 산성을 단순히 연결한 산성연방선(山城聯防線)이 아니라 새로운 군사방어선이라는 것이다.(여호규, 1999)

천리장성이 축조된 배경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다. 먼저 군사적 측면으로는 수의 뒤를 이은 당의 전략 변화가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고 본 견해가 있다. 수군(隋軍)이 중장기병(重裝騎兵)을 주력 병종으로 삼았던 것에 비하여, 당군(唐軍)은 경기병(輕騎兵)을 주력 병종으로 삼았기 때문에 기동력이 향상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도하로(渡河路)를 통해 요하를 건넌 다음 여러 성곽을 차례로 공략하는 다양한 전략·전술을 구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고구려도 기존의 산성방어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평원전술을 도입하면서 당군의 도하를 막기 위하여 요하 하류의 동안에 천리장성이라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고구려가 당에 예속된 거란(契丹)의 침공을 방어하면서, 예하의 말갈(靺鞨)이 당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봉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고구려는 농경·유목의 점이지대(漸移地帶)로서 말갈족과 거란족의 접경지역인 요하 중상류와 송료분수령(松遼分水嶺) 일대에 천리장성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여호규, 1999)

영류왕은 재위 24년(642)만에 죽었는데 뒤를 이어 조카인 고구려 제28대 보장왕(寶藏王)이 즉위하였다.『삼국사기』권20 고구려본기8 영류왕 25년조(642)에는 겨울 10월에 왕이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신형식, 1997,「高句麗 千里長城의 硏究」『白山學報』49.
여호규, 1999,「高句麗 千里長城의 經路와 築城背景」『國史館論叢』91.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七 榮留王 [名□□ 又建歲 戊寅立 治二十四年]
제27 영류왕. [이름은 □□ 또는 건세이다. 무인년에 즉위하여 24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