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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키워드사전보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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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

기본정보

고구려 제28대 왕.
생몰년 : ?-682
재위기간 : 642-668

일반정보

『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즉위년조에는 이름을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 하였다. 왕 27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자 당으로 끌려갔다. 그 후 몰래 말갈과 통하였으므로 681년 공주(?州)로 소환되어, 이듬해 그 곳에서 죽었으며 위위경(衛尉卿)에 추증되었다.

전문정보

『삼국사기』권21 고구려본기9 보장왕 즉위년조에는 이름을 장(臧) 혹은 보장(寶臧)이라 하였다.

보장왕은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하여 즉위하였다. 보장왕대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먼저 연개소문이 정변 뒤에 스스로 왕에 되지 않은 것에 주목하여 당시 고구려 국내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기도 한다. 즉 왕과 대신들의 대다수가 제거되었다고 하여 고구려의 전통적인 5부체제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으며, 그 예로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시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러 간 북부욕살(北部褥薩)과 남부욕살(南部褥薩)은 왕성(王姓)인 고씨(高氏)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을 보면 적지 않은 5부 귀족세력들이 존속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귀족연립정권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기는 어려웠다고 파악한다. 또한 안시성주(安市城主)의 연개소문에 대한 항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각 지역 성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세력의 존재도 연개소문 정권에 대하여 얼마간의 부담으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즉 보장왕대 고구려는 귀족연립적 정권을 유지한 채 연개소문이 권력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고 보장왕은 국가통합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자리하는, 집정(執政)이 둘인 정부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5부 귀족체제라는 수백년간 지속된 고구려의 지배체제는 중앙과 지방 통치를 비교적 특정 부가 장악하는 상황을 낳지 않고 지속됨으로써 귀족세력간의 견제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고, 이 점이 연개소문 정변의 한계를 규정했다고 보았다.(김기흥, 1992)

연개소문 정권의 성격에 대해서 귀족연립체제를 유지하려는 귀족세력에 의해서 견제의 대상이 된 연개소문과 영류왕(榮留王)의 왕위에 도전하는 태양왕(太陽王)계의 결합에 의해 탄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연개소문 가문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귀족 세력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였고, 태양왕계는 일찍이 왕위계승에서 밀려나 불만 집단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영류왕은 연개소문과 결탁한 태양왕 세력의 왕위에 대한 위협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고 귀족들과 한 편이 되어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전에 그러한 움직임을 알고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귀족들을 죽였으며, 태양왕의 아들인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그러나 그 정권은 서로 이해가 다른 두 세력의 결합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 자체가 불안한 것이었고, 독재를 추구하는 연개소문 세력에 눌려 있던 귀족들의 불만도 남아 있었다. 이후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고구려의 국내 세력은 급속히 분열하였으며,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 정권의 성립에서부터 그 소지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전미희, 1994)

연개소문이 정변 후에 막리지(莫離支)를 통해 새롭게 권력을 확보했음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당시 고구려 지배체제의 변화를 꾀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즉 기존의 대대로(大對盧) 체제는 귀족들의 기반과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은 막리지 아래 권력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군사권을 장악하고 태막리지(太莫離支) 등 새로운 관위를 마련하여 다수의 귀족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종래에 대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관위제만이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지방의 정치력이 중앙으로 흡수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평양천도 이후까지 존속하고 있던 지방의 독자성은 연개소문이 마련한 막리지 체제에도 부담을 주는 것으로서, 지방세력을 막리지 체제하의 집권력으로 편제하는 데 실패한 연개소문은 자신의 사적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의 방향은 연개소문이란 구심점이 사라짐으로써 다시 분산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이는 결국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파악하였다.(전경옥, 1996)

『일본서기』의 기록에 나오는 대로 연개소문이 그와 동성(同姓)인 도수류금류(都須流金流)를 대신으로 삼고 자신은 막리지에 취임한 것을 두고 연개소문이 대모달(大模達) 막리지에 취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장남 남생(男生)도 막리지가 되었는데 막리지는 고구려 말기 군권을 장악한 최고의 무관직인 대장군(大將軍)의 관등이었다. 남생은 연개소문의 사후 바로 대대로에 취임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노성(老成)한 귀족들이 많은 상태에서 대대로에 취임하여 귀족회의를 통해 지배하려 할 때 따를 수 있는 어려움을 피하고, 병권을 쥐고 있는 대장군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려 했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이는 연개소문이 정변 직후에 도수류금류를 대대로에 취임케 하였던 조처와 통하는 것으로서, 연개소문이 정변 후 스스로 대장군에 취임하였음을 추측케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대장군과 유사한 직임이 대모달로서 연개소문은 대모달이 되어 군권을 장악하고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벌여 나간 것으로 생각하였다. 연개소문은 대모달 막리지로서, 즉 직임은 대모달이고 관등은 막리지로서 정국을 이끌어 갔는데 이 대모달이 곧 대장군이라고 하였다. 뒷시기의 일이지만, 신라 말~고려 초에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황해도 평산 지역의 호족이 대모달(大毛達)이라 칭해졌는데, 이 역시 고구려 말기 군의 최고 사령관인 대장군이 대모달과 같은 실체였음을 추정하는데 하나의 방증이 된다고 하였다.(노태돈, 1999)

연개소문이 정변 후에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반대파 귀족들의 세력 기반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의 사적 권력 기반의 강화에 주목한 견해도 있다. 연개소문의 아들인「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와「천남산묘지(泉男産墓誌)」에 태대대로(太大對盧)·태막리지(太莫離支)·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 등의 관명이 보이는데 태대대로는 연개소문이, 태막리지와 태대막리지는 남생과 남산이 각각 역임한 관직이다. 연개소문이 정변 이후 언젠가 막리지에서 태대대로로 승임한 것으로 파악하면서, 이를 연개소문이 자신의 집권력을 계속적으로 보장받기 위하여 종신적으로 신설한 관직으로 보았다. 연개소문이 태대대로를 차지하고 있을 때에도 대대로는 존속했지만 이제는 막리지의 대표자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정치적 기능은 상실하였으며, 이러한 변화는 대대로의 주기적인 선출과 이에 따른 귀족 세력 간의 세력 조정과 합의에 기초하는 과거의 막리지 중심 체제가 부정되었음을 뜻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태대대로·태막리지 등의 집권적 관직의 신설과 아들들을 요직에 등용하는 연개소문의 사적 권력 강화는 “대대로-막리지” 중심의 정치 운영 체계에 기초하는 귀족 연립 정권의 정치 기반을 붕괴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상당한 반발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러한 귀족 세력 간의 갈등과 분열이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계기로 표면화되었고 이는 고구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았다.(임기환, 2004)

보장왕은 재위 27년(668)만에 나라가 망하여 당으로 끌려갔다. 고구려는 동명왕 갑신(기원전 37)으로부터 무진(668)에 이르기까지 705년간 나라를 유지하였다.『삼국사기』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하(下)에 따르면, 당고종(唐高宗) 영순(永淳) 초년(682)에 공주(?州)에서 왕이 죽어 위위경(衛尉卿)에 추증되고, 힐리(詰利)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김기흥, 1992,「고구려 淵蓋蘇文政權의 한계성」『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전미희, 1994,「淵蓋蘇文의 執權과 그 政權의 性格」『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전경옥, 1996,「淵蓋蘇文 執權期의 莫離支體制 硏究」『白山學報』46.
노태돈, 1999,『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임기환, 2004,『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十八 寶藏王 [壬寅立 治二十七年]
제28 보장왕. [임인년에 즉위하여 27년간 다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