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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

기본정보

당나라의 장군.
생몰년 : 592-667

일반정보

592년에 태어나서 667년 76세로 사망한 당나라의 장군으로,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전문정보

소정방의 이름은 열(烈), 자(字) 정방(定方)으로 하북(河北) 출생이다. 592년에 태어나서 667년에 76세로 사망하였다.

소정방의 군사적 활동은 수나라 말기부터 찾아진다. 15세 무렵에 그는 아버지를 도와 향리의 무리와 함께 도적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 수의 고구려 침공 이후 각지에서 지방관의 부패에 대항하는 백성들의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당나라가 들어선 이후 그의 움직임은 630년에 가서 찾아진다. 기록은 이때 그가 전투에 참여한 사실을 처음 알려주고 있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인 630년 2월에 장군 이정(李靖)의 선봉장이 되어 돌궐(突厥)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로로 좌무위중랑장(左武衛中郎將)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후 655년까지 26년 동안 소정방과 관련이 있는 어떠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655년 2월에 이르러 소정방이 대고구려전에 참여하여 활약한 사실에서 구체적인 움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부터 크게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는 주로 돌궐과 고구려 및 백제의 전쟁을 담당하였다. 656년에는 전군총관(前軍總管)으로 서돌궐(西突厥) 정벌에 나섰으며, 657년에 우둔위장군이었던 소정방을 다른 4명의 장수들과 함께 이려도장군(伊麗道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이들이 하로(賀魯)를 토벌하였다. 계속되는 돌궐 전투에서 큰 공로를 세운 소정방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형국공(邢國公)이 되었으며, 이후 반란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에 이르렀다.

660년에 소정방은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임명되어 수륙 13만 군대를 이끌고 산동반도를 출발하여 황해를 건너 백제로 향했다. 이와 동시에 신라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이들은 날짜를 정하여 양군이 합류하여 백제의 수도 사비를 공략하였으며, 그 결과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를 멸망시킨 뒤 소정방은 멸망한 백제의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이를 직접 관할하였다. 소정방은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뒤 군대로 하여금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젊은이들을 붙잡아 죽이는 행태를 자행하였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비, 융?효?연?태의 네 왕자 및 93명의 대신, 장사와 1만 2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백성을 포로로 거느리고 660년 11월에 귀국하였다. 당은 이들 포로를 데리고 수도 장안에서 대백제전 승리를 성대하게 기념하였다.

소정방은 661년에 고구려 정벌에 계속해서 나서게 되었는데, 662년 2월 초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어쩔 수 없이 철군함으로써 커다란 실패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패배는 그로 하여금 더는 대고구려전에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663년에 토번과 토욕혼의 대립이 일어나자 서방원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667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그 일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김수태, 2004)

650년 이후 크게 활동한 소정방은 당나라 역사상 어떠한 사람도 그와 같은 위세와 영예를 누리지 못하였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한국측 기록은 이러한 이해와는 다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에는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였을 때 소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자, 김유신이 그를 달래어 양군이 용감하게 쳐들어갔다고 하여 김유신과 소정방을 크게 대비시켜 주고 있다. 곧, 소정방은 두렵고 위축되어있었으며, 김유신은 용기있고 지혜로운 장군으로 묘사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 백제 정벌의 성공 역시 당이 아니라 신라가 주도하여 이루어낸 것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는 신라측의 소정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한편,『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또『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이런 말이 있다.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물러 있었다. 이때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나라 군대를 초대하여 독약을 먹이니 모두 죽었으므로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 소정방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에 이어 신라를 치려고 하자 김유신이 그를 독살하였고, 그 장소가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이 소정방 피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나당동맹(羅唐同盟) 관계 속에서 그 역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소정방이 당군의 상징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신라고전』이 신라 중심 사관이 표출된 설화식의 역사서가 아닐까 추측할 때 더욱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정방 피살설은 나당동맹의 약속을 어기고 신라에 대한 지배의사를 드러낸 당나라의 배반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통일기 신라인의 저류에 형성된 강렬한 자주의식을 반영하는 전승적 성격의 설화로 생각할 수 있다.(이도학, 1985)

참고문헌

이도학, 1985, 「羅唐同盟의 性格과 蘇定方 被殺說」『新羅文化』2.
김수태, 2004, 「침공군(侵功軍) 사령관 소정방의 좌절」『내일을 여는 역사』17.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濟二國 又謀伐新羅而留連 於是庾信知其謀 饗唐兵?之 皆死坑之 今尙州界有唐橋 是其坑地[按唐史 不言其所以死 但書云卒何耶 爲復諱之耶 鄕諺之無據耶 若壬戌年高麗之役 羅人殺定方之師 則後總章戊辰 何有請兵滅高麗之事 以此知鄕傳無據 但戊辰滅麗之後 有不臣之事 擅有其地而已 非至殺蘇李二公也]
『신라고전(新羅古傳)』에는 “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머무르고 있었다. 이에 유신은 그 음모를 알고 당병을 초대하여 독약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 상주(尙州)의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으니, 이것이 그 묻은 곳이라 한다[당사(唐史)를 보면 그 죽은 까닭은 말하지 않고 다만 죽었다고만 하였으니 무슨 까닭인가, 감추기 위한 것인지 혹은 향전(鄕傳)이 근거가 없는 것인가. 만일 임술년(壬戌年, 662) 고구려를 치는 싸움에 신라인이 정방의 군사를 죽였다고 하면, 후일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을까. 이로써 향전이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무진년(662)에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가 당에) 신사(臣事)하지 않고, 마음대로 고구려의 땅을 소유한 일은 있으나, 소정방과 이적 두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