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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흠순

기본정보

신라의 장군.
생몰년 : 미상

일반정보

백제?고구려 전쟁에서 활약한 신라의 장군으로, 김유신의 아우이다.

전문정보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조에 의하면, 비단을 짜서 태평가를 지어 당에 보낸 것이 진덕왕의 재위 때로, 김흠순(金欽純)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고 한 세주 부분에서 김흠순이 등장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金庾信)조에 의하면, 무력(武力) 이간(伊干)의 아들인 서현(舒玄) 각간(角干) 김씨(金氏)의 장자(長子)는 유신(庾信)이며 그 아우는 흠순(欽純)이라고 기록되었다.

김흠순은 김유신(金庾信)의 아우로서 백제?고구려 전쟁에서 활약한 무장이다. 사량부 출신으로 서현(舒玄)의 아들이고, 유신(庾信)의 동생이며 반굴(盤屈)의 아버지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7 열전7 김영윤(金令胤)조에 의하면, 김영윤의 할아버지가 흠춘(欽春) 혹은 흠순(欽純) 각간(角干)인데,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 6월 김유신?품일(品日) 등과 함께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 정벌에 나섰다고 한다. 계백(階伯)의 백제군과 황산(黃山)에서 결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네 번 싸워 모두 패하였다. 또한, 이때 흠순은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기를, “신하노릇을 하자면 충(忠)만한 것이 없고, 자식노릇을 하자면 효(孝)만한 것이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여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함께 하는 것이다.”라 하니, 반굴은 곧 단신(單身)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용맹히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2 열전2 김유신(金庾信) 중(中)에 의하면, 문무왕 원년(661)에 다시 이찬 흠순(欽純, 또는 흠춘(欽春)), 진흠(眞欽), 천존(天存),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예리한 군사가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어, 나라 안이 비어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으로 진군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어서 문무왕 2년(662) 8월 백제의 잔민이 내사지성(內斯只城:지금의 유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그는 19인의 장군을 이끌고 이를 토벌하였다. 문무왕 3년(663) 천존(天存)과 함께 백제 부흥군이 모여 있던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지금의 거창)을 공취하여 700여인의 목을 베었고,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받았다. 이어 덕안성(德安城: 지금의 은진)을 쳐서 1,700여 명의 반민(叛民)을 죽였다. 문무왕 8년(668) 6월의 고구려정벌 때에 그는 김인문(金仁問)?천존(天存)?문충(文忠)?진복(眞福)?지경(智鏡)?양도(良圖)?개원(愷元)?흠돌(欽突) 등과 함께 대당총관(大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와 출정하였다.

고구려 정벌 이후, 신라는 부흥운동을 꾀하는 백제?고구려의 유민(遺民)을 포섭하여 회유하는 한편, 대당(對唐) 항쟁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669년에 그는 파진찬(波珍飡)인 양도와 같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서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얻은 일에 사죄하고 이듬해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新羅本紀) 문무왕(文武王) 9년(669)조에는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 양도(良圖)를 당(唐)에 보내어 사죄하였다”고 기록되었고, 문무왕(文武王) 10년조에는 “정월에 당 고종(高宗)이 전년에 사죄사(謝罪使)로 가 있는 흠순의 환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그대로 가두었는데, 그는 마침내 옥에서 죽고 말았다. 이 사죄사는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그 유민을 거두어들인 까닭에 당제(唐帝)가 노하여 사자를 억류하였던 것이다”라고 기록되었다.

한편,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에는 이와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곧, 총장(總章) 무진(戊辰, 668년)에 문무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당병(唐兵)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의 여러 장병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했으므로 문무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으며, 이에 이듬해(669)에 당나라 고종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 꾸짖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군사 50만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고 한다. 이후 문무왕은 강수선생(强首先生)에게 명하여 인문(仁問)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에 전했고,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仁問)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669년에 당나라에 건너가서 옥에 갖힌 이는 인문(仁問)으로 나타나, 위의 『삼국사기』기사와 차이를 보인다.

이후 김흠순은 거의 업적을 남기지 않고 있으며, 통일전쟁의 주역인 죽지(竹旨), 천존(天存), 군관(軍官) 등은 그후 시중(侍中)이나 상대등(上大等)으로 진출했으나, 흠순만은 제외되고 있다. 이는 무열왕실이 이들에게 어느 정도 견제의 입장을 취했기 때문인 듯하다. 곧, 통일전쟁 이후 긴급한 군사적 필요성의 해소와 무열왕권의 전제화 과정 속에서 김유신의 후손들은 점차 정치적 지위를 잃게 된다.(신형식, 1983)

참고문헌

신형식, 1983, 「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梨花史學硏究』13?14合.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1 기이1 진덕왕)
眞德王
第二十八眞德女王 卽位自製太平歌 織錦爲紋 命使往唐獻之[一本 命春秋公爲使 往仍請兵 太宗嘉之 許蘇<定>方云云者 皆謬矣 <顯>慶前春秋已登位 <顯>慶庚申非太宗 乃高宗之世 定方之來在<顯>慶庚申 故知織錦爲紋 非請兵時也 在眞德之世 當矣 盖請放金欽純之時也] 唐帝嘉賞之 改封爲?林國王 其詞曰 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軍邁虞唐 幡旗何赫赫 錚鼓何??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疑幽現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方方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王之代有閼川公林宗公述宗公<武>林公[慈藏之父]廉長公庾信公 會于南山于知巖議國事 時有大虎走入座間 諸公驚起 而閼川公略不移動 談笑自若 捉虎尾 撲於地而殺之 閼川公?力如此 處於席首 然諸公皆服庾信之威 新羅有四靈地 將議大事 則大臣必會其地謀之 則其事必成 一<曰東>靑松山 二曰南于知山 三曰西皮田 四曰北金剛山 是王代 始行正旦禮 始行侍郞號
진덕왕(眞德王)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하여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 당나라에 바쳤다.[어떤 책에 “춘추공을 사신으로 삼아, 가서 군사를 청하니 태종이 그것을 기뻐하며 소정방(蘇定方)을 보내기로 허락했다”고 한 것은 모두 잘못이다. 현경(顯慶) 전에 춘추는 이미 왕위에 올랐고, 현경 경신년(660)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 때이며, 소정방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다. 그러므로 비단을 짜서 무늬를 수놓아 보낸 것은 청병 때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덕왕의 재위 때인 것이 마땅하니, 대개 김흠순을 놓아 돌려보내기를 청하던 때였다.] 당나라 황제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계림국왕(?林國王)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 가사는 이렇다. “대당(大唐)이 왕업을 개창하니, 어마어마한 황제의 계책이 창성하도다. 전쟁이 그치니 군사(戎衣)는 안정되고, 문치를 닦으니 모든 왕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통령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체모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은 해와 달과 같아, 운수를 다스림이 우당(虞唐)보다 앞서네. 번(幡)과 기(旗)는 어찌 그리 빛나며, 징소리와 북소리는 어찌 그리 웅장한가.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을 어긴 자는, 뒤집히고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한 풍속이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가 옥촉(玉燭)과 같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비치네. 산악의 정기는 재상을 내려,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나라 황제를 밝게 빛내리.” 왕의 시대에 알천공?임종공?술종공?무림공(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서 국사(國事)를 의논했다. 이때 큰 호랑이가 나타나서 좌중에 뛰어들어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와 같았으므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여러 공들은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런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의논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졌다.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우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전이고,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이 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란 칭호도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