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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존

기본정보

신라 중대의 장군
생몰년:?-679

일반정보

신라 중대의 장군으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당의 침입에 대비해 명랑을 추천하여 사천왕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전문정보

김천존은 신라 중대의 장군으로,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법민(文虎王法敏)조에 따르면, 당이 신라를 침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김천존이 왕에게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라 하며 명랑을 추천하여서 그의 비법으로 당나라 병사를 물리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진덕왕(眞德王)조, 권5 신라본기5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조, 권6 신라본기6 문무왕(文武王)조와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義慈王)조, 권42 열전2 김유신(金庾信)조, 권44 열전4 김인문(金仁問)조에서는 김천존(金天尊)을 천존(天存)으로 표기하고 있어서 『삼국유사』의 표기와 차이가 있다. 물론 천존(天尊)과 천존(天存)은 같은 인물로 파악된다.

김천존의 활동에 대해서는 『삼국유사』가 명랑과 관련된 행적만을 전하고 있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문무왕 3년(663)에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격파하였으며, 문무왕 4년(664)에 김인문(金仁問),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부여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熊津)에서 회맹을 맺었다. 또한 문무왕 6년(666) 김천존의 아들 한림(漢林)과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삼광(三光)이 모두 나마(奈麻)로 당(唐)에 건너가 숙위(宿衛)가 되었다. 김천존은 고구려 정벌에도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19년(679)에는 중시(中侍)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중시는 집사부(執事部)의 장관이므로 김천존이 정치적으로 문무왕과 밀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김연민, 2008)

그의 정확한 생년(生年)은 알 수 없으나 문무왕 19년(679)에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김연민, 2008, 「新羅 文武王代 明朗의 密敎思想과 의미」『韓國學論叢』30.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무왕법민)
文<武>王法敏
王初卽位 龍朔辛酉 泗南海中 有死女尸 身長七十三尺 足長六尺 陰長三尺 或云 身長十八尺 在<乾封>二年丁卯 總章戊辰 王統兵 與仁問?欽純等至平壤 會唐兵滅麗 唐帥李勣 獲高臧王還國 [王之<姓>高 故云高臧 按唐書高(宗)記 <顯>慶五年庚申 蘇定方等征百濟 後十二月 大將軍契如何 爲浿(江)道行軍大摠管 蘇定方爲遼東道大摠管 劉伯英爲平壤道大摠管 以伐高麗 又明年辛酉正月 蕭嗣業爲扶<餘>道摠管 任雅相爲浿江道摠管 率三十五萬軍 以伐高麗 八月甲戌 蘇定方等及高麗 戰于浿江敗亡 乾封元年丙寅六月 以龐同善 高臨 薛仁貴 李謹行等 爲後援 九月 龐同善及高麗戰敗之 十二月己酉 以李勣爲遼東道行臺大摠管 率六摠管兵 以伐高麗 總章元年戊辰九月癸巳 李勣獲高臧王 十二月丁巳獻于帝 上元元年甲戌二月 劉仁軌爲?林道摠管 以伐新羅 而鄕古記云 唐遣陸路將軍孔恭 水路將軍有相 <與>新羅金庾信等滅之 而此云仁問?欽純等 無庾信 未詳] 時唐之游兵諸將兵 有留鎭而將謀襲我者 王覺之 發兵之 明年 高宗使召仁問等 讓之曰 爾請我兵以滅麗 害之何耶 乃下圓扉 鍊兵五十萬 以薛邦爲帥 欲伐新羅 時義<湘>師西學入唐 來見仁問 仁問以事諭之 <湘>乃東還上聞 王甚悼之 會群臣問防禦策 角干金天尊奏曰 近有明朗法師 入龍宮 傳秘法而來 請詔問之 朗奏曰 狼山之南 有神遊林 創四<天>王寺於其地 開設道場則可矣 時有貞州使走報曰 唐兵無數至我境 廻?海上 王召明朗曰 事已逼至 如何 朗曰 以彩帛假構宜矣 乃以彩帛營寺 草構五方神像 以瑜?明僧十二員 明朗爲上首 作文豆婁秘密之法 時唐羅兵未交接 風濤怒起 唐舡皆沒於水 後改創寺 名四天王寺 至今不墜壇席 [國史<云> 改創在調露元年己卯] 後年辛未 唐更遣趙憲爲帥 亦以五萬兵來征 又作其法 舡沒如前 是時翰林郞朴文俊 隨仁問在獄中 高宗召文俊曰 汝國有何密法 再發大兵 無生還者 文俊奏曰 陪臣等來於上國一十餘年 不知本國之事 但遙聞一事爾 厚荷上國之恩 一統三國 欲報之德 新創天王寺於狼山之南 祝皇壽萬年 長開法席而已 高宗聞之大悅 乃遣禮部侍郞樂鵬龜 使於羅 審其寺 王先聞唐使將至 不宜見玆寺 乃別創新寺於其南 待之 使至曰 必先行香於皇帝祝壽之所天王寺 乃引見新寺 其使立於門前曰 不是四天王寺 乃望德遙山之寺 終不入 國人以金一千兩贈之 其使乃還奏曰 新羅創天王寺 祝皇壽於新寺而已 因唐使之言 因名望德寺[或系孝昭王代 誤矣] 王聞文俊善奏 帝有寬赦之意 乃命强首先生 作請放仁問表 以舍人遠禹奏於唐 帝見表流涕 赦仁問慰送之 仁問在獄時 國人爲創寺 名仁容寺 開設觀音道場 乃仁問來還 死於海上 改爲彌?道場 至今猶存 大王御國二十一年 以永隆二年辛巳崩 遺詔葬於東海中大巖上 王平時常謂智義法師曰 朕身後願爲護國大龍 崇奉佛法 守護邦家 法師曰 龍爲畜報 何 王曰 我厭世間榮華久矣 若?報爲畜 則雅合朕懷矣 王初卽位 置南山長倉 長五十步 廣十五步 貯米穀兵器 是爲右倉 天恩寺西北山上 是爲左倉 別本云 建福八年辛亥 築南山城 周二千八百五十步 則乃眞<平>王代始築 而至此乃重修爾 又始築富山城 三年乃畢 安北河邊築鐵城 又欲築京師城郭 旣令眞吏 時義<湘>法師聞之 致書報云 王之政敎明 則雖草丘地而爲城 民不敢踰 可以災進福 政敎苟不明 則雖有長城 災害未消 王於是正罷其役 麟德三年丙寅三月十日 有人家婢名吉伊 一乳生三子 總章三年庚午正月七(日) 漢岐部一山級干[一作成山<阿>干]婢 一乳生四子 一女三子 國給穀二百石以賞之 又<伐>高麗 以其國王孫還國 置之眞骨位 王一日 召庶弟車得公曰 汝爲?宰 均理百官 平章四海 公曰 陛下若以小臣爲宰 則臣願潛行國內 示民<間>?役之勞逸 租賦之輕重 官吏之淸濁 然後就職 王聽之 公著緇衣 把琵琶 爲居士形 出京師 經由阿瑟羅州[今溟州] 牛首州[今春州] 北原京[今忠州] 至於武?州[今海陽] 巡行里? 州吏安吉見是異人 邀致其家 盡情供億 至夜 安吉喚妻妾三人曰 今玆侍宿客居士者 終身偕老 二妻曰 寧不竝居 何以於人同宿 其一妻曰 公若許終身竝居,則承命矣 從之 詰旦 居士欲辭行時曰 僕京師人也 吾家在皇龍 皇聖二寺之間 吾名端午也[俗爲端午爲車衣] 主人若到京師 尋訪吾家幸矣 遂行到京師 居宰 國之制 每以外州之吏一人 上守京中諸曹[注今之其人也] 安吉當次上守 至京師 問兩寺之間端午居士之家 人莫知者 安吉久立道左 有一老翁經過 聞其言 良久佇思曰 二寺間一家 殆大內也 端午者乃車得令公也 潛行外郡時 殆汝有緣契乎 安吉陳其實 老人曰 汝去宮城之西歸正門 待宮女出入者告之 安吉從之告 武珍州安吉進於門矣 公聞而走出 携手入宮 喚出公之妃 <與>安吉共宴 具饌至五十味 聞於上 以星浮山[一作星損乎山]下 爲武珍州上守<燒>木田 禁人樵採 人不敢近 內外欽?之 山下有田三十畝 下種三石 此田稔歲 武珍州亦稔 否則亦否云
문무왕 법민
왕이 처음 즉위한 용삭(龍朔) 신유(661)에 사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여자의 시체가 있었는데 키가 73척이나 되고 발 길이가 6척, 음장(陰長)이 3척이었다. 혹은 키가 18척이며, 건봉(乾封) 2년(667)의 일이라고도 한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668)에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등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서 당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의 장수 이적은 고장왕(高藏王)을 잡아 본국으로 돌아갔다.[왕의 성이 고씨이므로 고장이라고 했다. 『당서(唐書)』 고종기를 보면 현경(顯慶)5년 경신(660)에 소정방(蘇定方) 등이 백제를 정벌한 다음에 12월에는 대장군 계여하(契如何)를 패강도행군대총관을 삼고, 소정방을 요동도대총관으로 삼고,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대총관으로 삼아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또 다음해인 신유 정월에는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총관으로 삼고,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총관으로 삼아 3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했다. 8월 갑술에 소정방 등이 패강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쳤다. 건봉 원년(666) 병인 6월에는 방동선(龐同善), 고림(高臨), 설인귀(薛仁貴), 이근행(李謹行)으로써 후원을 하게 하였으며, 9월에는 방동선이 고구려와 싸워 이겼다. 12월 기유에 이적(李勣)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여섯 총관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총장 원년 무진(668) 9월 계사에 이적이 고장왕을 사로잡아 12월 정사에 황제에게 포로로 바쳤다. 상원(上元) 원년 갑술(674) 2월에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하였다. 『향고기』에는 육로장군 공공(孔恭)과 수로장군 유상(有相)을 보내 신라의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인문과 흠순 등만 말하고 유신은 없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때 당나라의 유병(遊兵)과 여러 장병들이 진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를 치려고 한 것을 왕이 알고 군사를 내었다. 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유이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 이 때 의상법사(義湘法師)가 서쪽 당나라로 가서 유학하고 있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아뢰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尊)이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하였다. 명랑법사가 말하기를, “낭산(狼山)의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는데 그 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열면 가할까합니다.” 하였다. 그 때 정주(貞州)에서 사자가 달려와서 보고하기를 “당병이 무수히 우리의 국경에 다가와서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하였다. 이에 왕은 명랑을 불러 말하길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명랑이 말하기를 “채백(彩帛)으로 절을 임시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채백으로 절을 짓고 풀로써 오방신상을 만들고 유가의 명승 12사람으로 하여금 명랑을 상수(上首)로 하여 문두루의 비밀법을 쓰게 했다. 이 때 당병과 신라의 병사가 접전도 벌이기 전에 바람과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고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 후에 절을 고쳐서 다시 짓고 사천왕사라 이름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단석이 없어지지를 않았다.[『국사』에는 이 절의 개창이 조로(調露) 원년 기묘(679)에 있었다고 하였다.] 그 후 신미(671)에 당나라에서는 조헌(趙憲)을 장수로 하여 5만의 군사로 쳐들어왔는데 역시 같은 비법을 썼더니 그 전과 같이 배가 침몰하였다. 이때 한림랑 박문준(朴文俊)이 인문과 함께 옥중에 있었는데 당의 고종이 문준을 불러 묻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병이 다시 갔어도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하였다. 문준이 말하기를, “배신(陪臣)들은 상국에 온지가 10여년이 되었기로 본국의 일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의 사실만 들었을 뿐인데, 상국의 은혜를 많이 입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므로, 그 덕을 갚고자 낭산의 남쪽에 천왕사를 새로 지어 황제의 만년수명을 축원하며 법석(法席)을 깊이 열었다는 것입니다.” 고종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파견을 하여 절을 살펴보게 하였다. 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온다는 말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 하고, 그 남쪽에 따로 새로운 절을 짓고 기다렸다. 사신이 이에 이르러 말하기를, “먼저 황제를 축수(祝壽)하는 곳인 천왕사에 가서 분향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신을 새로 지은 절로 인도하자 사신이 그 절문 앞에 서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왕사란 절이 아니고 망덕요산의 절이오.”하며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이 그에게 금(金) 1천냥을 주자 사자가 돌아가 말하기를,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축수를 새 절에서 할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새 절을 망덕사라 하였다.[혹은 효소왕때의 일이라고도 하나 이것은 잘못이다.] 왕은 문준이 당나라 황제에게 말을 잘 하여 그 죄를 용서하여 줄 뜻이 있음을 알고 강수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을 석방해 달라는 표문을 짓게 하여 이것을 사인(舍人) 원우(遠禹)에게 주고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게 하였는데,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인문을 위로하며 보냈다. 인문이 옥에 있을 때에 국인이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고 하고 관음도량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으므로 미타도량이라 고쳤다. 그 절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째인 영융(永隆) 2년 신사(681)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왕은 평시에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항상 말하기를, “짐은 죽은 후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려하오.”라고 하니. 법사가 아뢰길, “용은 짐승의 응보이니 어찌합니까?”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간의 영화를 버린 지가 오래니 추한 응보로 짐승이 된다면 이는 내가 바라는 바이오.” 왕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남산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였는데 길이가 50보였으며 너비가 15보로서, 미곡과 병기를 저장하였다. 이것이 우창(右倉)이며, 또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도 장창이 있으니, 이것은 좌창(左倉)이라 한다. 별본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천 8백 50보라 하였다. 곧 진평왕 때에 처음 쌓았다가 이 때에 와서 중수를 한 것이다. 또한 처음으로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는데 3년 만에 마쳤으며 안북하 변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한 서울에 성곽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를 갖추라고 명을 하였는데, 이를 의상법사가 듣고 글을 보내어서 아뢰기를,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하여도 백성들은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버리고 복이 될 수 있을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글을 보고 역사를 중지시켰다. 인덕(麟德) 3년 병인(666) 3월 10일에 길이(吉伊)라고 하는 종이 한꺼번에 세 아들을 낳았다. 총장 3년 경오(670)정월 7일에는 한기부 일산급간(一山級干)[혹은 성산아간(成山阿干)이라 함.]의 여종이 한꺼번에 네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딸 하나 아들 셋이었다. 나라에서는 곡식 2백석의 상을 주었다. 또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의 왕손을 데리고 와서 진골의 지위에 두게 하였다. 왕이 하루는 이복동생 거득공(車得公)을 불러 말하기를, “그대가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고 하니, 거득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만약 소신으로 하여금 재상을 삼으시려거든 신은 원하옵건대 나라 안팎을 잠행하며 민간 부역의 괴롭고 편안함과 조세의 경중과 관리의 청탁을 알아본 연후에 직위를 맡을까 합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은 그 말을 들어주었다. 거득공은 치의(緇衣)를 입고 비파를 들고 거사의 모양을 하고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阿瑟羅州)[지금의 명주(溟州)], 우수주(牛首州)[지금의 춘주(春州)], 북원경(北原京)[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렀다. 마을을 돌아다니니 주(州)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대접을 하였다. 밤이 되자 안길은 아내와 첩 세 사람을 불렀다. “오늘밤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평생을 나와 함께 할 것이오.” 두 아내가 말했다.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찌 딴 사람과 동침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아내가 말하길, “당신께서 종신토록 함께 살기를 허락한다면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쫓았다. 이튿날 아침 거사가 작별 하고 떠나려 할 때 말하기를, “나는 서울 사람으로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의 두 절 가운데 있고 이름은 단오(端午)[속언에 이르길 단오를 거의(車衣)라 한다.]라고 하니, 주인이 서울에 오게 되면 찾아주기 바라오.”라고 하고, 거득공은 서울로 돌아와 재상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각 주의 향리 한 사람을 서울 안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주, 지금의 기인(其人)이다.] 안길이 마침 상수(上守)할 차례가 되어 서울에 오게 되자 단오거사의 집을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이 오랫동안 길가에 서 있으니 늙은이가 지나가다 그의 말을 한참 듣고 서서 말했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궐이고 단오란 거득공이다. 아마도 외군(外郡)에 잠행을 하였을 때에 인연과 약속이 있었던 것인가.” 안길이 사실대로 말하자 노인이 말했다. “그대가 궁성의 서쪽 귀정문(歸正門)으로 가서 출입을 하는 궁녀를 기다려 사실을 말하시오.” 안길이 그 말을 좇아 무진주의 안길이 문 밖에 왔다고 아뢰었다. 거득공이 듣고 달려나와 손을 붙잡고 궁으로 들어가 공의 부인을 함께 불러내어 잔치를 열었는데, 음식이 50여 가지나 되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또는 성손호산(星損乎山)] 밑의 땅을 무진주 상수리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사람들의 벌채를 금하였다.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했으니, 경향 각지의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였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어 종자를 석 섬 뿌렸는데, 이 밭이 풍작이 되면 무진주 또한 풍작이 되고, 흉년이면 무진주도 또한 흉작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