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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

기본정보

청해진 대사이며 신무왕의 즉위를 보좌한 인물
생몰년 : ?-846

일반정보

장보고는 헌덕왕대에 중국으로 들어가 무녕군 소장이 되었으며, 흥덕왕 3년(828) 귀국한 후 청해진 설치를 왕에게 허락받고 그곳을 지켰다. 그는 해적의 소탕에 주력하여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통상들을 통제하며 큰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신무왕의 즉위에 군사를 보조함으로써 큰 영향을 미쳤으며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기로 했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키려고 준비한다. 그러나 청해진에 들어온 염장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전문정보

『삼국유사』에서는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며,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828)조와 같은 책 권44 열전4 장보고(張保皐)·정년(鄭年)조에서 관련 기록이 전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는 궁파(弓巴)라고 하였으며, 『삼국사기』 권10 신라본기10 흥덕왕 3년(828)조에 의하면 성은 장씨이고 궁복(弓福)이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열전 권220 열전145 동이 신라조에는 장보고(張保皐), 일본측 기록인 『속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張寶高)라고 하였다.

이렇게 사서에 따라 장보고의 이름은 궁복, 궁파, 장보고(張保皐) 혹은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본래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로 성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중 복(福)과 파(巴)는 신라계 이름에서 아이를 뜻하는 “보”의 차음표기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의 의미는 “활보” 즉 활 잘쏘는 아이의 뜻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노태돈, 1978)

그런데 『삼국사기』의 세주와 중국측 기록, 일본측 기록을 보면 그의 이름이 장보고(張保皐) 혹은 장보고(張寶高)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가 중국에 들어가 궁복의 궁(弓)과 비슷한 장(張)으로 성을 삼고 복(福)자를 음이 비슷한 2자로 나누어 보고(保皐) 혹은 보고(寶高)라고 하여 이름으로 삼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今西龍, 1933) 특히 일본측 사료에서만 보이는 보고(寶高)라는 이름은 장보고(張保皐)의 동음이자 표기로서 그가 해상으로 부를 축적한 후에 스스로를 격상(格上)하는 의미에서 개명하였던 것이며, 이는 그의 이전 행적을 알지 못하는 일본에만 그 최후 성명이 전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5)

『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을 보면 장보고와 정년은 모두 신라 사람으로 싸움을 잘했으며 정년은 특히 바다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당나라에 가서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 되었다. 그리고 당에서 둘의 관계는 설명이 없으나 정년이 후에 당나라 관직에서 떨어져 장보고에게 간다고 하자 풍원규(馮元規)가 만류하는 것으로 보아 둘 사이가 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장보고는 정년을 맞아들일 뿐 아니라 술을 대접할 정도로 환대하였으며 나라에서 난리로 인해 왕위가 비었다고 하자 그에게 군사를 내주어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열전의 내용 뒤에 사론을 달아 두목이 장보고의 인자함을 칭찬한 내용을 싣고 있다.

장보고의 출신지역에 대해서, 일찍부터 청해진을 설치했던 완도를 그의 고향으로 본 연구가 주목받았다.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7년(845)조에서 조정대신들이 그의 딸을 문성왕의 차비로 들이는 것에 대해 장보고가 해도인(海島人)임을 들어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볼때 그는 어떤 섬 출신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한?중?일 삼각교역의 본영(本營)으로 완도를 선택하여 청해진을 설치하고 있어, 완도가 그의 고향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당시 동아시아 3국의 항로는 중국의 명주(明州) 혹은 양주(揚州)?등주(登州)로부터 서해를 건너 흑산도(黑山島) 근해를 거쳐 한반도 연안의 각 하구(河口)나 한국해협으로 일본 북구주(北九州)까지 통하는 것으로 이 항해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은 한반도의 서남단(西南端) 혹은 다도해(多島海) 중 어느 곳이나 좋았는데, 굳이 완도를 택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김상기, 1948)

한편 장보고는 출신성분도 미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삼국유사』권2 기이2 신무왕 염장 궁파조에서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해 대신들이 그가 미천한 신분이라고 하여 반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본래 해도인이라고 하였으므로 신라의 골품제도 안에서 왕경인 6부 보다 차별대우를 받던 지방출신이고, 특히 섬 출신이었기 때문에 육지출신에 비해 더 차별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이기동, 1985) 혹은 장보고의 신분이 신라의 전반적인 상황에서는 미천하다고 할지 모르나, 지방사회의 신분구성면에서 본다면 해당지역의 토호층(土豪層)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그가 당에 도달했을 때 출중한 무재를 지닌 인물로 표현되고, 곧 그 지위가 무녕군의 군중소장이 되고 있으므로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김광수, 1985)

장보고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고 하며,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무령군소장(武寧軍小將)이 되었다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를 보면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는 영정(永貞) 원년(805)에 설치되어 함통(咸通) 3년(862) 폐지될 때까지 서주를 비롯한 4개 주를 다스렸다고 하므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열전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장보고는 서주에서 무녕군 절도사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장보고가 당으로 건너가게 된 계기는 나당(羅唐)간의 교섭이 이루어진 이후 골품체제 하에서 한계를 느낀 신라인들이 입신(立身)을 위해 당으로 건너간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고 한다.(김광수, 1985) 그러나 신라가 815년부터 821년까지 유례없이 기근이 자주 발생하여 지방사회가 피폐하였음을 근거로 하여, 장보고도 자활의 길을 찾아 국외로 떠난 것이라 보기도 한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헌덕왕 8년(816)조에 의하면 흉년이 들어 절동(浙東)지방에까지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이 170명이나 되었다고 하며, 일본측 기록을 보아도 811년 8월부터 824년 5월까지 13회에 걸쳐 모두 826인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집계된다고 한다.(이기동, 1985)

장보고의 해상교역 시점에 대해, 엔닌(圓仁)의 기록에 의하면 대략 820년대 전반에는 장보고가 이미 해상교역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권4 회창 5년 9월 22일조에서 천장(天長) 2년(824)에 신혜(信惠)를 당으로 데려왔다는 “장대사(張大使)”가 장보고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대략 장경(長慶) 원년(821)에는 그가 소속되었던 무녕군에 감군정책이 실시된 것으로 보여(蒲生京子, 1979) 이때 군을 떠나 해상(海商)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보고의 활동지역은 산동반도 적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산동반도 연해안에는 많은 신라인 촌락들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마을이 적산촌이었다. 적산촌은 마을 뒤의 적산(赤山)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지금의 산동성 영성시 석도진 일대이다. 그런데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적산의 남쪽기슭에 위치한 적산 법화원이 본래 장보고가 처음 세웠다고 전하며, 이를 통해 법화원은 장보고의 원찰(願刹)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법화원이 위치했다고 전하는 등주부(登州府) 영해주(寧海州) 문등현(文登縣) 청녕향(淸寧鄕)의 적산포(赤山浦) 주변이 장보고가 활동한 중심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김광수, 1985)

장보고가 적산포를 중심으로 해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에 대해, 이사도(李師道)의 토벌과 이것으로 인해 혼란한 정세를 들 수 있다.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 일족은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를 세습하며 산동지역을 지배하였으며 대대로 대신라?발해의 교역관계를 통제 해왔다. 그런데 그 일족 중 마지막 인물인 이사도(李師道)가 원화(元和) 14년(819)에 토벌되면서 산동지역에서 신라인 세력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장보고는 특히 이사도 토벌의 선봉군이었던 무녕군의 소장출신이라는 점에서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원화 11년(816)부터 나?당 양국의 자료상에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해적의 신라인 노비 매매행위도 장보고가 해상으로서 세력을 확보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정기 일족이 몰락한 후 산동지역이 혼란하여, 양국을 왕래하는 해상은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야 했는데, 장보고는 해도인(海島人)으로서 해사(海事)에 능통했으며, 무장으로의 경력까지 겸비하여 다른 이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김광수, 1985)

한편 장보고는 교역활동을 위해 적산 법화원을 건립하였고, 그곳을 중심으로 신라인 세력을 모아 법화원의 운영이나 해상 교역에 이들을 이용함으로서 재당신라인 사회의 실질적 우두머리로서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서윤희, 2001) 828년 이전 어느 시점에 장보고는 당에서 귀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계기는 그가 청해진을 설치하고자한 이유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에서 해적들의 신라인 약매행위(掠賣行爲)에 분함을 느꼈기 때문이고 또 해적선의 횡행으로 신라인의 해상활동이 지장을 받게 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이기동, 1985)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장보고는 왕을 찾아뵙고 군사 1만으로 청해진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 흥덕왕은 왕권을 강화하려던 노력으로 조공을 통해 당과 접촉하고 있었으나 해적에 의해 조공이 피해를 입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흥덕왕은 당과의 빈번한 접촉을 안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청해진은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당?일본과의 무역을 장악하여 왕도 경주의 관문인 울산항으로 향하는 선박을 통제 혹은 보호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춘 곳으로,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한 것은 그가 신라 귀족과 직접적 연결이 없어서였기 때문으로 보았다.(서윤희, 2001)

한편 청해진에서 장보고가 이끈 군사 1만은 장보고가 현지 완도의 1만 명을 수급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어 일종의 민군(民軍) 조직으로서 청해진을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김상기, 1948) 혹은 당시 군정(軍政)의 상황으로 보아 그의 직함으로 동원될 수 있는 군정(軍丁)으로 보아 마땅한데, 그의 세력권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일정 지역의 주민에 대한 지배를 정치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김광수, 1985)

이후 장보고는 산동반도에 거주하던 신라인과 청해도 관할하의 서남해안 지역의 주민을 세력의 기반으로 하였다고 한다.(김광수, 1985) 그리고 그는 동아시아 삼국이 집권체제의 이완으로 지방체제가 허술해진 시기를 이용해 대규모의 조직적인 사교역(私交易) 활동에 뛰어들었으며 그의 성공 비결은 무역의 통제라고 한다. 그는 국내적으로는 노예무역의 근절이라는 구호 아래 서남해안 일대에 근거를 둔 군소 해상세력가들을 단속?억제하고 대외적으로는 재당 신라인 사회를 자신의 명령체계아래 재조직?활용함으로써 사무역의 이익을 독점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기동, 1985)

한편 장보고가 820년대 초 당 번진의 퇴역군인들을 규합하고 완도 주변의 백성들을 끌어들여 청해진의 군사를 조성하였는데, 청해진 전성기의 병력수가 『삼국사기』에 이르는 병사 1만 명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장보고는 이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적들을 아우르고 군소 무역업자들을 자신의 휘하로 통합하여 국제무역에 활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권덕영, 2005)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조에 의하면 신무대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장보고에게 군사를 청하며, 왕위에 오르면 그의 딸을 왕비로 들일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 군신들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들이는 것에 반대하여 그 일이 무산되자 청해진을 지키고 있던 장보고가 반란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때 염장이 장보고를 제거하려고 거짓으로 왕에게 원망이 있는 척하여, 청해진에 들어가 장보고를 죽였다. 『삼국사기』에는 『삼국유사』보다 더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데, 장보고의 딸이 신무왕의 왕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성왕의 왕비로 들어가기로 했음이 다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청해대사(淸海大使)로 있던 장보고가 왕을 뵙고, 청해(淸海)를 지켰다. 그리고 희강왕 2년(837) 김우징(신무왕)이 처자식과 함께 청해진대사 장보고에게 의탁하였고, 민애왕 즉위년(838)에는 민애왕이 희강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자 왕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여 장보고의 군사를 빌려 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신무왕 즉위년(839) 장보고는 감의군사로 봉해지고 식읍 2천호를 받았으며, 그 해 7월 23일 신무왕이 죽고 문성왕이 즉위하자 진해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문성왕 7년(845) 장보고의 딸을 받아들여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삼으로 했으나, 조정대신들이 반대하여 왕이 그만두었고, 다음해(846) 장보고가 자기 딸을 왕비로 맞이하지 않은 것에 원망을 품고 청해진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때 염장이 청해진에 들어와 장보고를 암살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 권44 열전4 장보고(張保皐)·정년(鄭年)조에서도 장보고의 행적을 전한다. 그런데 난이 일어나 왕위가 비었다는 말을 듣고 이를 평정한 후, 장보고는 재상이 되었고 정년이 대신 청해진을 지켰다고 전하는 것이 신라본기와 다르다. 이것은『삼국사기』 열전의 내용이 두목(杜牧)이 지은 『번천문집(樊川文集)』을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천문집』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신당서(新唐書)』 권220 열전145 동이 신라조와도 그 내용이 같다.

강성한 세력을 보유했던 장보고의 죽음과 그 세력의 쇠퇴에 대해서, 직접적인 장보고가 죽은 경위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따라 대개 염장 혹은 비슷한 암살자에게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今西龍, 1933) 그러나 그 배경에는 장보고가 골품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조정 대신들을 비롯한 보수적인 지방의 호족들이 그의 죽음에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김광수, 1985) 반면 청해진의 사무역 독점으로 인해 이익을 상실하게 된 군소 해상 세력가와 문벌의 권위를 자랑하는 중앙 귀족들이 합작하여 장보고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이기동, 1985) 혹은 장보고를 견제한 김양이 염장을 보내어 그를 암살하고 그 휘하 군사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진압했다고 보기도 한다.(서윤희, 2001)

장보고 사후 『삼국사기』 권11 신라본기11 문성왕 13년(851)조에는 “청해진(淸海鎭)을 폐지하고 그 사람들을 벽골군(碧骨郡)으로 옮겼다.”라고 하여 청해진 세력은 모두 이산(離散)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近澤書店.
김상기, 1948, 「古代의 交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대하여」『東方文化交流史論攷』, 을유문화사.
노태돈, 1978, 「新羅의 門客」『韓國史硏究』20?21合.
蒲生京子, 1979, 「新羅末期の張保皐の擡頭と反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김광수, 1985, 「장보고의 정치사적 위치」『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이기동, 1985, 「張保皐와 그의 海上勢力」『張保皐의 新硏究』, 완도문화원.
서윤희, 2001, 「淸海鎭大使 張保皐에 관한 연구 -新羅 王室과의 관계를 중심으로-」『震檀學報』92.
권덕영, 2005, 『재당 신라인사회 연구』,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신무대왕 염장 궁파)
神武大王 閻長 弓巴
第四十五神武大王 潛邸時□俠士弓巴曰 我有不同天之? 汝能爲我除之 獲居大位 則娶爾女爲妃 弓巴許之 協心同力 擧兵犯京師 能成其事 旣簒位 欲以巴之女爲妃 群臣極諫曰 巴側微 上以其女爲妃則不可 王從之 時巴在淸海鎭爲軍戍 怨王之違言 欲謀亂 時將軍閻長聞之 奏曰 巴將爲不忠 小臣請除之 王喜許之 閻長承旨歸淸海鎭 見謁者通曰 僕有小怨於國君 欲投明公 以全身命 巴聞之大怒曰 爾輩諫於王而廢我女 胡顧見我乎 長復通曰 是百官之所諫 我不預謀 明公無嫌也 巴聞之 引入廳事 謂曰 卿以何事來此 長曰 有?於王 欲投幕下 以免害爾 巴曰 幸矣 置酒歡甚 長取巴之長劍斬之 麾下軍士驚?皆伏地 長引至京師復命曰 已斬弓巴矣 上喜賞之 賜爵阿干
신무대왕(神武大王) 염장(閻長) 궁파(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인 궁파(弓巴)에게 말하기를, “내겐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준다면, 왕위를 차지한 후에 너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겠다.”고 하였다. 궁파는 이를 허락하고, 마음과 힘을 같이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그 일을 이룰 수 있었다. (왕이) 이미 왕위를 빼앗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극력으로 간하기를, “궁파는 미천한 신분이니 임금께서 그 딸을 왕비로 삼는 것은 불가합니다.”고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때 궁파는 청해진에서 군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려고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기를, “궁파가 장차 충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려고 하니, 소신이 그를 제거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염장은 뜻을 받들고 청해진(淸海鎭)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말하기를, “나는 우리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소. 명철한 공에게 의탁하여 신명을 보전하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성내 말하기를, “너희들이 왕에게 간하여 나의 딸을 폐하게 하고 어찌 나를 보려고 하느냐?”고 하였다. 염장이 다시 통해 말하기를, “그것은 많은 관료가 간한 것이고, 나는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명철하신 공께서는 (나에게) 혐의를 가지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궁파가 이 말을 듣고 청사(廳事)에 불러들여 (염장에게) 이르기를, “경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라고 하니, 염장이 말하기를, “왕에게 거스른 일이 있어, (공의) 막하에 들어가 해를 면하려고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때)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취해 그를 베니,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무서워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이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와 복명하여 말하기를, “이미 궁파를 베었습니다.”고 하니, 왕은 기뻐하면서 그에게 상을 주고 아간의 벼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