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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포

기본정보

서천축의 아육왕이 바다에 띄워 보낸 황금과 황철이 도착한 곳

일반정보

서천축(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 이 황철 그리고 1불, 2보살상이 도착한 곳이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이다.

전문정보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는 서천축(西天竺)의 아육왕(阿育王)이 실어 보낸 황철, 1불 2보살상이 도착한 곳이다.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에 따르면, 서천축(西天竺)의 아쇼카왕(阿育王)이 철 5만 7,000근과 황금 3만 분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고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도 같이 실어 보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으며, 이 황철과 1불, 2보살을 실은 배가 도착한 곳이 하곡현 사포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조의 세주에는 “지금의 울주 곡포다(今蔚州谷浦也).”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고려시대에는 사포(絲浦)가 곡포(谷浦)로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권4 의해5 자장정률조를 통해 자장이 귀국하던 곳임을 살펴 볼 수 있다. 사포(絲浦)는 지금의 울산 태화로 추정된다.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3 탑상4 황룡사장육)
皇龍寺丈六
新羅第二十四眞興王卽位十四年癸酉二月 將築紫宮於龍宮南 有黃龍現其地 乃改置爲佛寺 號黃龍寺 至己丑年 周圍牆宇 至十七年方畢 未幾海南有一巨舫 來泊於河曲縣之絲浦[今蔚州谷浦也] 撿看有牒文云 西竺阿育王 聚黃鐵五萬七千斤 黃金三萬分[別傳云 鐵四十萬七千斤金一千兩 恐誤 或云 三萬七千斤] 將鑄釋迦三尊像 未就 載舡泛海而祝曰 願到有緣國土 成丈六尊容 幷載<模>樣一佛二菩薩像 縣吏具狀上聞 勅使卜其縣之城東爽塏之地 創東竺寺 邀安其三尊 輸其金鐵於京師 以大建六年甲午三月[寺中記云 癸巳十月十七日] 鑄成丈六尊像 一鼓而就 重三萬五千七斤 入黃金一萬一百九十八分 二菩薩入鐵一萬二千斤 黃金一萬一百三十六分 安於皇龍寺 明年像淚流至踵 沃地一尺 大王升遐之兆 或云 像成在眞平之世者 謬也 別本云 阿育王在西竺大香華國 生佛後一百年間 恨不得供養眞身 歛化金鐵若干斤 三度鑄成無功 時王之太子 獨不預斯事 王使詰之太子奏云 獨力非功 曾知不就 王然之 乃載舡泛海 南閻浮提十六大國 五百中國 十千小國 八萬聚落 靡不周旋 皆鑄不成 最後到新羅國 眞興王鑄之於文仍林 像成 相好畢備 阿育此飜無憂 後大德慈藏西學 到五臺山 感文殊現身授訣 仍囑云 汝國皇龍寺 乃釋迦與迦葉佛講演之地 宴坐石猶在 故天竺無憂王 聚黃鐵若干斤泛海 歷一千三百餘年 然後乃到而國 成安其寺 蓋威緣使然也[與別記所載符同]像成後 東竺寺三尊 亦移安寺中寺記云 眞平五年甲辰 金堂造成 善德王代 寺初主眞骨歡喜師 第二主慈藏國統 次國統惠訓 次廂律師云 今兵火已來 大像與二菩薩皆融沒 而小釋迦猶存焉 讚曰 塵方何處匪眞鄕 香火因緣最我邦 不是育王難下手 月城來訪舊行藏

황룡사장육
신라 제 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즉위 14년 계유(癸酉, 553) 2월에 궁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 나타났으므로, 이에 고쳐서 절로 삼고 황룡사(黃龍寺)라 하였다. 기축(己丑, 569)에 이르러 주위에 담장과 지붕을 만들어 17년에 와서야 비로소 끝내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다 남쪽에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하곡현(河曲縣) 사포(絲浦)[지금의 울주(蔚州) 곡포(谷浦)다.]에 와 닿았다. (이 배를) 뒤져보니 첩문(牒文)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서축(西竺)의 아육왕(阿育王, 재위 기원전 268-232)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서[「별전(別傳)」에는 철 40만 7천근, 금 1천량이라고 했는데, 아마 잘못된 것 같다. 혹은 3만 7천근이라도 한다.]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주조하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원컨대 인연 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丈六)의 존귀한 모습이 되어 주소서.’ 라고 하고 아울러 견본으로 부처 하나와 보살상 둘을 실었다.”고 하였다. 고을 관리가 문서를 갖춰 국왕에게 아뢰었더니, 그 고을 성 동쪽의 탁트인 땅을 골라 동축사(東竺寺)를 세워 세 불상을 안치하고, 그 금과 철은 서울로 수송하여 대건(大建, 569-581) 6년(574) 갑오(甲午) 3월에[절의 기록에는 계사(癸巳, 573) 10월 17일이라고 하였다.] 장육존상을 주존하였는데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 무게는 3만 5천 7근으로 황금 1만 1백 98푼이 들었으며, 두 보살에는 철 1만 2천근과 황금 1만 1백 36푼이 들었다. 황룡사에 모셨더니 이듬해에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자나 젖었다. (그것은) 대왕(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때 완성되었다고 하나 잘못이다. 『별본(別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아육왕(阿育王)은 서축(西竺) 대향화국(大香華國)에 살았다. 석가가 돌아가신 후 백년 무렵에 태어나 석가의 진신에 공양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금과 철 약간 근을 모아 3번이나 불상을 주조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때 왕의 태자만이 그 일에 참례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그를 힐책하자 태자가 아뢰기를, ‘(그것은) 혼자 힘으로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벌써 안 될 줄 알고 있었습니다.’고 하였다. 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이에 (그것을)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남염부제(南閻浮提) 16대국(大國), 5백 중국(中國), 10천 소국(小國), 8만 취락(聚落)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으나 모두 주조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최후로 신라국(新羅國)에 이르러 진흥왕(眞興王)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주조하여 불상을 완성하니 상호가 다 갖추어졌다. 아육(阿育)을 번역하면 무우(無憂)라고 한다. 후에 대덕(大德) 자장(慈藏)이 서방으로 유학하여 오대산(五臺山)에 이르렀더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현신(現身)으로 감응하여 비결을 주며 이에 부촉하기를, “너희 나라의 황룡사는 바로 석가불(釋迦佛)과 가섭불(迦葉佛)이 강연한 땅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천축(天竺)의 무우왕(無憂王, 아육왕)이 황철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천 3백여 년이나 지난 후에 너희 나라에 이르러 (불상이) 이루어지고 그 절에 모셔졌던 것이니 대개 위덕(威德)의 인연(因緣)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별기(別記)의 기록과 부합된다.]라고 하였다. 불상이 이루어진 후 동축사(東竺寺)의 삼존불상도 (이) 절로 옮겨 안치하였다.” 절의 기록에는 진평왕(眞平王) 5년 갑진(甲辰, 584)에 금당이 조성되었으며,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 때 절의 첫 주지는 진골 환희(歡喜) 스님이고, 제 2대 주지는 자장(慈藏) 국통(國統), 다음은 혜훈(惠訓) 국통(國統), 다음은 상률(廂律) 스님이라 하였다. 지금은 병화(兵火, 몽고의 침입) 이래로 큰 불상과 두 보살상은 모두 녹아 없어지고, 작은 석가상만이 남아 있다. 찬한다. “티끌세상 어느 곳인들 참 고향 아니랴만, 부처님 모실 인연 우리나라가 제일일세. 그것은 아육왕이 착수 못한 것이 아니라, 월성 옛터를 찾아온 것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