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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암

기본정보

백제 때 재상을 뽑던 바위.

일반정보

정사암은 백제 때 호암사에 있던 재상을 뽑던 바위로 신성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전문정보

『삼국유사』권2 기이2 남부여 전백제(南扶餘 前百濟)조에 따르면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란 바위가 있어 나라에서 재상을 뽑으려 할 때 당선될 3, 4명의 이름을 써서 함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놓아두고 얼마 후에 보고 이름 위에 인장자국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虎嵓寺有政事嵓 國家將議宰相 則書當選者名 或三四 函封置嵓上 須臾取看 名上有印蹟者爲相 故名之)”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백제의 재상 선출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백제의 재상은 귀족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사암 고사(故事)는 귀족회의가 재상선출 등을 비롯한 중요국사를 일정한 장소에서 논의하고, 또 일정한 의식절차를 거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상 선출의 장소로 사용된 정사암은 신성한 곳이며, 이 신성한 곳에서의 의식절차는 여기에서 논의되고 결정된 사항들에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하는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노중국, 1988)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跡條)에 따르면 “천정대(天政臺). 현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절벽으로 된 봉우리에 큰 암석이 대(臺)같이 되어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백제 때에 재상(宰相)을 임명하려 하면, 뽑힐 만한 자의 이름을 써서 함(函) 속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았다가 조금 뒤에 이를 취하여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것으로 재상을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했다고 한다. 혹은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일컫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부여 북쪽 백마강변에 호암이 표시되어 있어, 이들 기록을 토대로 정사암이 부여 북쪽의 금강과 지천(之川)이 합류하는 규암면 동단에 위치한 천정대로 비정되고 있다.

현재 천정대는 시도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구드래나루에서 낙화암을 지나 강을 따라 상류 약 3km쯤에 있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호암리 동편의 취령봉 정상에 있다. 산 아래 서편 강변에 있는 동네가 바로 호암리이며, 그곳에는 백제호암사지(虎嵓寺址)가 남아 있다. 절벽 아래에는 임금바위, 신하바위라 불리는 암반이 있다. 이 바위 위에서 임금과 신하가 각기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원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천정대 유적은 산 정상에 자리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유구(遺構)가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주변에서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을 비롯한 기와편 등이 발견되고 있다.(부여군지편찬위원회, 1987)

참고문헌

부여군지편찬위원회, 1987, 『扶餘郡誌』.
노중국, 1988, 『百濟政治史硏究』, 일조각.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남부여 전백제)
南扶餘 前百濟[北扶餘 已見上]
扶餘郡者 前百濟王都也 或稱所夫里郡 按三國史記 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沘> 國號南扶餘 注曰 其地名所夫里 泗<沘>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 扶餘之別號也 已上注 又按量田帳籍曰 所夫里郡田丁柱貼 今言扶餘郡者 復上古之名也 百濟王姓扶氏 故稱之 或稱餘州者 郡西資福寺高座之上 有繡帳焉 其繡文曰 統和十五年丁酉五月日餘州功德大寺繡帳 又昔者河南置林州刺史 其時圖籍之內 有餘州二字 林州今<嘉>林郡也 餘州今之扶餘郡也 百濟地理志曰 後漢書曰 三韓凡七十八國 百濟是其一國焉 北史云 百濟東極新羅 西南限大海 北際漢江 其<都>曰居<拔>城 又云固麻城 其外更有五方城 通典云 百濟南接新羅 北距高麗 西限大海 舊唐書云 百濟 扶<餘>之別<種> 東北新羅 西渡海越州 南渡海至倭 北高麗 其王所居 有東西兩城 新唐書云 百濟西界越州 南倭 皆踰海 北高麗 史本記云 百濟始<祖>溫祚 其父雛牟王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州之王無子 只有三女 見朱蒙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扶餘州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恐後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岳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弥雛忽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弥雛忽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城 後以來時百姓樂悅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解爲氏 後至聖王 移都於泗沘 今扶餘郡[彌雛忽 仁州 慰禮 今稷山] 按古典記云 東明王第三子溫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本扶餘至慰禮城 立都稱王 十四年丙辰 移都漢山[今廣州] 歷三百八十九年 至十三世近肖古王 咸安元年 取高句麗南平壤 移都北漢城[今楊州] 歷一百五年 至二十二世文周王卽位元<徽>三年乙卯 移都熊川[今公州] 歷六十三年 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 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 歷一百二十年 至唐顯慶五年 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金庾信與蘇定方討平之 百濟國舊有五部 分統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唐以地分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等五都督府 仍其酋長爲都督府刺史 未幾新羅盡幷其地 置熊‧全‧武三州及諸郡縣 又虎嵓寺有政事嵓 國家將議宰相 則書當選者名或三四 函封置嵓上 須臾取看 名上有印蹟者爲相 故名之 又泗<沘>河過有一嵓 蘇定方嘗坐此上 釣魚龍而出 故嵓上有龍跪之蹟 因名龍嵓 又郡中有三山曰 <日>山吳山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居其上 飛相往來 朝夕不絶 又泗<沘>崖又有一石 可坐十餘人 百濟王欲幸王興寺禮佛 先於此石望拜佛 其石自煖 因名火突石 又泗<沘>河兩崖如畵屛 百濟王每遊宴歌舞 故至今稱爲大王浦 又始祖溫祚乃東明第三子 體洪大 性孝友 善騎射 又多婁王寬厚有威望 又沙沸王[一作沙伊王] 仇首崩嗣位 而幼少不能政 卽廢而立古爾王 或云至<景>初<三>年己未乃崩 古爾方立
남부여 전백제[북부여는 이미 위에 나왔다]
부여군은 전백제의 왕도인데, 혹은 소부리군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성왕 16년 무오(538)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고 한다. 주에서는 “그 지명은 소부리이고,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이며, 소부리는 부여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상은 주이다. 또 『양전장적』에 의하면, “소부리군 전정주첩”이라고 하였다. 지금의 부여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먼 옛날의 지명을 되찾은 것이다. 백제왕의 성이 부씨이므로 그렇게 불렀다. 혹 여주라고 부르는 것은 군의 서쪽에 자복사 고좌(高座) 위에 수놓은 휘장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통화 15년(997) 정유 5월 일에 여주 공덕대사 수장”이라고 했다. 또 옛날 하남에 임주자사를 두었는데, 그때 그림과 책 안에 여주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는 지금의 가림군이고 여주는 지금의 부여군이다. 백제지리지에는, “『후한서』에 “삼한은 무릇 78국이고, 백제는 그 중 한 나라이다.”라고 하였다. 『북사』에는 “백제는 동쪽으로 신라에 그쳤고, 서남쪽으로 대해에 막혔으며, 북쪽으로는 한강에서 끝났는데, 그 군을 거발성 또는 고마성이라고도 하며, 그 밖에 또 오방성이 있다.”고 하였다. 『통전』에는 “백제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 고구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대해로 막혔다.”고 하였다. 『구당서』에는 “백제는 부여의 별종으로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며, 북쪽은 고구려인데,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는 동서로 두 성이 있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백제는 서쪽으로 월주와 경계하고, 남쪽은 왜인데 모두 바다를 건너고, 북쪽은 고구려이다.”라고 하였다. 『사기』 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니, 그 아버지는 추모왕 또는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주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 셋만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로 처를 삼도록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부여주의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이어 받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고 하고 다음은 온조라고 하였다. 후에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 마침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바라니 10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오직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대해에 막혔으니, 그 천험의 지리는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하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하고 10명의 신하로서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니, 이때가 한나라 성제 홍가 3년(기원전 18)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인민이 편안한 것을 와서 보고 마침내 부끄럽고 후회되어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귀속하였다. 후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하였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세계는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함께 나왔으므로 해로써 성씨를 삼았다. 후에 성왕때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이다. [미추홀은 인주이고 위례는 지금의 직산이다.]”『고전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동명왕의 셋째 아들 온조는 전한 홍가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로부터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는 도읍을 한산[지금의 광주]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 함안 원년(371)에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취하고 도읍을 북한성[지금의 양주]으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이 즉위하여 원휘 3년 을묘(475)에 도읍을 웅천[지금의 공주]으로 옮겨 63년을 지냈으며, 26대 성왕 때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고, 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으며, 당나라 현경 5년(660), 곧 의자왕 재위 20년에 신라의 김유신이 소정방과 함께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백제국은 전에 5부가 있어 37군 2백여 성 76만 호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당나라는 그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도독부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을 도독부자사로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아우르고 웅주, 전주, 무주의 3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또 호암사에는 정사암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을 뽑으려 할 때 당선될 사람 3,4명의 이름을 써서 함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놓아두고 얼마 후에 보고 이름 위에 인장자국이 있는 자를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또 사비하의 강변에 바위 하나가 있다. 소정방이 일찍이 그 위에 앉아서 고기와 용을 낚아서 바위 위에 용이 꿇어 앉은 자국이 있기 때문에 용암으로 이름하였다. 또 군 안에는 3개의 산이 있어 일산, 오산, 부산이라고 한다. 국가가 전성했을 때에는 각각 신인이 그 위에 살면서 날아서 서로 왕래함이 아침, 저녁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사비하의 절벽에 또 돌 하나가 있어 10여 인이 앉을만하다. 백제왕이 왕흥사에 가서 예불하려고 할 때는 먼저 이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였는데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석(火突石)으로 이름 하였다. 또 사비하의 양 절벽이 마치 그림병풍과 같아서 백제왕이 매번 놀고 잔치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므로 지금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 온조는 동명왕의 셋째 아들로서 몸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가 있었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또 다루왕은 관후하여 위엄과 덕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또는 사이왕]은 구수가 돌아가자 왕위를 이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고이왕을 세웠다. 혹은 경초 3년 기미(239년)에 돌아가자 고이왕이 곧 왕위에 올랐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