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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기

기본정보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일본의 사서(史書)

일반정보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일본의 사서(史書)로 연오랑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정보

『일본제기(日本帝紀)』는 『삼국유사』에서 보이는 일본의 사서(史書)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세오녀조에서는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 4년 정유(157)에 동해 해변에 살던 연오랑이 일본으로 가 왕이 되었다는 내용의 본문에 대하여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신라 사람으로 (일본에서) 왕이 된 자는 전무후무하니, 아마도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요 진짜 왕은 아닌 것이다.” 라고 기술한 세주에서 보인다. 또한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에서도 정원(貞元) 2년 병인(786)에 일본왕인 문경(文慶)이 신라를 침입하다가 겁을 먹고는 사신을 보내 신라왕에게 만파식적을 구하는 내용의 본문에 대해서 문경은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군주인 문덕왕(文德王)이 이 임금인 듯하다. 이 밖에 문경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고 하였다.” 라고 한 세주에서 보인다. 각각 『일본제기(日本帝記)』, 『일본제기(日本帝紀)』라고 기록한 점은 다르지만, “기(記)”와 “기(紀)”를 상통되는 한자로 보아 곧 두 책은 같은 책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하정용, 2008)

그러나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의 기록과 일본 측 자료와는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정원(貞元) 2년인 786년 당시의 왕으로 문경(文慶), 문덕왕(文德王), 또는 문덕의 태자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786년 당시에 일본에는 환무천황(桓武天皇, 재위 781-806년)이 있었으며, 문경이라는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일본 제55대 문덕왕은 재위 850-858년인 문덕천황(文德天皇)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786년과는 연대가 크게 차이가 나며 역시 문경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문덕의 태자란 기록도 실제 환무천황의 장자(長子)인 안전친왕(安殿親王)으로, 문경이라 불린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강인구 외, 2002)

이와 같은 『일본제기』의 실제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어왔다. 먼저 『일본제기』는 일본의 역사서로(三品彰英, 1975), 『일본서기』의 이칭(異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梁基伯, 1986) 그러나 일본측 자료에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조 세주에서만 보이는 정원(貞元) 2년(786)에 재위를 한 문경(文慶)이란 인물이 실제 재위기간 781-806년의 환무천황(桓武天皇)일 경우, 712년 완성된 『일본서기』에는 환무천황의 기록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일본제기』는 『일본서기』와 동일한 책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일본제기』는 권2 기이2 원성대왕조에서 보이는 문덕왕의 실제 재위기간인 858년을 상한으로, 현존하는 『삼국유사』초간본이 간행된 1394년을 하한으로 하여 편찬된 역사서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연오랑세오녀조의 세주에서 보이는 것처럼, 세주의 찬자가 신라인 가운데 일본에서 왕이 된 사람을 『일본제기』에서 찾아 본 것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일본제기』에는 역대 왕, 즉 천황이 된 자들의 출신을 알 수 있는 참고자료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하정용, 2008)

참고문헌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証』上, 塙書房.
양기백, 1986, 「三國遺事所在書名索引」『三國遺事 硏究 論選集』, 백산자료원.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2002, 『譯註 三國遺事』Ⅱ, 이회문화사.
하정용, 2008, 「『日本帝紀』와『日本帝記』를 통해서 본『三國遺事』의 사료비판 -延烏郞細烏女條와 元聖大王條의 後註를 중심으로 한 原典論-」『新羅史學報』12.

관련원문 및 해석

(『삼국유사』 권2 기이2 원성대왕)
元聖大王
伊<飡>金周元 初爲上宰 王爲角干 居二宰 夢脫幞頭 著素笠 把十二絃琴 入於天官寺井中 覺而使人占之 曰脫幞頭者 失職之兆 把琴者 著枷之兆 入井 入獄之兆 王聞之甚患 杜門不出 于時阿<飡>餘三 或本 餘山 來通謁 王辭以疾不出 再通 曰 願得一見 王諾之 阿<飡>曰 公所忌何事 王具說占夢之由 阿<飡>興拜曰 此乃吉祥之夢 公若登大位而不遺我 則爲公解之 王乃辟禁左右而請解之 曰脫幞頭者 人無居上也 著素笠者 冕旒之兆也 把十二絃琴者 十二孫傳世之兆也 入天官井 入宮禁之瑞也 王曰 上有周元 何居上位 阿<飡>曰 請密祀北川神 可矣 從之 未幾 宣德王崩 國人欲奉周元爲王 將迎入宮 家在川北 忽川漲不得渡 王先入宮卽位 上宰之徒衆 皆來附之 拜賀新登之主 是爲元聖大王 諱敬信 金<氏> 蓋厚夢之應也 周元退居溟州 王旣登極 時餘山已卒矣 召其子孫賜爵 王之孫有五人 惠忠太子憲平太子禮英匝干大龍夫人小龍夫人等也 大王誠知窮達之變 故有身空詞腦歌[歌亡未詳] 王之考大角干孝讓 傳祖宗万波息笛 乃傳於王 王得之 故厚荷天恩 其德遠輝 貞元二年丙寅十月十一日 日本王文慶[按日本帝紀 第五十五<代>文德王 疑是也 餘無文慶 或本云 是王太子] 擧兵欲伐新羅 聞新羅有万波息笛退兵 以金五十兩 遣使請其笛 王謂使曰 朕聞上世眞平王代有之耳 今不知所在 明年七月七日 更遣使 以金一千兩請之曰 寡人願得見神物而還之矣 王亦辭以前對 以銀三千兩賜其使 還金而不受 八月 使還 藏其笛於內黃殿 王卽位十一年乙亥 唐使來京 留一朔而還 後一日 有二女 進內庭奏曰 妾等乃東池靑池[靑池卽東泉寺之泉也 寺記云 泉乃東海龍往來聽法之地 寺乃眞平王所造 五百聖衆五層塔幷納田民焉]二龍之妻也 唐使將河西國二人而來 呪我夫二龍及芬皇寺井等三龍 變爲小魚 筒貯而歸 願陛下勅二人 留我夫等護國龍也 王追至河陽館 親賜享宴 勅河西人曰 爾輩何得取我三龍至此 若不以實告 必加極刑 於是出三魚獻之 使放於三處 各湧水丈餘 喜躍而逝 唐人服王之明聖 王一日請皇龍寺 注 或本云 華嚴寺 又金剛寺 {香}蓋以寺名經名{光}混之也 釋智海入內 <講>華嚴經五旬 沙彌妙正 洗鉢於金光井[因大賢法師得名]邊 有一黿浮沈井中 沙彌每以殘食餽而爲戱 席將罷 沙彌謂黿曰 吾德汝日久 何以報之 隔數日 黿吐一小珠 如欲贈遺 沙彌得其珠 繫於帶端 自後大王見沙彌愛重 邀致內殿 不離左右 時有一匝干 奉使於唐 亦愛沙彌 請與俱行 王許之 同入於唐 唐帝亦見沙彌而寵愛 <丞>相左右莫不尊信 有一相士奏曰 審此沙彌 無一吉相 得人信敬 必有所持異物 使人檢看 得帶端小珠 帝曰 朕有如意珠四枚 前年失一個 今見此珠 乃吾所失也 帝問沙彌 沙彌具陳其事 帝內失珠之日 與沙彌得珠同日 帝留其珠而遣之 後人無愛信此沙彌者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 有崔致遠撰碑 又創報恩寺 又望德樓 追封祖訓入匝干爲興平大王 曾祖義官匝干爲神英大王 高祖法宣大阿干爲玄聖大王 {玄聖大王}玄聖之考 卽摩叱次匝干
원성대왕
이찬 김주원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고, 왕은 각간(角干)으로서 이재(二宰)의 자리에 있었는데, 꿈에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썼으며, 12현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꿈에서 깨어 사람을 시켜 점을 쳤더니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이며,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 아찬 여삼(餘三), 어떤 책에는 여산(餘山)이라고 하는 이가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왕은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다시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 뵙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찬이 묻기를, “공께서 꺼리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니, 왕이 꿈을 점쳤던 사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아찬은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이는 매우 좋은 꿈입니다. 공이 만일 큰 자리에 올라서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해서 꿈을 풀어 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좌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해몽을 청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두건을 벗은 것은 위에 앉은 이가 없음이고,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이며, 12현금을 든 것은 12대 자손에게 왕위를 전할 징조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위에 주원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비밀리에 북천(北川)의 신에게 제사지내면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은) 그대로 따랐다. 얼마 안 되어 선덕왕(宣德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은 김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아 장차 궁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다. 그의 집이 북천의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이 먼저 궁에 들어가 왕위에 오르자, 상재(上宰)의 무리들이 모두 와서 따르고 새로 오른 임금에게 축하를 드리니, 이가 원성대왕(元聖大王)이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요, 성은 김씨이니 대개 길몽이 맞은 것이었다. 주원은 명주(溟州)로 물러나 살았다. 왕이 등극했으나, 이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왕에게는 자손이 다섯 있었으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실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달하는 이치를 알게 되었으므로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를 지었다.[노래는 없어져 알 수 없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 효양(孝讓)이 선조때부터 지녀온 만파식적(万波息笛)을 왕에게 전하였다. 왕은 이것을 얻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그 덕이 멀리 빛났다. 정원(貞元) 2년 병인(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군주인 문덕왕(文德王)이 이 임금인 듯하다. 이 밖에 문경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의 태자라고 하였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철퇴하고, 사자를 보내 금 50냥으로 피리를 (보자고) 청하였다. 왕이 사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듣기에는 상대 진평왕(眞平王)때에 그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 금 1천냥으로 청하기를, “과인이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전과 같은 대답으로써 이를 거절하고 은 3천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직하였다. 왕이 즉위한지 11년 을해(795)에 당의 사자가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 하루 뒤에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와서 아뢰기를, “저희들은 동지(東池), 청지(靑池)[청지는 곧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 샘은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불법을 듣던 곳이고, 절은 바로 진평왕이 세웠으며, 5백 성중(聖衆)과 5층탑과 전민(田民)을 아울러 헌납했다고 하였다.]에 있는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의 사자가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芬皇寺) 우물에 있는 용까지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우리 남편들인 호국룡을 머무르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하양관(河陽館)까지 쫓아가서 친히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들에게 명하기를, “너희들은 어찌해서 우리 나라의 세 용을 잡아 여기까지 왔느냐? 만일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세 곳에 놓아주자 각각 물 속에서 한 길이나 솟구치고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이에)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함에 감복하였다. 왕이 어느날 황룡사(皇龍寺) 주: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라고 했고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아마 절 이름과 불경의 이름을 혼동한 것 같다. 이 중 지해(智海)를 대궐 안으로 청하여 화엄경(華嚴經)을 50일 동안 강론하게 하였다. 사미(沙彌) 묘정(妙正)이 매번 금광정(金光井)[대현(大賢) 법사로 인해 지어진 이름이다]가에서 바리때를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떴다가 다시 가라앉곤 하므로 사미는 매번 먹다 남은 밥을 주면서 장난 하였다. 법석이 끝날 무렵 사미가 자라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지가 오래인데 너는 무엇으로 갚으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며칠 후에 자라는 조그만 구슬 한 개를 입에서 토하더니 주려는 듯 하므로, 사미는 그 구슬을 얻어 허리띠 끝에 달았다. 그후로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내전에 맞아들여 좌우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잡간 한 사람이 당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도 사미를 사랑하여 같이 가기를 청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이들이) 함께 당에 들어가니 당의 황제도 사미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도 모두 그를 존경하고 신뢰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한 관상보는 사람이 황제에게 아뢰기를, “이 사미를 살펴보니 한 군데도 길한 상이 없는데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으니, 틀림없이 이상한 물건을 가졌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몸을 뒤져보니 허리띠 끝에 조그만 구슬이 있었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에게 여의주(如意珠)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 해에 한 개를 잃었다. 이제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미에게 (그 구슬을 가진 연유를) 물으니, 사미는 그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황제가 생각해보니 구슬을 잃었던 날은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과 같았다. 황제가 그 구슬을 빼앗아 두고 그를 돌려보냈더니, 그 뒤로는 이 사미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이가 없었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마을의 곡사(鵠寺)[지금의 숭복사(崇福寺)]에 있으며,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왕은) 또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고 하고, 증조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이라고 하고, 고조 법선(法宣) 대아간을 현성대왕(玄聖大王)이라고 하였다. 현성대왕의 아버지는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