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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

간택과 혼인

조선시대의 왕비는 우선 정식으로 가례(嘉禮)를 치러 왕의 정실부인으로 되어야 했고, 둘째로 중국 황제의 고명(告命:임명장)을 받아야 했다.
왕비의 가례 절차는 양반 가문과 기본적으로 같았지만 몇 가지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납비의(納妃儀)는 왕비를 맞이하는 의식인데,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의혼(議婚)이 없는 대신 왕비 간택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국가에서는 왕비를 간택하기 위해 10세 전후 처녀들의 혼인을 금하는 금혼령을 내렸다. 전국 사대부 가문에서는 처녀의 사주단자와 함께 부.조. 증조. 외조의 이력을 기록한 신고서인 처녀단자(處女單子)를 나라에 올렸다. 다만, 왕실과 일정 범위의 친인척은 제외되었다. 왕비의 간택은 대체로 왕실의 어른인 대비가 주관하였다. 대비는 정치적 배려와 함께 가문과 사주가 좋은 처녀를 골랐는데, 세 차례에 걸친 간택 끝에 마지막으로 한 명을 뽑았다.
왕비감이 결정된 후에는 가례를 주관하는 임시 관청인 가례도감(嘉禮都監)을 설치하고 차례대로 납비의를 행하였다. 택일은 좋은 날을 골라 종묘와 사직에 왕비를 들이게 되었음을 고하는 의식이고, 납채(納采)는 장차 국구(國舅,왕의 장인)가 될 가문에 교명문(敎命文)과 기러기를 전하여 왕비로 결정된 사실을 알리는 절차였다. 교명문과 기러기는 정사와 부사가 전했는데, 교명문에는 화려한 의장과 악대를 딸려 보내 권위를 부여했다. 교명문과 기러기를 받은 주인은 답장을 보내며 이 사실을 사당에 고했다. 정사와 부사가 답장을 받아 와서 왕에게 보고함으로써 납채의 예는 끝이 났다.
납징(納徵)은 교명문과 함께 비단 예물을 보내는 의식으로 전체적인 절차는 납채와 같았다. 이 비단을 속백(束帛)이라 했는데, 검은 색 비단 6필과 붉은 색 비단 4필이었다. 고기(告期)는 왕이 혼인 날짜를 알리는 예이며, 혼인 날짜는 왕실에서 점을 쳐서 좋은 날을 정했다.
책비는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으로 특별히 가례를 위해 국구의 집 근처에 마련한 별궁에서 행하였으며, 궁궐에서 파견한 상궁들이 주관하였다. 왕은 왕비 책봉을 위해 교명문, 책문(冊文), 보수(寶綬), 명복(命服)을 보냈고, 왕비는 별궁에서 예복인 적의(翟衣)를 입고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왕의 책봉문을 받았다. 이후에는 궁녀들이 왕비에게 대궐 안주인에 대한 예를 차려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이때부터 왕비로 인정되어 대궐의 상궁과 내시들이 모셨으며 행차를 할 때는 산(繖)과 선(扇)으로 그 위엄을 보였다. 책비는 오로지 왕비의 가례에만 있는 절차였다.
명사봉영(命使奉迎)은 왕이 사신을 보내 별궁에서 대궐로 왕비를 맞이해 오는 절차로 사가의 친영에 해당하였다. 왕은 면류관에 구장복을 입었다. 왕비를 모시기 위해 사신은 교명문과 기러기를 가지고 갔고, 종친과 문무백관도 함께 별궁으로 갔다.
동뢰(同牢)는 대궐로 들어온 왕비가 그 날 저녁에 왕과 함께 술과 음식을 먹고 침전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절차였다. 동뢰에서 왕과 왕비는 하나의 박을 쪼개어 만든 잔으로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왕의 침전에서 첫날 밤을 보냈다. 머리맡에는 도끼무늬가 그려진 병풍을 놓았다.
이후에는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 어른을 뵙고 인사한 뒤에 조정백관과 내외명부의 여성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절차만 남았다.
왕비가 정해진 뒤 왕은 중국황제에게 왕비 책봉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왕비는 황제가 보내 준 고명을 받음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지위가 공인되었다.

참고문헌

신명호, <조선의 왕>,가람기획,1998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돌베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