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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

임신과 출산

조선시대 왕비는 대부분 왕세자빈으로 대궐에 들어갔다가 왕세자가 선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가 많았다. 왕세자와 세자빈의 초혼 연령은 대체로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의 미성년이었으므로 가례만 치렀고, 15살을 전후여 성년이 된 후 합방하였다.
왕비는 임신을 하면 태교를 하였다. 태교는 고대 중국 문왕과 무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과 태사(太姒)라는 중국 여성을 모범으로 하였다. 왕비의 임신이 확인되면 출산 예정 두세 달 전에 내의원에 산실청(産室廳)을 설치하였다. 산실청에는 어의와 의녀, 조정 대신, 산자리를 거둘 권초관 등이 배속되었다.
출산 예정 한달 전쯤에 왕비의 처소에 미리 산실을 마련하고 준비물을 설치했다. 산실의 24방위에는 붉은 색으로 쓴 방위도(方位圖)를 붙이고, 길한 방향을 골라 차지부(借地符)를 붙여 순산을 기원했다. 태를 받아 놓을 옷은 방에서 좋은 방향을 골라 두었으며, 북쪽의 벽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인 최생부(摧生符)를 붙여 놓았다. 아이를 낳을 장소에는 볏짚, 빈 가마니, 돗자리, 양털방석, 기름종이, 백마가죽, 고운 볏짚을 차례로 하여 산자리를 깔았다. 산자리를 깐 후 어의가 무사히 출산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을 세 번 읽는다. 왕비는 해산하기 위해 산자리에 앉은 후, 벽에 붙였던 최생부를 떼어서 촛불에 태운 다음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면 손에 해마(海馬)와 석연(石燕)이라는 해산 촉진제를 쥐었다.
왕비가 원자를 출산하면 왕은 원자 탄생에 대한 여러 사항을 잘 거행하도록 명령한 후 종묘에 원자의 탄생을 고하고 백관들도 원자의 탄생을 축하한다. 출산 후 3일 째 되는 날 산모와 아이는 목욕하였다.
산자리는 출산 당일 걷어 붉은 색 줄로 묶어 산실문 밖의 위쪽에 매달아 놓았다. 이는 민간의 금줄을 대신하는 것으로 순산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7일째가 되면 산자리를 걷는 의식인 권초례(倦草禮)를 하였다. 왕비가 출산할 때 권초례를 하는 관리는 자식이 많고 무병하며 관직생활에서도 풍파를 겪지 않은 다복한 사람 중에서 선발하였다. 하지만 후궁은 호산청의 관리가 그대로 권초례를 하였다. 권초례 전에 산실문 밖에서 커다란 상에 쌀, 비단, 은, 실을 올려놓고 신생아의 만복을 비는 권초제를 지냈다. 권초관은 산자리를 걷어 모시자루에 넣은 후 붉은 보자기에 싸서 권초각에 옮겨 보관하였다.
3일 또는 7일째에는 태를 정결한 물로 씻는 세태(洗胎)의식을 거행하였다. 출산 때 받아 두었던 태는 백자항아리에 보관하는 데, 세태는 산실의 뒤란에서 태를 물로 백 번에 걸쳐 씻은 다음 또 다시 향기로운 술로 한 번 더 씻는 의식이다. 씻은 태는 백자로 된 태항아리에 담아 밀봉하였다. 7일이 지나면 길일을 골라 안태사(安胎使)가 태항아리를 옮겨 태실(胎室)에 안장하였다. 석실 위에는 부도처럼 생긴 석물을 세우고 그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비석을 세웠다. 이 태실은 명당으로 전국에 걸쳐 있었다.
해산한 지 7일이 지나면 산모와 신생아의 목욕, 세태, 권초 등의 중요한 행사가 모두 끝난다. 산후 7일간 산모와 신생아에게 큰 탈이 없으면 일단 안심할 수 있었으므로, 7일 후에는 산실청을 해체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사흘동안 소격서에서 복을 기원하는 절차가 있었다. 국가가 공인하는 도사라고 할 수 있는 이 곳 관리들이 왕의 아들을 위하여 태상노군의 상앞에서 백 번의 절을 올렸다. 왕도 직접 소격전에 나와 복을 빌었다.

참고문헌

신명호, <조선의 왕>,가람기획,1998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돌베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