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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과 생활공간

왕비의 역할과 생활공간

왕비는 유교 국가의 여성 대표로서, 밖으로는 사회 전체의 음덕(陰德)을 진흥시키고, 안으로는 궐내 내명부를 통솔하였다.
왕비가 행하는 대표적인 의식은 여성 노동의 상징인 뽕따기와 길쌈하기 였다. 왕비는 여성들의 뽕따기와 길쌈을 솔선하기 위하여 친잠례를 하였다. 왕비는 대궐 안에서 유교 윤리의 가르침대로 부인, 며느리,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후궁에게도 질투하지 않는 모범을 보여야 했고, 대비,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등의 웃어른께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왕비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었다. 유교 사회에서 여성의 첫째 임무는 대를 이을 자식을 낳는 일이었다. 왕비는 훌륭한 아들을 낳아 잘 키우고,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에는 후궁이 낳은 아들을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길렀다.
왕비는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내명부를 비롯한 궁중 여성들을 통솔하였다. 후궁과 궁녀들은 정식으로 임명장을 받은 궁중 여성들이었으며 이외에도 궁궐에는 수많은 잡일을 담당하는 여자 종들이 있었다. 왕비는 이들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상벌권을 행사했다.
한편 왕비의 생활 공간은 궁궐 안쪽, 내전(內殿)에 제한되었다.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은 궁중 여성들이 생활하는 공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중전(中殿)이라고도 불렀다.
경복궁을 보면,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 좌우에 연생전(延生殿)과 경성전(慶成殿)을 두어 제후 3침 제도에 맞추었으며, 왕비의 내전 역시 3침이었다. 왕비의 내전은 강녕전 안쪽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으로, 그 좌우에 인지당(麟趾堂)과 함원전(咸元殿)이 위치한다. 왕비의 침전은 오행사상을 근거로 하여, 여름에는 중앙 건물에, 봄과 가을에는 동쪽에, 겨울에는 서쪽에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이고 실제로 계절마다 옮겨 기거하지는 않았다. 다만, 병이 나거나 흉한 일이 있을 때 길한 방향을 골라 거처를 옮기는 풍습은 있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에 정궁으로 이용되었던 창덕궁의 내전은 대조전(大造殿)이었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가 함께 사용한 침전으로 왕은 동쪽 온돌방을, 왕비는 반대쪽 서쪽 온돌방을 이용하였다. 창덕궁은 본래 경복궁의 별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제후 3침과 부인 3궁의 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후궁과 궁녀들의 생활 공간은 내전 주변에 위치하였다. 후궁은 별도의 독립 건물에서 거처했지만, 궁녀들은 내전을 둘러싼 행랑의 방에서 살았다. 궁녀들은 왕비뿐 아니라 후궁과 대비 등 독립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배속되었는데, 이들 역시 독립 건물 주위의 행랑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신명호, <조선의 왕>,가람기획,1998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돌베개,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