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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도자기

왕실용의 자기(瓷器)

조선시대 왕궁의 도자기는 조선시대가 추구하던 질박하고 검소하며 실용적이고 유교적인 시대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왕실, 관청용의 도자기들은 연례에 사용되는 예기로, 그리고 제사를 위한 제기로,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생활용기로, 그리고 저장용으로 쓰이는 옹기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각종 의궤(儀軌) 등에 기록된 자기와 국조오례의(國祖五禮儀)에 보이는 제기들, 그리고 공조옹기색절목정례책(工曹甕器色節目定例冊)등의 기록을 통해 궁중에서의 도자기의 쓰임새를 알아 볼 수 있다.

1. 예기(禮器)

현재 남아 있는 의궤 중 영조 43년의 자경전진작정례의궤(慈慶殿進爵整禮儀軌)에는 연정(宴亭)때 어용(御用)의 자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대전, 중궁, 세자, 세자빈궁에 올리는 선부(膳部)의 방에 주정(酒亭)을 놓고 그 위에 용준(龍樽)을 올려놓았다. 대전과 중궁전에는 특히 수주정(壽酒亭)이라고 부르는 네 개의 다리가 있는 주칠대(朱漆臺)가 있으며 용준에는 뚜껑이 있다. 준에는 쌍룡과 구름을 청화로 묘사하였으며, 용은 삼조룡(三爪龍)이다. 뚜껑에는 구름이 묘사되었다.
공주 이하의 주정에는 몸체가 긴 무문의 백자항아리인 사준(砂樽)을 올려놓았으며 대전의 어용기에는 화준(花樽) 일 쌍이 있는데 청화(靑畵)로 쌍용과 운문을 묘사하였고 뚜껑은 없다. 준은 사옹원(司饔院)에서, 준화(樽花)와 대(臺)는 상방원(尙方院)에서, 그리고 꽃을 꽂도록 준에 넣는 쌀은 사도사(司導寺)에서 진납(進納)된다. 이들은 향연장의 정원 좌,우의 가장 중요한 곳에 놓여지며 화준에는 용문 외에도 모란, 봉황, 사군자 또는 산수문 등이 청화로 표현된 예도 있다. 의식을 끝내는 다음날 회작(會酌)에는 꽃을 꽂은 준을 중앙에 세우고 술을 마시거나, 모란화의 준을 중심으로 남녀의 영인(伶人)이 ‘가인전목단(佳人剪牡丹)’의 춤을 춘다.
대전의 진찬안의 기명을 보면, 중궁은 화당기(畵唐器)를 사용하며, 세자 세자빈 옹주 공주는 갑번자기(甲燔瓷器)를 쓰고 내외 객빈은 고족사기(高足砂器)를 사용한다. 갑번자기는 분원(分院)에서 특별히 번조한 자기로 주로 백자들이며, 약간의 청화백자가 쓰였던 것 같다.

2. 제기(祭器)

궁중에서는 단정하고 청초하며 엄숙한 분위기의 유교정신을 상징하는 제사의 기명이 자기로 많 이 만들어져 사용되었으며 일반 사대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세종 연간에 오례(五禮)의 제에 사용하는 제기를 정한 것이 세종실록(世宗實錄)의 오례의(五禮儀)이다. 제기로는 동기(銅器)와 함께 자기를 만들어 썼으며 특히 상례(喪禮)에 쓰는 명기(明器)들에 자기가 많이 쓰였다.
여기서 제기로서의 준항(樽缸)은 제사용의 술을 담거나 꽃을 꽂는 그릇으로서 종묘를 비롯한 각 전, 각 사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3. 옹기(甕器)

궁중에서는 백자와 함께 옹기 역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갑인삼월일공조옹기색절목정례책(甲寅三月日工曹甕器色節目定例冊)에는 대궐 내에서 사용될 옹기의 수량을 기록하고 있는데 왕실 및 관청용으로는 대옹(大甕) 132좌, 대동해(大東海) 37좌, 소동해(小東海) 48좌, 대소탕이(大所湯伊) 12좌, 중항(中缸) 18좌 등 대소 옹기의 1년 소요 수는 685좌에 달한다.
대옹은 목욕용, 혹은 위화용으로 쓰이며, 맥주준형(麥酒樽形)의 옹은 식료품을 저장하는데도 쓰이나 대부분은 술을 담거나 물, 장을 담그는데 사용되며 대궐, 사묘, 관사 등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사옹원(司饔院) 및 분원(分院)

사옹원은 고려 목종(998-1009) 이래 상식국(尙食局), 사선서(司膳署)의 제도를 따랐고 조선 태조 원년(1392)에 사옹방(司饔房)으로 바뀌어 존속하다가 세조 13년(1467)에 사옹원으로 개칭되어 조선말기까지 존속되었던 관청이다.
경국대전 이전(吏典) 사옹원조(司饔院條)에 의하면 사옹원은 임금의 식사와 대궐 안의 연회에 쓰이는 모든 식사공급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곳으로 18명의 관인이 배속되었으며 그밖에도 대궐 안의 반감(飯監), 별사옹(別司饔) 등으로 불려지는 390명의 각종 차비(差備;최하급 용인(庸人))가 대궐내의 음식물을 조리하기 위해 있었으며, 사용되는 자기번조를 위해 사옹원의 자기제조장으로서 분원을 설치하였다.
분원은 설치 당초부터 사옹원에서 직접 관장하였다. 자기제조장의 규모가 점차 커지고 어용 및 궁중에서의 자기 수요량이 증가됨에 따라 제조작업 자체가 중요시되어 현지에서 직접 제조작업을 관할하는 관청이 설치되었는데, 이를 사옹원 분원이라 불렀다. 이노(李魯)의 송암선생문집(松巖先生文集)의 기록으로 보아 16세기 후반 경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감관이 설치되었다고 추정된다. 분원의 구성인원 중 감관(監官)을 비롯해 분원 경영의 시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27명이고 시제 사기제조의 사기장은 108명, 그 외 사기번조를 위한 잡역이 417명으로 분원 구성인원의 대부분은 잡역이 차지하고 있다. 분원은 철저히 분업화된 가운데 제작 운영되었다.
분원이 주로 광주를 중심으로 옮겨 다니게 된 것은 광주지방은 무갑산(武甲山) 등 수목이 무성한 산지가 있어서 시목 조달사정이 좋은데다 양질의 백토가 나오는 곳이었다. 또 제품의 주 공급지인 한성이 가까울 뿐만 아니라 한강을 이용한 재료 및 제품의 운반에도 편리한 곳이었다.
정규적인 진상자기는 주로 왕궁 소용의 일반용기와 봉상시의 제기, 내의원의 제약용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이 외에 사신 접대용에 필요한 자기로도 공급되었다. 그 밖에도 일반 진상자기 외에 가례 등 왕가의 경사에 사용되는 특수자기 역시 분원에서 번조, 조달되었다.

분원백자의 종류

왕실용의 분원백자(分院白瓷)는 순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동화백자 등이 있고 그 외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나타낸 상감청자 등이 만들어졌다.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순백자와 청화백자였다. 이들 자기로 만들어진 기명 중에 가장 많이 만들어 진 것은 대접, 접시, 사발 외에 병, 항아리 등이 있다.

1. 순백자(純白瓷)

순백자는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무문, 음각, 양각, 투각 상형의 백자가 있다.
무문(無紋)의 백자항아리는 전 시기에 설쳐 광주분원에서 주로 만들어 졌으며, 시기에 따라 15,16세기에는 구부(口部)가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형태에 몸체가 어깨에서 벌어져 서서히 좁아져 내려왔거나 저부(底部)에서 급히 좁아졌다가 다시 벌어져 세워진 것으로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으며 유색도 정치한 정백색(精白色), 설백색(雪白色), 회백색(灰白色)을 띄고 있다.
17세기에는 이전 시기의 기형(器形)을 본받은 것과 새로운 둥근 항아리가 크고 작은 형태로 만들어 졌다. 유색(釉色)은 회백색을 짙게 띠다가 엷은 담유백색(淡乳白色)을 띠게 된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달항아리에서 보여주는 원숙함과 구부가 직립되고 몸체가 길어지는 청화백자가 많아진다. 유색에 있어 전형적인 설백색, 유백색을 띄며 조선적인 조형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각이 진 항아리들이 나타나며 가장 원숙기의 한 모습을 나타낸다. 19세기에 이르러 목이 더욱 높이 직립되고 몸체가 길어지며, 급모서리가 깎이는 항아리와 팔모항아리 등이 분원리요에서 만들어진다. 유색은 청백색을 띠며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다.

2. 청화백자(靑畵白瓷)

제례기(祭禮器)에 사용되었을 주기(酒器), 화기(花器), 제기(祭器)의 기물이 많다. 이러한 청화백자의 청화안료는 대부분 중국 수입품에 의존해야 했으므로 15~17세기의 예는 드물며 격이 높다. 실제로 널리 쓰여진 것은 18,19세기에 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다양하다. 15,16세기의 예는 구부가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여러 형태의 예가 있으며, 18세기부터는 목이 직립되고 문양은 여백이 없이 꽉 차게 배치되며, 장생문 . 봉황문 . 산수문 등이 시문되었다.

3. 철화백자(鐵畵白瓷), 동화백자(銅畵白瓷)

철화백자는 청화(靑畵)의 대용으로 16세기 후반 경부터 18세기 전반 경에 이르기까지 주로 만들어졌다. 16세기 후반 경에서 17세기 전반 경에 제작된 것은 문양의 필치가 힘차고 강하며 기형은 풍만하다. 특히 17세기 전후반에 걸쳐 다양한 철화백자의 항아리들이 제작되었다. 18세기 전반 금사리요(金沙里窯)의 백자철화포도문(白瓷鐵畵葡萄紋) 항아리는 그 풍만하고 안정감 있는 기형과 그 위에 그려진 화폭의 그림과도 같은 포도문양이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철화백자의 예이다. 19세기에도 분원요에서 청화백자와 함께 철화의 백자가 계속 만들어 졌다.
동화백자(銅畵白瓷)는 18,19세기에 걸쳐 드물게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 구연(口緣)을 지니고 둥글거나 몸이 직립된 것과, 그리고 팔각의 항아리에 연화, 모란, 포도, 초화문 등이 강한 필치로 그려진 것이 남아 있다. 이러한 동화항아리는 그 붉은 색으로 인해서 특수한 용도의 기물로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청화와 철화를 함께 사용한 예도 있다.

참고문헌

윤용이, “朝鮮 王宮의 陶瓷器”, <朝鮮朝宮中生活硏究>, 문화재관리국, 1992. pp.463-472.
윤용이, “朝鮮時代 宮中 陶瓷器”, <토요문화강좌 제1집>, 궁중유물전시관,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