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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음악

음악기관과 음악인

궁중에서는 예조(禮曹)에서 예악을 관장하였고 악가무는 예조 산하의 장악원(掌樂院)에서 관장하였다. 각 관아에는 따로 예방(禮房) 산하에 악수청(樂手廳)과 교방청(敎房廳)이 있어 여기에서 음악을 담당하였다.

1. 장악원(掌樂院)

장악원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이원(梨園), 연방원(聯芳院), 함방원(含芳院), 뇌양원, 진향원(趁香院), 교방사(敎坊司), 아악대(雅樂隊)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초기의 전악서, 아악서, 관습도감, 악학 등의 상설 음악기관이 통합되어 성종1년(1470) 이후 장악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예조에 소속된 독립기관이었다. 궁중의 여러 의식 행사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은 장악원 소속의 악공, 악생, 관현맹, 여악, 무동 들에 의하여 연주되었다.
악공은 장악원의 우방(右坊)에 소속되어 연향에 쓰인 향악과 당악을 주로 연주하였고, 원칙적으로 공천(公賤) 중에서 뽑혔다. 악생은 좌방 (左坊)에 소속되어 제례의식 때 사용된 아악의 연주를 담당하였고, 이들은 향악이나 당악을 연주하던 악공과 구분되었다. 악생들은 양인(良人) 중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공천(公賤) 중에서 뽑힌 악공보다 신분적으로 높았다. 여악 (女樂 女伶)은 외연내연사객연(使客宴)왕실의 소소한 연향사악(賜樂)친잠중궁하례에서의 악가무 및 노상에서 올린 교방가요 등에서 활동했다. 내연의 행사는 여악이나 악공과 시각장애 음악인인 관현맹인(管絃盲人)이 연주하였고, 무동과 여기(女妓)가 정재를 추었다. 장악원의 모든 음악 행정은 문관 출신의 관원이 관장하였고, 악공과 악생 등의 음악 교육 및 춤과 연주에 관한 일은 전악(典樂) 이하 체아직의 녹관(祿官)들이 수행하였다.

2. 연주집단

조선조 궁정에는 전정헌가(殿庭軒架), 등가(登歌), 전정고취(殿庭鼓吹), 전후고취(殿後鼓吹) 전부고취(前部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 등의 여러 악대가 설치되었고 이외에 여령(女伶)이나 관현맹인(管絃盲人)의 악인를 별도로 두었다. 이들 악대의 역할은 명확하게 구별되어 의례나 연향의 성격 또는 격에 맞게 사용되었다.
전정헌가는 의례와 연향 시에 대뜰 아래인 전정(殿庭)에 편성되는 악대로, 조회망궐례책례가례회례연양로연 등의 의례나 연향에 쓰였다. 등가는 전상(殿上)에 진설되는 악대이며 전상악(殿上樂)이라고도 하였는데, 주로 연향에 쓰였다. 전정헌가와 등가는 조선 후기까지는 주로 외연(外宴)에 쓰였고, 내연(內宴)에는 관현맹인이나 여령이 쓰였다. 전정고취는 조회보다 격이 낮은 조참에서 연주하거나 문과전시(文科殿試)생진방방(生進放榜) 등의 의례에만 쓰였고 연향에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전후고취는 국왕의 출궁과 환궁 때에만 연주하였다. 전후부고취(前.後部鼓吹)는 임금의 각종 행렬 때에 어가의 앞과 뒤에 따르는 악대이다.

궁중음악의 원류
1. 향악(鄕樂)

전통 선율을 바탕으로 한 궁중음악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당악(唐樂)이 들어온 이후 전통음악을 당악과 구분하기 위하여 향악 또는 속악(俗樂)이라고 불렀다. 고려는 송나라와 음악적 교류를 통해 속악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음악인 아악까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궁중음악은 향악, 당악, 아악의 삼각구도로 변한다.
당악의 비중이 컸던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는 당악이 아악에 비해 비중이 오히려 낮아지면서 향악과 함께 우방악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후 향악과 당악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음악이 많이 제정되는데, 처음에는 고려에서 전승된 향악에 가사만 새롭게 붙여 부르다가 세종 때에는 향악과 고취악을 참작하여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향악계통의 음악으로는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정대업’, ‘보태평’과 ‘여민락’과 그 파생곡들, ‘영산회상’, ‘수제천’, ‘취타’ 등이 있다. ‘여민락’은 원래 당악계통으로 창작된 것이나 후에 향악으로도 연주되었다.
향악의 음악적 특징을 당악과 비교하여 간단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당악에서는 박(拍)을 가사의 구(句) 끝에 치는데 반해, 향악에서는 박을 치지 않거나 또는 사용하는 경우 박을 구의 시작에 친다. 당악은 한문의 가사로 되어 있고 가사의 구 길이가 일정하며, 구의 끝에는 운(韻)이 있어서 그 끝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향악의 우리말 가사는 일정하지 않은 구의 길이를 가졌고 구를 이루는 글자수도 일정하지 않아 그 끝을 구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분명히 구분이 되는 시작 부분에 박을 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② 규칙적이고 단순한 리듬의 당악에 비해 변화가 많고 복잡한 리듬을 가졌다. ③ 가사에서 짝수의 구를 가진 당악에 비해 향악의 가사는 홀수의 구를 가졌다. ④ 악구의 길이가 일정한 당악에 비해 악구의 길이가 불규칙하다.

2. 당악(唐樂)

당악은 중세에 서역지역 음악이 중국에 들어가 중국화 된 것이 다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음악이다. 고려시대는 당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당악은 대부분 송나라의 음악이었다. 고려와 조선 초에 당악이 궁중음악으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였으나 조선왕조에서는 많이 쇠퇴하였다. 세종 때는 아악을 혁신하여 왼쪽에 편성하고 당악을 향악과 함께 오른쪽에 편성하면서부터 당악은 향악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당악이란, 향악처럼 변화된 당악과 조선에 새롭게 창작된 당악곡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당악 형식에 따라 창작한 정재로는 ‘금척(金尺)’, ‘수보록’,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등 일곱 가지가 있다. 이들 중 ‘금척’, ‘하황은’, ‘육화대’ 등 세 가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조선 말기 순조 때는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제수창(帝壽昌)’, ‘최화무(催花舞)’ 등을 당악정재의 형식으로 새롭게 창작하였다. 고려에서 전래된 당악곡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노래로는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만이 있는데 이 곡들도 거의 향악처럼 변하여 당악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3. 아악(雅樂)

아악은 좁은 의미로는 고려 이후 궁중의식에서 사용된 음악 중 하나이며, 넓은 의미로는 민속음악에 대비되는 용어로 궁중음악의 총칭이다. 아악은 고려 예종 11년(1116)에 중국 송나라의 휘종이 대성아악을 보내줌으로써 시작되었다. 대성아악은 즉시 태묘(太廟)의 제사에 사용된 이후 계속하여 원구(圜丘), 사직(社稷) 등 다른 크고 작은 제사에도 사용되었다. 조선 세종 때는 많은 연구를 거쳐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게 되는데 이때 대성아악을 복원하지 않고 그 이전에 중국에 있던 아악 즉, 주(周)나라와 당우(唐虞) 시대의 옛 제도의 아악을 복원하게 된다. 따라서 고려의 아악과 세종 이후의 아악은 그 바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세종 때는 아악이 매우 융성하게 되어 제사뿐 아니라 조회악(朝會樂)과 회례악(會禮樂)으로도 사용되는데, 이 때를 아악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조 10년 이후에는 아악을 원래대로 제사에만 사용하고, 조회와 회례에서는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을 썼다. 또한 종묘의 제사에도 이때부터 아악 대신 향악을 쓰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아악이 위축되어 그 규모가 현격히 축소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와 문묘의 제사만 남고 다른 제사는 폐지되어 음악도 종묘악과 문묘악만 남게 되었다. 종묘에는 향악이 쓰이므로 오늘날에는 아악이 문묘악으로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