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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 역사를 편년체(編年體)로 기술한 책이다. 실록은 일시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노산군•연산군•광해군시대의 기록을 실록이라 하지 않고 일기라 한 것은 세 임금 모두 폐위되어 왕자의 칭호인 군으로 격을 낮추었기 때문이다. 다만 노산군은 숙종 때 복위되어 숙종 이후는 《노산군일기》를 《단종실록》으로 개칭하였다. 일기라 해도 내용과 사료적 가치는 실록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선조실록》 《현종실록》 《경종실록》이 2종류씩 있는 것은 당파싸움으로 인하여 새로운 실록을 편찬하여 수정•개수(改修)실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순종 실록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찬한 것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면 철종까지의 실록을 의미한다.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이 곧바로 실록의 편찬에 착수한 이후, 실록은 왕이 죽으면 다음 왕 때에 편찬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 또는 찬수청(纂修廳)을 설치하고 영의정이나 좌•우의정을 총재관(摠裁官)으로, 대제학 및 기타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수찬관(修撰官)으로 임명하고, 도청(都廳)과 1•2•3 내지 6방(房)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편찬자료는 <춘추관시정기(春秋館時政記)>와 전왕 재위 때의 사관(史官)들이 작성해둔 <사초(史草)>를 기본으로 삼고, 그 밖에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과 후세에는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자료로 삼았다. 이상의 기록들이 실록청에 모여지고, 1•2•3 각 방에서 편년체로 초초(初草)를 만들어 도청으로 넘기면, 여기서는 초초를 보완, 수정하여 중초(中草)를 만들었다. 이를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교열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정초(正草)를 만들고, 실록으로 확정•간행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실록의 기본자료로 특기할 만한 자료는 사관들의 사초(史草)이다. 춘추관 관직을 겸임한 관원이 모두 사관에 해당되지만 그 중에서도 예문관의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이 전임사관이었다. 이들 전임사관은 직위는 비록 낮았지만 청화(淸華)한 벼슬로 국가의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며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기밀사무 등을 직필하였다. 따라서 사관은 학식이 풍부할 뿐 아니라 강직한 성품을 지녀야 했으므로 문과 합격자 중 가문과 기개가 뛰어난 사람을 골라 선발했다.
사관이 현장에서 처음 기록한 문서를 사초라고 하였고 사관은 퇴근하면서 근무 중 기록한 사초를 춘추관에 납입하였다. 춘추관은 사초와 관련된 자료를 모아 한 달 단위로 묶어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었다. 제출된 사초는 극비성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전제왕권을 가진 왕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사초나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 등은 모두 물로 그 내용 글귀를 씻어 없앴다.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하는데, 실록편찬에 많은 양의 종이가 필요하기에 그 종이를 다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초 내용이 바깥으로 유출될 경우 필화사건 즉 사화(史禍)가 일어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완성된 실록은 궐내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전국에 설치한 사고(史庫)에 봉안하였다. 춘추관은 내사고(內史庫), 지방의 사고는 외사고(外史庫)라고 하였다. 태조 정종 태종실록은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사고에 등사본을 보관하였다. 《세종실록》부터는 정초본(正草本) 외에 활자본으로 인쇄•간행하여 각 사고에 1부씩을 보관하였다. 이렇게 사고에 보관하는 실록은 벌레와 습기에서 비롯되는 오손(汚損)을 막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바람과 햇볕을 쐬었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만들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에 의해 내장산으로 옮겨져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왜란이 평정되고 이 전주사고 실록을 바탕으로 실록간행사업을 일으켜 1603년부터 3년 동안에 《태조실록》에서 《명종실록》까지 13대 실록 804권 3부를 다시 출판하였다. 그 뒤 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재출판시의 교정본 1부를 합쳐 5부가 갖추어져 서울의 춘추관과, 병화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중과 섬을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사고를 신설하여 각각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인조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등으로 훼손된 것을 보수하거나 이전하여 실록은 정족산사고•적상산 사고•태백산사고•오대산사고가 남게 되었고, 철종까지의 실록이 출판할 때마다 4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되어 온전히 전하여 내려왔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흩어져 있던 내사고본(內史庫本)을 제외한 4개의 외사고본이 조선총독부의 명령으로 중앙에 한데 모여졌다. 오대산본은 도쿄대학에 기증되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소실되었다. 적상산사고의 실록은 구황궁(舊皇宮)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실록도난사건으로 낙질(落帙)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6•25 때 이것을 북한측에서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파스칼 백과사전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 문화>, 돌베개,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