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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훈련도감(訓鍊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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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訓鍊都監)

16세기 말 조선전기 군사제도인 오위(五衛)의 기능이 거의 정지된 상태에서, 그 대신으로 임진왜란중인 1593년(선조26) 8월에 설치된 것이 훈련도감이었다.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의 삼수병(三手兵)을 중심으로 하는 이것은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의 절강병법(浙江兵法)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후기 중앙 군사제도의 핵심이 되었다.
당시 유성룡의 주장으로 훈련도감군은 장번(長番)의 급료병으로 편성, 상비군화하여 용병제의 시초가 되엇고, 과거의 궁시(弓矢)중심의 편제를 포수(砲手)중심의 편제로 바꾸었다. 훈련과 조직도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에 따라 과거의 대부대단위의 전투형태에서 초(哨)단위의 소부대단위 전투형태로 전환되었다. 속오법은 부(部)-사(司)- 초(哨)-기(旗)-대(隊)-오(伍)로 연결되는 편제로, 대략 120~125인의 병력이 군사조직의 기본단위인 초를 이루었다.
훈련도감의 지휘부는 의정(議政)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 병조, 호조판서가 겸하는 제조(提調)의 자문아래 대장(大將,종2품) 1인, 중군(中軍) 1인, 별장(別將)3인, 파총(把摠)6인, 종사관(從事官)4인, 초관(哨官) 34인으로써, 좌우 양부 6사 33초로 편제되었다. 특수군으로 권무군관(勸武軍官), 별무사(別武士), 국출신(局出身), 무예별감(武藝別監)이 있었고, 군사훈련과 행정을 담당하는 구관, 별군관, 도제조군관, 약방(藥房),침의(鍼醫), 기패관(旗牌官)등과 표하군(標下軍) 2000인이 있었다.
대략 5000여인 내외의 군총(軍摠)을 유지해 온 훈련도감은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과 함께 3군영으로 불리면서 본래 임무인 수도방위와 국왕호위의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 때의 모습이 속대전(續大典)에 잘 나타나 있다. 별다른 변화없이 지속되어 온 훈련도감은 1881년(고종18) 신식군대 조직인 별기군(別技軍)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