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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시흥행궁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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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행궁 도착

1795년 음력 윤2월 9일 저녁 시흥행궁에 도착하다.

노량에서 음식을 들고 휴식을 취한 후 오초(午初) 2각(11시 30분 경)
시흥행궁으로 가기 위해 혜경궁께서 가마를 타시고 나오시면 좌통례는 무릎을 꿇고
정조임금께 천막에서 나오시기를 아뢰면, 정조임금은 군복을 갈아 입고 나오신다.
정조임금께서 나오시면 좌통례는 무릎을 꿇고 말에 오르시기를 청한다.
정조임금께서 말에 오르시면 좌통례는 무릎을 꿇고 출발하시기를 청한다.
혜경궁과 정조임금께서 나오시면 배종백관들은 예를 갖추고 절을 올린다.
차례대로 시위한다.

용양봉저정을 떠나
만안현
장생현(지금의 장승백이 고개)
도화참발소전로(지금의 상도동길)
번대방평(지금의 동작구 대방동)
문성동 전로(지금의 시흥대로)
정조임금은 문성동 앞길에서 행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 혜경궁가마 주변에 청포장을 치라고 명령한 다음 정리사가 건네 준 미음다반을 직접 들고 가서 혜경궁께 올렸다.

혜경궁께 올리는 미음다반은 화기로 3기를 올렸다. 미음 1기는 대추미음이다. 중로에서는 백미음으로 한다.
그리고 고음 1기의 재료는 양·전복·묵은닭·홍합을 사용한다. 정과 1기는 산사·모과·유자·동아·배·생강·전약으로 한다.

행차는 문성동을 떠나 이날 밤 유숙지인 시흥행궁에 도착했다.

정조임금께서 시흥행궁에 먼저 도착하여 행궁을 둘러보시고 막차에서 나와 혜경궁을 기다리셨다가 모시고 내차로 들어가셨다. 뭇 신하들은 각자 숙소로 가고, 평상시와 같이 숙위(宿衛)하였다.

정조임금께서 시흥행궁에서 내리신 명을 적은 글이다.
전교하시기를,
"자궁을 모시고 본현(本縣)의 해우(?宇)에서 밤을 보내려고 하는데, 새로 건축한 방사(房舍)가 조용하고 편안하다. 이로써 보건대 지방관의 노고가 크다. 마땅히 표창이 있어야 할 것이니 시흥 현령 홍경후(洪景厚)를 삼품직(三品職)에 제수하고 수향(首鄕), 수교(首校), 수리(首吏)는 체가(帖加)를 성급(成給)하고 그 나머지 군교, 서리는 정리소로 하여금 차등을 두어 시상한 후 초기(草記)케 하라." 하셨다.
전교하시기를, " 우리 공부자(孔夫子)의 영정(影幀)을 화성(華城)에 타건(妥建)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저 많은 선비들을 거느리고 교궁(校宮)을 지악(祗謁)하여 사우(詞宇)를 삼가 우러러 뵈면 더욱 강한추양(江漢秋陽)의 생각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명일 어가가 화성에 도착하는날 종백(宗伯)을 보내어 작헌(酌獻)의 예를 체행(替行)할 일을 해조(該曺)에 분부하라. 제물은 경기 감사에게 연석에서 이미 하교하였으나 제관은 전적(典籍) 공윤항(孔胤恒)으로 대축(大祝)을 삼고, 내섬시관(內贍寺官) 공윤동(孔允東), 장용영 초관(壯勇營哨官) 공술조(孔述祖)로 재축(齋祝)을 삼아 그들로 하여금 향을 받게 하라." 하셨다. ……

또한 부대의 종류에 따라 각기 휴식처가 달랐다.
어가를 가까이서 수행하는 가후금군과 가전별초는 시흥 동구에서 좌우로 나누어 편한 대로 휴식하게 하였다.
선구금군과 난후금군은 동구 밖 조금 넓은 곳에 합병하여 휴식하게 하였다.

시흥참의 책임을 맡은 당상으로는,
호조판서 이시수, 장교 왕도원
실무자인 낭청으로는,
외빈인 홍대영과 장교 임복기가 맡았다.



참고문헌 :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전교 편 1795년 윤 2월 초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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