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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과거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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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종류

과거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던 제도로 조선 건국 후 과거제도는 보다 정비되었다.
조선 태조 1년(1392) 고려시대의 제술업과 명경업을 문과(文科)로 통합하였고, 사장(詞章) 보다도 경학(經學)을 중시하였다. 또한 무과(武科)가 태종 2년(1402) 문과와 함께 상설되어 양과를 통해 문무관료를 균형있게 선발하게 되었다.
태종 13년(1413) 이후 고려 과거제의 유풍인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폐지하고 다시관제(多試官制)와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의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정례화로 과거제가 중앙집권적 양반관료체제를 지탱하는 제도로서 변모하였다.
조선시대 과거에는 문과(文科)∙무과(武科)∙잡과(雜科)∙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등이 있었다. 잡과에는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 등 4과가 있었다.

문과

조선시대 문관(文官)을 선발하던 시험으로, 과거 중에서도 조선사회의 문치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문과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조선사회에서 고위 관료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문과에 급제하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를 통해서 지배층으로서의 권위와 가문의 지위, 그리고 경제적 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과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적인 특별 시험이 있었고 이는 각각 초시 ∙ 복시 ∙ 전시의 3차 시험으로 진행되었다.

과거응시자격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천인을 제외한 양인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인 가운데도 『경국대전』 규정에 보이는 영원히 관직에 나갈 수 없는 범죄자 뇌물을 받은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 또는 부도덕한 행실을 저지른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庶孼)의 자손들은 문과는 물론 생원진사시에도 응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제도적으로는 당대의 가치관에 의한 결격자들과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시험에 전념해야 하는 현실적 여건으로 주로 양반층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시험과목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천인을 제외한 양인 모두가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인 가운데도 『경국대전』 규정에 보이는 영원히 관직에 나갈 수 없는 범죄자 뇌물을 받은 장리(贓吏)의 아들, 재가(再嫁) 또는 부도덕한 행실을 저지른 부녀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庶孼)의 자손들은 문과는 물론 생원진사시에도 응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제도적으로는 당대의 가치관에 의한 결격자들과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3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시험에 전념해야 하는 현실적 여건으로 주로 양반층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품계

문과에 급제하면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의 성적과 급제 당시 본인의 지위에 따라 관직과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유학, 생원, 진사 등이 급제하면 장원급제자는 종 6품의 관직, 갑과 2, 3등은 정7품의 관직, 을과 출신은 정 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정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관인층이 문과에 급제할 경우 장원급제자는 본인의 품계에다 4계급,갑과 2, 3등은 3계급을과 출신은 2계급, 병과 출신은 1계급을 올려주도록 되어 있었다.

식년시와 특별시험

식년시는 자 ∙ 오 ∙ 묘 ∙ 유(子∙午∙卯∙酉)년을 식년으로 3년 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으로 33인을 선발하도록 정례화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특별 시험은 국가의 대소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행하는 시험으로 선발 인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외방별시(外方別試) ∙ 알성시(謁聖試) ∙ 정시(庭試) ∙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정규 시험인 식년시보다 특별 시험이 시행 횟수는 물론이고 선발 인원도 훨씬 많았다. 증광시를 제외한 특별 시험은 공고 기간이 짧기 때문에 지방 유생이 응시하기 어려웠고, 주로 서울에 거주하는 좋은 가문의 자제들이 많이 급제하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특별시험의 비중이 높아지는데 이는 문과가 기득권을 가진 양반 지배층과 밀착되어 운영되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식년문과에는 초시 · 복시 · 전시의 3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이 중 초시 · 복시는 초장 · 중장 · 종장으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이를 동당삼장(東堂三場)이라 하는데, 1일의 간격을 두고 시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편 비정규적인 특별 시험은 증광시를 제외하고는 1단계, 혹은 2단계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초시

조선시대 문과 ∙ 무과 ∙ 잡과 ∙ 생원진사시 등 각종 과거의 제1차 시험을 말한다.
고려 말 공민왕 18년(1369)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실시된 이후부터 문 ∙ 무과는 초시 ∙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잡과와 생원진사시는 초시와 복시를 거쳐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문과의 초시는 성균관과 한성부(漢城府) 및 각 도별로 실시하였는데, 이를 각각 관시(館試) ∙ 한성시(漢城試) ∙ 향시(鄕試)라고 불렀다.
관시는 문과에만 있던 시험으로 성균관 유생 중 원점(圓點; 성균관 출석일수) 300 이상인 자들에게만 보이는 초시이다. 한성시와 향시는 생원 진사시와 잡과에 모두 실시되던 시험이었다. 1차 시험인 초시에서 뽑는 인원은 관시 50명, 한성시 40명, 경상도 30명, 충청∙전라도 각 25명, 경기도 20명, 황해도∙평안도 각 15명, 강원도∙함경도 각 10명 등 모두 240명이었다.

복시(覆試)

조선 시대의 과거인 문과(文科) ∙ 무과(武科) ∙ 잡과(雜科) ∙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의 응시자들이 거쳐야 하는 제 2차 시험을 말한다. 회시(會試)라고도 한다.
복시는 서울과 지방의 초시에서 뽑혀 올라온 제1차 시험의 합격자들을 재시험하여 이들을 대상으로 33명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고려 공민왕 18 년(1369) 과거삼층법(科擧三層法)이 실시된 이후 문∙무과는 초시(初試) ∙ 복시 ∙ 전시(殿試)의 세 단계로, 잡과와 생원진사시는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따라서 복시는 생원진사시와 잡과의 최종시험인 동시에, 문 ∙ 무과의 최종시험인 전시의 전 단계에 해당되는 시험이었다.
문∙무과의 경우도 최종시험인 전시가 남아 있었지만, 전시에서는 석차만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급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시(殿試)

전시는 국왕의 친림(親臨) 하에 복시에서 선발된 문과 33인, 무과 28인의 합격자들을 재시험하여 등급을 결정하는 시험이었다. 이 시험에서는 부정을 저질렀거나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전시는 신하인 시관(시험관)이 쥐고 있던 급제 결정권을 국왕이 직접 장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왕권 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생원진사시

소과(小科)라고도 불리 우는 생원 · 진사시에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다.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에서 초시 · 복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각기 100인을 뽑아 생원 · 진사의 칭호를 주었다. 이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으로 원칙적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시험이 아니었다. 그 중에 하위직인 교도, 훈도, 참봉 등의 종9품 직에 제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은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생원이나 진사로서 문과에 급제하지 못한 경우에도 생원과 진사는 군역(軍役)이나 잡역(雜役)을 면제받았을 뿐 아니라 그 직함만으로도 향촌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인정받았다.

생원진사시 시험과목

고시과목은 생원시의 경우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정조 때 오경의 중에서 춘추의(春秋義)를 빼고 사경의만 시험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진사시의 경우는 부(賦) 1편, 고시(古詩) · 명(銘) · 잠(箴) 중 1편으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명 · 잠이 출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초시, 복시

시험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든다면, 생원∙진사시 초시는 상식년 8월 하순에, 복시는 식년 2월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생원 · 진사시 초시(1차시험) 에는 한성시(漢城試)와 향시(鄕試)가 있었다. 한성시는 서울 및 경기도의 수험생(경기도 수험생은 경기도의 향시가 폐지된 이후부터 응시하게 됨.)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시험장소는 대체로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으로 하였다. 향시는 8도에서 도단위로 실시하였다. 향시도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경기 ∙ 충청 ∙ 전라 ∙ 경상도는 좌 ∙ 우도, 평안 ∙ 함경도는 남 ∙ 북도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다만 인구가 적은 강원 ∙ 황해도만은 나누지 않고 한 곳으로하였다. 향시의 시취액수(試取額數,선발인원수)는 지역별로 달랐다.
생원∙진사시의 복시는 각종 초시에 합격한 유생들을 식년 2월 또는 3월 서울에 모아 다시 고시하는 것으로서, 생원∙진사 각 100인을 뽑았다. 복시 수험생들은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책을 펴놓고 강론하여 조흘강(照訖講, 일종의 강독시험으로 조회를 마쳤다는 명부)에 통과하고 난 후, 녹명소(錄名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어 양소(兩所) 시관들이 양소 합격자를 한 사람씩 맞바꾸어 가면서 등급을 매기되, 진사시 · 생원시별로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합격자 발표 후에는 생원 · 진사들에게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하였다.

무과

조선시대 무관(武官)을 선발하던 과거시험으로, 문과가 실시될 때마다 동시에 실시되었다. 문과와 마찬가지로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식년시(式年試)와 부정기적인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외방별시(外方別試), 알성시(謁聖試),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의 특별 시험이 있었다.

무과실시

식년시의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의 3단계 시험을 거쳐 28명을 선발하였다.
초시는 식년(子, 卯, 午, 酉에 해당하는 해)의 전해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의 봄에 실시되었다. 초시는 훈련원(訓練院)과 각 도별로 실시하였는데, 이를 각각 원시(院試)와 향시(鄕試)라고 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원시에서 70명, 향시에서 경상도 30명, 충청, 전라도 각 25명, 강원, 황해, 영안, 평안도 각 10명 등 모두 190명을 선발하였다. 2차 시험인 복시에서는 이들을 대상으로 식년 봄에 초시합격자를 모아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여 강서(講書)와 무예를 시험하여 28명을 선발하였다.
최종시험인 전시에서는 처음에 기격구(騎擊毬), 보격구(步擊毬)로 시험하였으나, 뒤에는 11기(技) 중의 1기 내지 2기로써 등급을 정하여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 등 모두 28명을 선발하였다.
한편 비정규적인 특별 시험은 증광시를 제외하고는 1단계나 2단계 시험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또한 선발인원도 차이가 많았다.
무과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이 증대되어 대량으로 선발하고, 문과와 별도로 무과가 단독으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 한꺼번에 1만여 명의 합격자를 내기도 하여 무과를 만과(萬科)라 하였다. 이에 따라 천민들도 만과에 진출하는 자가 많아지자, 결국 무과는 천시되어 사대부들의 자제들이 외면하기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자(庶子)나 천인(賤人)에게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무과시험과목

무과의 고시과목은 크게 강서(講書)와 무예(武藝)의 두 종류가 있었다.
강서는 복시에만 있는 시험으로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 『자치통감』,『역대병요 (歷代兵要)』,『장감박의 (將鑑博議)』, 『소학』, 『무경(武經)』중의 하나를 각각 희망대로 선택하여 『경국대전』과 함께 강론하여 시험을 보았다.
무예는 조선 전기는 목전(木箭), 철전(鐵箭), 편전(片箭), 보사(步射), 기사(騎射), 격구(擊毬)의 6기(技)가 있었으나, 후기는 유엽전(柳葉箭), 관혁(貫革), 조총(鳥銃), 편추(鞭芻)를 신설하고, 기사를 기추(騎芻)로 변경하는 한편 격구를 폐지하였다.
식년시, 증광시를 제외한 무과는 무예 10기와 강서를 합한 11기 중에서 1∼3기를 택하여 고시하였다.

무과품계

무과에 급제하면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의 성적과 급제 당시 본인의 지위에 따라 관직과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미사자(未仕者)가 급제하면 갑과 출신에게는 종 7품의 관직, 을과 출신에게는 종 8품의 품계, 병과 출신은 종 9품의 품계에 각각 제수하도록 규정되어 문과급제자 보다 한 등급 아래였다.

도시(都試)

조선시대 무사(武士) 선발을 위한 특별시험으로, 중앙에서는 병조와 훈련원의 당상관이 군사와 동반, 서반의 종 3품 이하관 또는 한량(閑良)을 선발하였다. 지방에서는 각 도의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중앙의 예에 따르되 그 도의 수령, 우후(虞侯), 만호(萬戶) 및 그들의 자제를 제외한 사람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무예 10기와 강서를 합한 11기로서 후에 강서의 강독 시험은 폐지되었다. 이 제도는 무재(武才)의 발굴과 동시에 무예를 진흥시키기 위하여 태조 4년(1395)부터 실시되었다. 세종 10년(1428) 에는 병조, 도진무(都縝撫), 훈련원에서 주관하게 되었다.
선발인원은 33인이며, 우등자에 대한 특전으로 재직자는 품계나 직급을 높여주고, 관리가 아닌 경우는 1등 한 자는 임용하고 2,3등은 대가를 지급하거나 갑사(甲士)로 편입시켰다.

잡과

고려∙조선시대 전문 기술관을 선발하던 과거시험이다. 기술관의 등용고시로서 역과(譯科:漢學 ∙ 蒙學 ∙ 倭學 ∙ 女眞學) ∙ 의과 ∙ 음양과(陰陽科:천문학 ∙ 지리학 ∙ 명과학) ∙ 율과 등의 네 종류가 있었다.
잡과 합격자는 예조인(禮曹印)이 찍힌 백패(白牌)를 받은 뒤 성적에 따라 7품에서 9품까지 차등적으로 제수되었다. 잡과에는 잡학생도(雜學生徒)나 전함기술관(前銜技術官) 및 7품 이하 관리로서 기술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문과에 비해 경시되어 양반자제들은 잡과를 기피하였고 일반적으로 기술관의 자제나 향리∙서얼∙양인 자제들이 주로 응시하였다. 특히 향리들은 세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잡과에 합격하면 향역(鄕役)을 면할 수 있었고, 교생이나 양인 자제들은 중인(中人)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통로로 잡과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술직은 점차로 기술관들에게 세습되어 가는 것이 통례였다.

역과

조선시대 통역관을 선발하던 잡과 시험으로, 역관은 중국 ∙ 왜 ∙ 몽고 ∙ 여진 등과의 외교에서 주로 통역을 담당하던 관인을 말한다.
기술관을 천시하던 조선의 양반관료사회에서 그래도 역관만은 상대적으로 우대를 받았다. 역과에는 한학(漢學) ∙ 몽학(蒙學) ∙ 왜학(倭學) ∙ 여진학(女眞學)이 있었다. 이 가운데 대명외교의 중요성 때문에 한학이 가장 중시되었다. 한학은 건국 초기부터 실시되었으나, 몽학은 세종 1년(1419), 왜학은 세종 23년(1441), 여진학은 문종 1년(1451)부터 실시되었다.
역과는 식년시와 증광시를 초시(初試)와 복시(覆試)만 실시하였다. 역과 초시는 사역원(司譯院)에서 주관하며 선발인원은 한학 23명, 몽학 4명, 왜학 4명, 여진학 4명과 향시(평안∙황해도)의 22명 등 모두 57명이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복시에서 한학 13명, 몽학∙왜학∙여진학 각 2명 등 모두 19명을 선발하였다. 복시는 사역원과 예조에서 공동으로 관장하였다.
역과 초시의 시험과목은 한학의 경우 사서(四書)를 책을 앞에 펴놓고 강론하여 성적을 사정하였고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직해소학(直解小學)』을 책을 펴놓고 뒤로 돌아 앉아 외웠으며, 『경국대전』을 한어(漢語)로 번역하게 하였다.
복시의 시험과목도 초시와 대체로 같았으나 오경(五經) 『소미통감(少微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 중에서 시험 과목으로 택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주었다. 그리고 몽학 ∙ 왜학 ∙ 여진학에는 강서시험(講書試驗)은 없고 전공 관련 서적의 사자(寫字)와 『경국대전』 번역을 시켰다. 각 과목은 성적에 따라 통(通), 약(略), 조(粗)로 채점하여 통은 2분(分), 약은 1분, 조는 반분으로 계산하여 분수가 많은 사람을 뽑았다.
역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백패(白牌)를 주었다. 역과 합격자는 성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1등에게는 종 7품, 2등에게는 종 8품을, 3등에게는 종 9품에 제수하였고,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1계급을 올려주었다. 다른 잡과의 1등이 종 8품에 제수된 것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역과 합격자들이 우대되었다.

의과(醫科)

의과는 고려시대 의업(醫業)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시대 의관을 선발하던 잡과 시험이다. 이 시험을 통하여 선발된 이들은 전의감(典醫監)∙내의원(內醫院)∙혜민서(惠民署) 등에 소속되었다. 다른 잡과와 마찬가지로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시행되었으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2단계로 선발하였다. 의과의 초시는 식년(式年) 전해의 가을에 실시하는데 전의감에서 주관하여 18명을 뽑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전의감과 예조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복시에서 9명을 선발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의과의 시험과목은 초시나 복시 모두 『찬도맥(纂圖?)』∙『동인경(銅人經)』∙『화제지남(和劑指南)』을 외우게 하였고, 『직지방(直指方)』∙『득효방(得?方)』∙『부인대전(婦人大全』∙『창진집(瘡疹集)』∙『태산집요(胎産集要)』∙『구급방(救急方)』∙『화제방(和劑方)』∙『본초(本草)』∙『경국대전』은 강론하게 하였다. 후기의 『속대전』에는 『찬도맥』∙『동인경』∙『직지방』∙『본초』∙『소문(素問)』∙『동원십서(東垣十書)』∙『의학입문(醫學入門)』∙『경국대전』등으로 변경되었다.
각 과목은 성적에 따라 통(通),약(略),조(粗)로 채점하였고, 의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백패(白牌)를 주었다. 합격자는 일단 전의감의 권지(權知, 임용대기중인 견습관원)로 배속되었고, 성적에 따라 1등에게는 종 8품, 2등에게는 정 9품을, 3등에게는 종 9품에 제수하였고,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1계급을 올려주었다.
조선 초기의 의과에는 양반 자제들도 응시하였으나, 점차 이들은 의과와 같은 잡학을 피하여 주로 서얼(庶孼)들과 같은 중인들이 합격하였다.

율과(律科)

조선시대 형조의 법률을 다루는 율관(律官)을 선발하던 잡과 시험으로, 율과는 조선 건국 초에는 없다가 뒤에 생겨나서 역과(譯科) ∙ 의과(醫科) ∙ 음양과(陰陽科)와 더불어 잡과 4과의 하나가 되었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시행되었으며, 합격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2단계로 선발하였다. 율과의 초시는 식년(式年) 전해의 가을에 실시하는데 형조(刑曹) 고율사(考律司)의 주관하에 18명을 뽑았고, 이들을 대상으로 복시에서 9명을 선발하였다. 복시는 형조와 예조에서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율과의 시험은 『대명률(大明律)』을 뒤로 돌아 앉아 책을 외우게 하였고, 『당률소의(唐律疏議)』∙『무원록(無寃錄)』∙『율학해이(律學解이)』∙『율학변의(律學辨疑)』∙『경국대전』 등을 책을 펴놓고 강론하게 하였다. 초시와 복시 시험과목은 동일하였다.
각 과목은 성적에 따라 통(通), 약(略), 조(粗)로 채점하였고, 율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백패(白牌)를 주었다. 율과 합격자는 일단 형조의 권지(權知, 임용대기중인 견습관원)로 배속되었고, 성적에 따라 1등에게는 종 8품, 2등에게는 정 9품을, 3등에게는 종 9품에 제수하였고,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1계급을 올려주었다.

음양과

조선시대 관상감(觀象監)의 기술관을 선발하던 잡과 시험이다.
고려시대 지리업(地理業) 등의 잡학(雜學)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천문(天文), 지리(地理),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候), 각루(刻漏)등의 일을 맡는 기술관을 뽑는 시험이다. 음양과는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으로 구분되어 관리를 선발하였다.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시행되었으며, 합격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의 2단계로 선발하였다. 음양과의 관상감에서 주관하여 천문학 10명, 지리학∙명과학 각 4명 등 모두 18명을 뽑았다. 이들을 대상으로 복시에서 천문학 5명, 지리학∙명과학 각 2명 등 모두 9명을 선발하였다. 복시는 관상감과 예조에서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음양과의 시험과목으로 천문학은 『보천가(步天歌)』∙ 『경국대전』, 지리학은 『청오(靑烏)』∙『금낭(錦囊)』∙『호순신(胡舜申)』∙ 『명산론(明山論)』∙『지리문정(地理門庭)』∙ 『감룡(?龍)』∙ 『착맥부(捉?賦)』∙『의룡(疑龍)』∙『동림조담(洞林照膽)』∙『경국대전』, 명과학은 『원천강(袁天綱)』∙『서자평(徐子平)』∙『응천가(應天歌)』∙『범위수(範圍數)』∙『극택통서(剋擇通書)』∙『경국대전』 등을 시험하였다.
음양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백패(白牌)를 주었다. 음양과 합격자는 성적에 따라 1등에게는 종 8품, 2등에게는 정 9품을, 3등에게는 종 9품에 제수하였고, 이미 품계를 가진 자에게는 1계급을 올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