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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과거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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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시험

과거응시자격

조선시대 과거응시자격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 천인 계통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을 뽑는 문과나 그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진 생원, 진사시, 무신을 뽑는 무과에는 사족(士族), 즉 양반신분이 아니고는 현실적으로 응시하여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즉 중죄인의 자손,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자, 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현직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하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의 응시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한 재가녀(再嫁女) 및 행실이 바르지 못한 부녀의 자손과 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의하여 서얼(庶孼)은 영원히 금고되어 문과나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명종 8년(1553) 양민 출신의 첩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자격을 주었고, 인조 3년(1625)부터는 천첩(賤妾)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응시가 가능하였다.

과거시험절차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 등을 제외한 과거시험의 수험생은 시험 전에 녹명소에 녹명을 하여야 하였다. 수험생들은 녹명소에 먼저 자신의 성명 · 본관 · 거주와 부 · 조 · 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 · 성명 · 본관을 기록한 4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하였다. 이를 접수한 녹명관은 수험생의 결격사유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 녹명책에 기입하고 명지(名紙, 試紙:시험지)에 답인(踏印)한 뒤 시험 장소를 배정하여 주었다. 수험생은 시험지 머리에 본인의 관직 · 성명 · 연령 · 본관 · 거주, 부 · 조 · 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 · 성명 · 본관을 다섯 줄로 쓴 다음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하였다. 이를 피봉(皮封) 또는 비봉(秘封)이라 하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험지인지 알아볼 수 없게 이름을 가리는 것을 봉미법(封彌法)이라 하였다.
그리고 시험지의 피봉과 제문(製文)을 분할하여 제문을 서리(書吏)에게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는데, 이를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는 문과 중 식년시 · 증광시 · 별시에서만 하고, 친림과인 알성시 · 정시 · 춘당대시 및 생원 · 진사시에서는 하지 않았다. 역서가 끝나면 본초(本草:본시험지)와 주초(朱草: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를 대조하여 틀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고 주초만 시관에게 넘겨주었다. 시관은 주초를 가지고 채점하여 과(科:갑 · 을 · 병과)와 차(次:제1인 · 제2인 · 제3인)를 정하였다. 합격된 시험지는 본초와 주초를 일일이 대조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한 뒤 발표하였다.

시관(試官) 제도

조선시대의 시험관제도는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수(復數)시관제가 시행되었다. 시관은 그 기능상 크게 고시관(考試官), 감시관(監試官), 차비관(差備官)으로 분류된다. 고시관은 다시 해당과시의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상시관(上試官) 도는 주문고관(主文考官)과 그를 보좌하는 참시관(參試官) 2인으로 구성된다. 친림시(전시)에서는 이들의 명칭이 독권관(讀權官 3인, 2품 이상 관원) 및 대독관(對讀官 3~5인,3품 이하관원)으로 바뀌며 그 인원수도 증원되었다.
고시관의 임무는 소정의 절차에 따라 출제를 하여 시험을 과하고 과장의 질서를 유지하며, 답안을 채점하여 합격자를 발표하는 일이다. 감시관의 임무는 시험부정을 적발하는 일이며,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차출된다. 차비관이란 입문관(入門官), 금란관(禁亂官), 수권관(收券官), 등록관(謄綠官), 봉미관(封彌官) 등, 여러 관사에서 차출되어 시험에 종사하는 관원들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잡과와 무과는 시관이 고정되어 있고 문관의 시관은 시험이 시행될 때마다 달라지면서 추가사항이 많은 편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관제도는 시관의 권한을 분산시키고 선발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급제자로 하여금 시관에게 사적으로 은혜를 입었다는 의식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도였다. 고려시대 좌주문생(座主門生) 관계에 의한 시험관 제도가 갖는 고시관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신 전시(展試)등의 과거 3층법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