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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혜경궁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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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홍씨

한중록
한중록(閑中錄)의 개요

1795년(정조19)년 혜경궁 홍씨가 엮은 회고록으로 모두 4편이다.
제1편은 혜경궁의 환갑 해(1795년)에,
나머지 세 편은 1801년(순조1) ~ 1805(순조5) 사이에 쓰여졌다.

필사본 14종이 있으며, 국문본, 한문본,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사본에 따라 [한듕록], [한듕만록], [읍혈록(泣血錄)]등으로 불린다.
네 편의 종합본은 [한듕록], [한듕만록]의 두 계통 뿐이다.


[한중록]은 역사적 인물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이 노론가문의 딸로서 일정한 정치적 입장과
역할을 하였던 세자빈이었다는 점에서,
정계야화로서 역사의 보조자료이고,
임오화변의 이유 및 홍봉한일가에 대한 사관을
재검토하는데 도움을 주는 실기문학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류문학, 특히 궁중문학이라는 점에서
궁중용어, 궁중풍속 등의 보고라 할 수 있다.

[한중록]은 문장이 사실적이고 박진감이 있으며,
유장한 문체는 옛 귀인들의 전아한 품위를 풍기고
경어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작자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가운데서 전통사회의
규범적인 여인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는 점 등으로 고전문학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저술의 배경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처음 저술한 정조19년(1795)은
시파와 벽파의 대립이 심각하게 전개되면서
정국이 요동치던 시대였다.

이런 심각한 정치 상황은 1793년 경상도지역 남인 1만 여명이,
[영남만인소]라고 하여,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처분을
재해석하여 사도세자의 의리와 효성을 천양하자고 주장하는
연명상소를 올리면서 비롯되었다.

두번째 저술시기인 1801년은
정조 사후 벽파의 환국에 이은 시파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한 때이다.

당시 혜경궁은 벽파의 공격으로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친척이 유배당하는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후일 손자가 자라면 자기 집안을 신원해 주길 기대하는
바람으로 증거이자 호소문 성격의 글을 썼다.

이때의 기록은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반대파를
불구대천의 원수로까지 여기는 격렬한 감정이 드러나있다.

한중록의 내용

제1편은 작가가 환갑이 되던 해에 조카 수영(守榮)의 요청으로 집필된 것으로,
이 시기는 한많은 생애 중에서 아들 정조의 효성으로
그래도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과거의 아픔을 담담하게 돌아볼 수 있는 때였다.

친정 가문과 집안의 생활범절, 출생에서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궐할 때까지 이야기, 그 후 50년간의 궁중생활을 회고한다.

그러나 남편 사도세자의 비극은 의식적으로 핵심을 회피하며
후반부에는 정적들의 모함으로 아버지 홍봉한, 삼촌 홍인한과
동생들이 화를 입게 된 전말을 기록하였다.

제 2편부터는 67세인 1801년 동생 홍낙임(洪樂任)이 천주교 신자라는
죄명으로 사사(賜死) 당한 뒤에 쓴 글이다.

정조가 외가를 미워한 까닭은 화완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고 한다.
또 친정에 치명타가 된 홍인한사건의 배후에는 홍국영의 개인적인 보복이
보태졌다며 홍국영의 전횡과 세도를 폭로한다.

끝으로 동생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음을
새로 즉위한 손자 순조에게 밝히고 있다.

제 3편은 그 다음 해에 쓰여진 것으로 2편에서 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순조에게 자신의 소원을 풀어달라고 애원한다.
정조의 효성이 지극하여 그가 즉위 초에 외가에 대해
한 일을 뉘우치면서 갑자년에 외가에 대한 처분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한다.
거듭 친정 집안이 무고하게 화를 입은 것이 하늘의 이치에 어긋난다고 하였다.

제4편은 정순왕후가 돌아간 해에 기록한 것으로 사도세자의 참변을 알리고 있다.
동궁나인, 선희궁, 화완옹주 등으로 인해 영조와 사도세자 간에 사이가 멀어졌고
사도세자가 말년에 정신병이 깊어 영조의 처분이 부득이한 처사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홍봉한은 도의적인 책임뿐 아니라 뒤주를 바쳤다는 혐의를 받은 것은
억울하다며 결백을 주장한다.
작자가 차마 말하고 싶지 않은 궁중비사를 폭로한 것은
아버지의 결백과 친정의 신원을 위한 것이었다.

경의왕후

1785(영조11)~1815(순조15)
조선시대 영조의 아들인 장조(莊祖:사도세자)의 비(妃)로 혜경궁 홍씨이다.
본관은 풍산 이고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영조20)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762년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惠嬪)으로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가 혜경(惠慶)으로 올랐고 1899년(광무3)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자 함께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저서 [한중록(閑中錄)]은 사도세자의 참사(임오화변)를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한 기록으로 궁중문학의 효시로 평가되고 있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 가계도
홍봉한(洪鳳漢)

본관은 풍산,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시호는(翼靖), 사도세자의 장인이다.

1735년(영조11)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참봉, 세자익위사세마 등을 지내고,
1743년 딸이 세자빈(惠慶宮洪氏)으로 간택된 뒤 이듬해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다.

1745년 광주부윤에 특진되고 1749년 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계속 승진하여
다음해 어영대장,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를 지낸 후

1752년 경연동지사,
1753년 비변사 당상으로 [임진절목(臨津節目)]을 찬진하였다.
1761년 세자의 평양원유사건으로 인책당한 이천보, 민백상 등이 자결하자
우의정에 발탁되고 좌의정을 거쳐 돈녕부판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사위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전후하여 오히려 여러 대신들과
뱃놀이를 하던 점에서, 줄곧 노론의 입장을 견지해 온 홍봉한이 노론에
적대적이고 소론에 호의적이었던 세자의 죽음을 조장 또는 묵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그의 입장은 노론, 소론, 부홍파, 공홍파.
또는 시파, 벽파간의 당쟁이 격화되는 단서가 된다.

영조가 세자의 죽음을 바로 뉘우치고 세자에게 시호를 내리자
정순왕후의 친척으로 세자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초래한 김구주(金龜柱)파를
탄핵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수의편(垂義篇)]을 찬술,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적어 정적인 벽파탑안에 이용했다.

1763년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시무육조를 건의하고 백골징포와 환곡작폐의 엄금, 은결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였다.

1771년 벽파가 세손(正祖)을 위협할 때 이를 막다가 삭직되어
청주에 부처되었으나, 홍국영의 수습으로 시파가 승리하여 풀려난 뒤
봉조하가 되었다.

저서에 [정사휘감(正史彙鑑)], 편저에 [익익재만록 (翼翼齋漫錄)],
글씨에 [어정홍익정공주고(御定洪翼靖公奏藁)]가 있다 .

사도세자의 참사(임오화변)

사도세자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크게
(1)영조와 사도세자의 성격적 차이와 갈등을 강조하는 '정신병리학적 접근'
(2)영조시대의 정치상황 및 세력관계를 중시하는 '정치구조적 접근'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대체로 (1)은 영조의 강박증과 자식에 대한 치우친 애증관계,
사도세자의 소심증과 "의대병(衣帶病)"(옷갈아 입기를 무서워 함)을
강조하는 시각으로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에 대해 (2)는 정치적 의리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영조의 입지,
사도세자의 실덕비행 문제로 인한 정당성의 훼손,
영조와 세자 사이의 정치적 입장차이, 정치세력 간의 권력투쟁 등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정조가 쓴 "현륭원지문"과
남인들의 "영남만인소"에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