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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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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궁중연향악
조선시대의 악(樂)

조선의 임금은 유교의 정치이론,
곧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개념에서 나온 교화군주(敎化君主)였다.

자기 자신을 닦고 나서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는 이 원칙은
학문과 도덕을 닦아야 관료가 될 수 있다는 신하들 뿐만 아니라
혈통에 의거해 통치자가 되는 군주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즉, 성리학자의 이상은 모든 사회구성원이 더불어 살 수 있는
대동사회(大同社會)를 구성하기 위해 학문을 통해 닦은
도덕과 의리를 사회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교화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정치와 형벌은 예(禮)와 악(樂)을 우선시 했으니,
정치와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법망을 피할 뿐
양심에 비추어 볼 줄 모르나, 예와 악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양심에 비추어
부끄러워 할 줄 알아 성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예(禮)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로 공경손신(恭敬遜愼)을 근본으로 하고,
악(樂)은 사람의 마음이 자연적인 조화로 중정화평 (中正和平)을 위주로 한다.
따라서 조선 초기 문물제도의 정비에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법전 외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같은 의례서와 [악학궤범(樂學軌範)]같은 악서 및
음악제정이 포함되고 중요시 되었으며,
제례.조의. 연향 등의 예에는 악이 함께하였다.

궁중연향악의 변천

건국 초에는 고려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여,
고려에서 전래된 당악(정재포함)과 향악(정재포함)이 연주되는 것과 아울러,
[시경]의 시 및 새로 지은 악가(樂歌)가 당악 또는 향악에 얹어 불리고,
새로 만든 수보록. 몽금척. 근천정. 수명명과 같은 정재가 당악으로 반주되었다.

세종 중기에 아악이 정비되자, 연향에 전에 쓰던 음악의 비중이 줄고 대신 아악이 첨가되었다.
세종후기에 당악과 향악에 바탕을 둔 [정대업], [보태평], [여민락] 같은 신악이 창제되어
연향에 활발히 쓰이면서 아악이 쓰이지 않게 되었고,
고려 전래의 당악의 비중도 줄었다.

조선 후기에 당악의 비중이 건국 초에 비해 큰 폭으로 줄긴 했지만,
순조27(1827)년까지는 그래도 천년만세. 청평곡. 오운개서조. 하운봉.
태평년 보허자. 낙양춘 등 여러 곡이 연주되었다.

1828년 (순조28)부터 향당교주(향악기와 당악기의 혼성연주)라는 향악곡이
압도적으로 쓰이는 것과 더불어 당악곡이 점차 사라져
현재 보허자. 낙양춘 두 곡만 남게 되었는데, 이 두 곡 또한 향악화하였다.

이런 경향은 정재에도 나타나, 고려에서 전래된 당악정재인 헌선도. 수연장. 포구락 등과
조선에서 만든 몽금척.하황은 등이 조선 전기에 당악만으로 반주되었는데,
19세기에는 보허자령. 여민락령. 향당교주로 반주되고,
순조대에 창제된 20여종의 정재도 보허자령.향당교주.가곡선율로 반주되었다.

즉, 당악곡이 많이 사라지고 대신 향당교주와 가곡 및 신악이 그 자리를 채웠다.

향악(鄕樂)

전통 선율을 바탕으로 한 궁중음악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당악(唐樂)이 들어온 이후 전통음악을 당악과 구분하기 위하여
향악이라고 불렀다.


신라음악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 악지편에 실려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 음악은 주로 가야금 중심이었지만,
통일 이후 가야금에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과
당악기인 박판(拍板)까지 더하여 한층 다양해졌다.


고려의 향악에 대한 내용은 ≪고려사≫ 악지편에는 향악을 속악(俗樂)이라고 하였다.
고려의 속악은 통일신라에서 전승된 것과 고려조에서 새로 창작된 것이 있는데,
전승된 것으로는 신라 음악으로 [동경] 외 4곡과 백제에서 전승된 [정읍] 외 4곡,
고구려에서 전승된 [내원성] 외 2곡이 있고,
고려조에서 새로 창작된 음악으로 [정과정] 외 42곡이 있다.

또한 이 노래들 외에 당악정재의 대칭으로 향악정재가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향악정재는 향악을 반주로 하는 궁중무용을 의미하므로 향악의 범주에 든다.

고려는 송나라와 음악적 교류를 통해 속악뿐만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음악인 아악까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궁중음악은 향악, 당악, 아악의 삼각구도로 변한다.

조선시대의 궁중음악도 고려에 이어 향악, 당악, 아악으로 구성되나,
각 음악이 차지하였던 비중은 달라진다.
즉 당악의 비중이 컸던 고려에 비해 조선에서는 당악이 아악에 비해
비중이 오히려 낮아지면서 향악과 함께 우방악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이후 향악과 당악은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 받는다.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음악이 많이 제정되는데,
처음에는 고려에서 전승된 향악에 가사만 새롭게 붙여 부르다가
세종 때에는 향악과 고취악을 참작하여 새로운 곡을 만들었다.
그러한 곡으로는 [정대업], [보태평], [발상], [봉래의], [전인자], [후인자],
[치화평], [취풍형] 등이 있다.

고려에서 전승된 향악곡들은 조선조 초기까지는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후기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정석가], [한림별곡], [사모곡] 등 몇 곡만 남았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향악계통의 음악으로는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된
[정대업], [보태평]과 [여민락]과 그 파생곡들,
[영산회상], [수제천], [취타] 등이 있다.

[여민락]은 원래 당악계통으로 창작된 것이나 후에 향악으로도 연주되었다.


통일 이전의 신라 악기로는 가야금을 들 수 있다.
통일 이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악기 그리고 당악기까지 더하여
통일신라의 향악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즉 삼현(가야금, 거문고, 비파), 삼죽(대금, 중금, 소금), 박판, 대고(大鼓)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박판은 당악기이다.

고려의 속악은 신라의 향악기에 장구, 해금, 피리 등과 같은 외래 악기가 더 첨가된다.
조선조의 향악기는 당악기와 섞이게 되어 점점 그 구분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음악을 주도하는 악기인 피리만은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에는 향악, 당악으로 구분하기보다는 향피리 중심의 음악,
당피리 중심의 음악으로 두 음악의 계통을 구분하고 있다.


향악의 음악적 특징을 당악과 비교하여 간단하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당악에서는 박(拍)을 가사의 구(句) 끝에 치는데 반해,
향악에서는 박을 치지 않거나 또는 사용하는 경우 박을 구의 시작에 친다.
당악은 한문의 가사로 되어 있고 가사의 구 길이가 일정하며,
구의 끝에는 운(韻)이 있어서 그 끝이 분명히 구분된다.
그러나 향악의 우리말 가사는 일정하지 않은 구의 길이를 가졌고
구를 이루는 글자수도 일정하지 않아 그 끝을 구분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분명히 구분이 되는 시작 부분에 박을 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② 규칙적이고 단순한 리듬의 당악에 비해 변화가 많고 복잡한 리듬을 가졌다.

③ 가사에서 짝수의 구를 가진 당악에 비해 향악의 가사는 홀수의 구를 가졌다.

④ 악구의 길이가 일정한 당악에 비해 악구의 길이가 불규칙하다.

당악(唐樂)

통일신라 이후 고려시대까지 중국에서 수입된 음악의 통칭이다.
당나라뿐 아니라 통일신라 이후 우리나라 궁중에 들어온 속악(俗樂)을 지칭하는
용어로 우리나라 고유 음악인 향악에 대칭되는 음악이다.

당악이란 말은 ≪삼국사기≫에 "문무왕4년(664년) 3월에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웅진부성에 보내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는 기록에 최초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당악은 대부분 송나라의 음악이었다.
고려의 당악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그 중 하나는 노래와 춤, 연희의 음악(정재)으로 [헌선도],[수연장],[오양선],
[포구락],[연화대] 등이 있고,
다른 하나는 송나라의 사(詞)를 노래하는 음악으로 [낙양춘],[억취소],[월화청],
[하운봉],[취태평] 등 48곡이 있다.

단, 송나라에서 들여온 음악 중 제사음악인 아악이 있는데,
이 음악은 당악에 포함되지 않는다. 고려시대에 당악은 왼쪽, 향악은 오른쪽에 각각 편성되어 연주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서 음악을 새롭게 들여오기보다는 고려의 당악을 그대로 이어 받거나,
당악의 형식에 따라 새롭게 창작하였다.

세종 때는 아악을 혁신하여 왼쪽에 편성하고 당악을 향악과 함께
오른쪽에 편성하면서부터 당악은 향악화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당악이란, 향악처럼 변화된 당악과
조선에 새롭게 창작된 당악곡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 당악 형식에 따라 창작한 정재로는 [금척(金尺)], [수보록],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등
일곱 가지가 있다.

세종 때는 사라질 위기에 있던 당악정재인 [육화대], [곡파] 등 두 가지 춤을 재연하였다.
이들 아홉가지 중 [금척], [하황은], [육화대]등 세 가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조선 말기 순조 때는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
[제수창(帝壽昌)], [최화무(催花舞)] 등을 당악정재의 형식으로 새롭게 창작하였다.

고려에서 전래된 당악곡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노래로는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만이 있는데
이 곡들도 거의 향악처럼 변하여 당악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악 중 송나라 사악(詞樂)인 [보허자]와 [낙양춘]의 내용을 통해 그 특징을 보자면
첫째, 1절과 2절로 되어 있다.
둘째, 각 절은 4구로 되어 있다.
셋째, 한 구의 글자 수는 5, 6, 7자와 같이 불규칙하다.
넷째, 가사 한 구에 해당되는 선율의 길이는 모두 일정하고 그 끝은 길게 끈다.
다섯째, 한 구의 선율은 각각 2등분 되며, 2등분 되는 선율마다 박이 한번씩 들어간다.
여섯째, 2절은 1절의 첫째 구만 바꾸고 둘째 구 이하는 똑같은 선율로 반복한다.
이렇게 머리부분만 바꾸는 것을 환두형식(換頭形式)이라고 하고
반복되는 부분은 '돌아든다'는 의미로 환입(換入)이라고 한다.

아악

좁은 의미로는 고려 이후 궁중의식에서 사용된 음악 중 하나이며,
넓은 의미로는 민속음악에 대비되는 용어로 궁중음악의 총칭이다.

아악은 고려 1116년(예종 11)에 중국 송나라의 휘종이
대성아악을 보내줌으로써 시작되었다.

대성아악은 휘종이 이전에 있던 아악을 새롭게 개혁한 것이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아악은 즉시 태묘(太廟)의 제사에 사용된 이후 계속하여
원구(천신에게 지내는 제사), 사직(社稷 : 지신에게 지내는 제사) 등
다른 크고 작은 제사에도 사용되었다.

처음 들어온 시기인 고려 예종에서 의종까지는 대성아악이 비교적 원모습대로 연주되었으나,
그 이후 고려 명종 때부터 조선 세종 초까지는
악기와 의물이 많이 손실되어 음악과 의식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일부 변화된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조선 세종 때는 많은 연구를 거쳐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게 되는데
이때 대성아악을 복원하지 않고 그 이전에 중국에 있던 아악 즉,
주(周)나라와 당우(唐虞)시대의 옛 제도의 아악을 복원하게 된다.
따라서 고려의 아악과 세종 이후의 아악은 그 바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의 대성아악이 조선시대 아악의 기초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세종 때는 아악이 매우 융성하게 되어 제사뿐 아니라
조회악(朝會樂)과 회례악(會禮樂)으로도 사용되는데,
이 때를 아악의 전성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조 10년 이후에는 아악을 원래대로 제사에만 사용하고,
조회와 회례에서는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을 썼다.
또한 종묘의 제사에도 이때부터 아악 대신 향악을 쓰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에는 아악이 위축되어 그 규모가 현격히 축소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종묘와 문묘의 제사만 남고 다른 제사는 폐지되어
음악도 종묘악과 문묘악만 남게 되었다.

종묘에는 향악이 쓰이므로 오늘날에는 아악이 문묘악으로만 남게 되었다.

악곡
정대업

종묘제례악의 하나이다. 종묘제례의 아헌(두번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과 종헌(마지막으로 술잔을 올리는 절차)에 쓰인 악무(樂舞)이다. 원래 정대업은 세종이 조상의 무공(武功)을 찬미하는 내용으로 직접 창제하여 회례연의 음악(會禮樂)으로 사용하였으나, 이후 세조 때부터 지금까지 종묘제례악으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 규칙적인 장단의 음악이었지만, 지금은 불규칙적인 장단으로 연주된다. 현재 정대업은 모두 11곡으로 이루어졌는데, 소무. 독경. 턱정. 선위. 신정. 분응. 순응. 총유. 정세. 혁정. 영관 등이다. 정대업을 연주할 때 일무는 무무(武舞)를 춘다.

보태평(保太平)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음악이다.
종묘제례의 네번째 절차인 초헌(첫번째 술잔을 올림)에 보태평을,
그 다음 절차인 아헌(두번째 술잔을 올림)과 종헌(마지막으로 술잔을 올림)에는
정대업을 각각 사용한다.


보태평에는 희문, 기명, 귀인, 형가, 즙녕, 융화, 현미, 용광정명,
중광, 대유, 역성 등 모두 11곡이 있다.


일무는 문무(文舞)를 춘다.


보태평은 조상의 문덕(文德)을 칭송하는 내용인데,
세종이 조선초기 고취악과 향악과 같은 기존 음악을 기초로 하여,
회례연의 음악에 사용할 목적으로 창작하였다.
이후 세조 9년에 개작하여 종묘제례악으로 채택하였다.
이후 보태평은 용광장과 정명장을 합쳐 '용광정명'이라 하고,
새로 '중광장'을 추가하여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불규칙 장단으로 연주한다.

여민락(與民樂)

"백성과 더불어 즐기자"는 뜻의 곡명을 지닌 [여민락]은
조선 세종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은 본래 전체 125장의 [용비어천가]의 일부(1 . 2 . 3 . 4 . 125장)를 노래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현재는 가사 없이 관현악곡으로 연주되고 있다.

여민락은 15세기 이후 사신의 연향이나 임금의 거동 때 행악(行樂)으로 사용되거나,
상류사회의 지식층 사이에서는 거문고로 연주하기도 했다.
이후 여러 파생곡들이 생겨났는데,
향피리가 중심이 되는 관현악합주 여민락 .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관악합주 "여민락만(與民樂慢)" , "여민락영(與民樂令: 본령)" ,
"해령(解令)"의 네 종류의 여민락이 그것이다.

이 중 첫번째 "여민락"은 "승평만세지곡(昇平萬歲之曲)",
혹은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라고도 하는데,
"승평만세지곡"은 관악기 중심으로 연주할 때의 이름이고,
"오운개서조"는 현악기 중심으로 연주할 때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런 명칭은 모두 아명(雅名)으로 본래 음악의 이름은 여민락이다.

세종 당시의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제 1, 2, 3, 4장과
제125장의 사설을 전체 10장으로 구성된 선율에 맞추어 노래했는데,
기악곡으로 변화한 현재는 제1장에서부터 7장까지만을 연주한다.
한편 장단의 짜임새는 제1장부터 3장까지는 20박이 1장단으로,
제4장부터 7장까지는 10박이 1장단으로 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수석 피리 연주자는 다른 피리연주자들보다 한 옥타브 높게
연주하여 음악의 느낌을 장중하고 꿋꿋하게 이끈다.

음계는 황종 · 태주 · 중려 · 임종 · 남려의 5음 음계이다.


악기편성은 박. 장구. 좌고. 대금. 향피리. 해금. 아쟁. 가야금. 거문고. 당적 등이다.
보통 대규모 관현악 편성으로 연주한다.

여민락령(與民樂令)

여민락의 한 갈래이다. 당피리 중심의 관현악 합주로 연주한다.
줄여 "영"이라고도 하고, "본령(本領)"이라고도 하며,
최근에는 "태평춘지곡"이라는 딴이름을 쓰기도 한다.

본령이라는 명칭은 "본래의 영(令)"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인데,
이 곡에서 해령(解令)이란 음악이 파생된 후
상대적으로 본령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본래의 악곡명인 여민락령보다
해령과 구분되는 "본령"이라는 곡명을 더 보편적으로 사용한다.

여민락영은 세종 이래로 궁중의 행악(行樂) 및
연례음악(宴禮音樂)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에는 연주음악으로 감상되고 있다.

악기편성은 당피리가 중심이 되고,
당적 · 대금 · 해금 · 아쟁 · 방향 · 북 등으로 구성된다.

20세기 이후 무대용 연주음악으로 정착함에 따라
방향 대신에 편종과 편경이 첨가되어 편성의 규모도 더욱 확대되었다.

길을 가며 연주하는 행악이므로,
여민락만과 같이 각 마루(숨)의 길이가 불규칙하고,
리듬형태도 일정하지 않다.

여민락만(與民樂慢)

여민락 계열 음악의 하나이다.
여민락이 향피리 중심의 향악인데 반해,
여민락만은 당피리 중심의 당악이다.

여민락만을 줄여 "만(慢)"이라고 하거나,
"경록무강지곡(景無彊之曲)"이라고 한다.

본래는 왕이 출행할 때나 사신이 행차할 때,
길을 가면서 연주하는 행악(行樂)이었다.

현재는 행악의 기능이 사라진 채 감상용으로 연주하며,
당피리. 대금. 해금. 아쟁. 당적과 장구. 북(좌고)의 악기편성에
편종과 편경을 곁들이기도 한다.

전체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20세기 이후 다른 행악과 마찬가지로,
여민락도 본래 지니고 있던 기능을 잃고,
무대용 연주음악으로 정착하면서 음악편성의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지만,
여민락만이 갖는 본래적 기능 [행악(行樂)]의 기본 성격에 따라
매우 꿋꿋하고 장엄한 기풍의 곡이다.

천년만세(千年萬歲)

줄풍류에 드는 경쾌하고 화려한 3개의 모음곡이다.

첫째 곡은 계면가락도드리[界面加樂還入]로
계면선법으로 되어 있으며 8분의 12박으로 장수(章數)의 구별이 없다.

둘째 곡은 양청도드리[兩淸還入]로 평조선법에 들며,
8분의 12박, 7장 구성으로 되어 있고,

셋째곡은 우조가락도드리[羽調加樂還入]로 우조,
즉 평조선법에 들며, 8분의 12박자 7장 구성으로 되어 있다.

악기편성은 거문고 · 가얏고 · 해금 · 세피리 · 대금 · 단소 · 양금 · 장구 등의
세악(細樂)편성이며, 밝고 경쾌한 정악이다.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고려시대 및 조선 전기 당악정재에서 쓰인 반주음악의 한 곡명으로,
'오운개서조인자'라고도한다.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오운개서조인자는
당악 정재의 하나인 오양선과 연화대 연주 때
반주음악의 하나로 사용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조선 성종 때까지 전승되었다.


또 조선 초기에 창제된 당악정재 금척.근천정 등의
연주 때에도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이 반주음악은 조선 전기 이후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다만 오운개서조의 명칭이 조선 말기에
[여민락]의 현명(絃名)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보허자(步虛子)

보허자(步虛子)는 원래 고려 때 중국 송(宋)에서 들어온
당악정재 가운데 하나인 오양선(五羊仙)의 창사(唱詞:무희들이 부르는 노래)로
부르던 음악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왕세자의 거동 때
출궁악(出宮樂) 혹은 연향음악(宴享音樂)과
특히 궁중무용의 반주음악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점차 가사가 없어지고 우리 음악처럼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전하는 보허자는 관악합주(보허자)와
현악합주(보허사)의 두 갈래로 나누어 전승된다.


즉, 보허자는 관악합주로 연주하는 기악곡으로,
지금까지 연주되고 있는 당악(실제는 송나라 음악임)의 하나이다.

일명 "장춘불로지곡(長春不老之曲)"이라고도 하는데,
당피리가 중심이 되고, 해금. 대금. 당적 .당비파 .방향. 교방고 .박 등으로
편성하여 연주한다.


근래에는 당비파는 쓰이지 않고, 방향 대신 편종과 편경, 교방고 대신 좌고를
사용하며 여기에 아쟁을 더 편성한다.


현재 연주하고 있는 보허자는 원(原)보허자의 7장 가운데
1 3 4장에 해당하는 세 장만을 발췌하여 연주하는 것이며,
한 장단은 10박자의 느린 박자로 되어있고
1장과 2장 사이에는 대금의 짧은 연음이 있다.

낙양춘 (洛陽春)

조선시대의 궁중의식에서 사용하던 악곡의 하나로
당피리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관악합주곡이다.


고려시대 중국 송(宋)에서 들어온 사악(詞樂) 가운데 하나이며,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그 선율이 많이 변화하여 전해진다.
[고려사 악지] 당악조(唐樂條)에 가사가 실려 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악보 [속악원보]에는
두 곡의 낙양춘이 가사가 빠진 기악곡으로 변화되어 기록되어 있다.
권4에 기록된 낙양춘은 가사의 한 구(句)가 정간보(井間譜) 8행에 쓰여져 있고
절반인 4행마다 규칙적으로 박(拍)이 들어가지만,
권6의 낙양춘과 현행 낙양춘의 경우에는
장단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아 불규칙한 무정형(無定形) 절주로 연주된다.


악기는 당피리, 대금, 당적, 해금, 아쟁, 장구,
좌고, 편종, 편경 등으로 편성되며,


음계는 황종, 태주, 고선, 중려,임종, 남려,응종의 7음이다.


낙양춘의 음악적인 특징은 환두(換頭:첫머리의 선율이 바뀐다)와
환입(換入:다시 돌아간다) 형식이다.
그리고 곡의 속도가 느려서 가사의 내용은 애절하지만 음악은 장중하다.

유황곡(維皇曲)

세종 때 문소전(文昭殿). 연은전. 소경전 등
제향의 아헌(두 번 째 술잔을 올리는 절차)음악으로 연주하던 악장이었다.

이 곡은 고려 속악인 '풍입송'을 본따 만든 곡인데,
오늘날에도 연주하고 있는 곡이다.
불규칙 장단으로 연주한다.

악단
연주집단

조선조 궁정에는 전정헌가(殿庭軒架), 등가(登歌), 전정고취(殿庭鼓吹),
전후고취(殿後鼓吹), 전부고취(前部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 등의
여러 악대가 설치되었고
이외에 여령(女伶)이나 관현맹인(管絃盲人)의 악인를 별도로 두었다.

이들 악대의 역할은 명확하게 구별되어
의례나 연향의 성격 또는 격에 맞게 사용되었다.

전정헌가는 조회. 망궐례. 책례. 가례. 회례연. 양로연 등의
의례나 연향에 쓰였고,

등가는 주로 연향에 쓰였다.

이들은 조선 후기까지는 주로 외연에 쓰였고,
내연에는 관현맹인이나 여령이 쓰였다.

전정고취는 문과전시(文科殿試). 생진방방(生進放榜) 등의
의례에만 쓰였고 연향에는 일체 쓰이지 않았다.

전정헌가(殿庭軒架)

세종대에 의례와 연향에 아악을 사용하던 때는
아악기 중심으로 편성된 등가와 헌가가 주악을 담당였지만
문종. 단종대를 거치면서 세종대에 쓰인 아악은 점차 폐지되고
세조대에 이르러 향악 또는 당악이 의례와 연향에 본격적으로 쓰이게 되자,
주악을 담당하던 악대도 전정헌가로 변화하였다.

전정헌가는 세종 이후 출현하여 세조대에서 성종초에 이르는 기간에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조선 전기의 전정헌가는 관악기와 현악기를 모두 사용하는
관현편성의 형태이지만 후기가 되면서 현악기가 제외된다.

즉 숙종대부터는 건고. 삭고. 응고. 축. 어. 편종. 편경. 방향. 당적. 비파.
퉁소. 피리. 대금. 해금. 장고. 노래. 박으로 편성되어

성종대까지의 거문고. 가야금. 월금. 대쟁. 아쟁. 향비파 등의 현악기가
제외되며 이러한 악기편성은 20세기 초까지 유지된다.

등가(登歌)

고려나 조선 세종대에 예연에서 아악을 연주한 등가는
전상악(殿上樂)의 명칭이 쓰이지 않았으나,
세조 이후에는 예연을 행할 때 전상(殿上)에 진설되는 악대를
전상악(殿上樂) 또는 등가라 하였다.

전정헌가가 의례에 두루 쓰인 것에 비해 등가는
주로 연향에 쓰인 점이 특징이다.
이는 전정헌가가 대뜰 아래의 전정(殿庭에 진설되는 것과 구별된다.

등가의 악기편성은 박. 대쟁. 아쟁. 방향. 당비파. 향비파 현금. 가야금.
월금. 해금. 당적. 통소. 장고. 대금. 교방고 등이다.

이러한 형태의 등가는 모든 연향에 일률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연향의 성격과 격식에 따라 조절되었다.

곡연이나 사신연에는 규모가 이보다 작았다.
또 악기편성이 시대에 따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전기에 사용하던 월금과 대쟁이 빠졌을 뿐 조선 후기에도
관악기와 현악기를 모두 사용하는 형태를 보이며 이에 따라
정재반주의 형태도 조선조 내내 관학협주의 형태로 일관되었다.

전정고취(殿庭鼓吹)

조회보다 적이 낮은 조참에서 연주하였다.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에서 편종 · 편경 · 삭고 · 응고 · 건고 · 축 · 어 등의
악기를 뺀 작은 규모의 연주 편성이다.

전정고취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0인이 연주하던 전정고취 악공의 수가 26인으로 줄었다.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와 같이 고취악 [여민락령]과
당악 [낙양춘]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순조 기축년(己丑年) 『진찬의궤』에 의하면,
전정고취가 왕세자의 입전(入嚴) 때에 [정읍 만기]를
연주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본래 [정읍]은 [무고]의 반주에 사용된 음악으로 장단이 있는 음악이었으나,
이 음악이 전정고취에 연주됨에 따라
현행 [정읍]과 같이 장단이 없이 위엄 있는 곡으로 변하였다.

전후고취(殿後鼓吹)

조회를 행할 때 전정헌가가 정전(正殿)에 진설되고,
전후고취는 근정문 밖에 진설되어 의식에 따라 교대로 연주하였다.

전후고취는 국왕의 출궁과 환궁 때에만 연주하고
그외 정전에서 종친. 문무백관의 숙배하는 의식에서는
전정헌가가 연주하였고,
보허자. 여민락. 여민락만. 여민락령 등의 악곡이 사용되었다.

악기편성은 시대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대금. 피리. 퉁소. 당적. 비파. 장고. 교방고. 방향. 해금. 박 등이었다.

전_후부고취(前.後部鼓吹)

전후부고취는 임금의 각종 행렬 때에 수반되는 악대로
어가의 앞에 있는 전부고취,
어가의 뒤에 가는 후부고취 등으로 크게 나뉜다.

임금의 행악(行樂)으로 연주된 전후부고취의 음악은
『악학궤범』에 당시 50인의 악공이 맡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

그 악기편성은 당비파. 해금. 장고. 대금. 나발. 교방고. 방향. 피리. 박 등이지만
악대의 규모와 행렬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전후부고취에서는 [여민락령]을 연주하였는데
이 음악은 현행 [해령]과 같이 박자 없는 화려한 관악으로
현악 [여민락]과 다른 느낌을 준다.

장악원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및 무용에 관한 모든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이원(梨園).연방원(聯芳院).함방원(含芳院).뇌양원.진향원(匪香院).
교방사(敎坊司).아악대(雅樂隊)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초기의 전악서.아악서.관습도감.악학 등의
상설 음악기관이 통합되어 1470년(성종1) 이후
장악원으로 정비되었으며 예조에 소속된 독립기관이었다.


궁중의 여러 의식 행사에 따르는 음악과 무용은
장악원 소속의 악공. 악생. 관현맹. 여악. 무동들에 의하여 연주되었다.


악공은 장악원의 우방(右坊)에 소속되어
연향에 쓰인 향악과 당악을 주로 연주하였고,


악생은 좌방(左坊)에 소속되어
제례의식 때 사용된 아악의 연주를 담당하였다.


내연의 행사는 악공과 관현맹이 음악을 연주하였고,


무동과 여기가 정재를 추었다.


장악원의 모든 음악 행정은 문관 출신의 관원이 관장하였고,
악공과 악생 등의 음악 교육 및 춤 연주에 관한 일은
전악(典樂)이하 체아직의 녹관(祿官)들이 수행하였다.


이러한 장악원 전통의 일부가 현재 국립국악원에 전승되어 오고 있다.

악생(樂生)

조선시대 아악기관으로서 전악서, 장악원에서 의식음악과
의식무용을 전문적으로 담당하였던 음악인이다.


악생들은 장악원의 좌방 소속으로 있으면서 아악만을 연주하였고,
이들은 향악이나 당악을 연주하던 악공과 구분되었다.


악생들은 양인(良人) 중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에,
공천(公賤)중에서 뽑힌 악공보다 신분적으로 높았다.


주요임무는 궁중의 제례의식 거행때 등가의 노래와
문무. 무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성종 때에는 총 399명이었으나, 점차 줄어들어 영조대에 이르면
195명으로 개정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악생 중에서 부전악(副典樂). 전율(典律). 부전율.
전음(典音). 부전음. 전성(典聲). 부전성과 같은 잡직을 받기도 하였는데
이는 체아직이었으므로 장악원에서 1년에 네 차례씩 추천서로
이조에 보고하여 사령서를 받아갔다.

악공(樂工)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음악연주를 담당하였던
전문음악인 삼국시대에는 척(尺)이나 악생(樂生),
고려시대는 영인(伶人) 또는 공인(工人)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도 공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악공이라는 명칭은 장악원 좌방 소속으로 있으면서
아악을 연주했던 악생의 대칭어로 쓰였다.


악공들은 원칙적으로 공천(公賤) 중에서 뽑혔으나
양인 신분으로 악공을 원하는 사람은 될 수도 있었다.


장악원의 악공직은 모두 악공적에 올라 세습적으로 전승되었고,
50세 이후에야 악공적에서 벗어나 공역을 면제받았다.


악공의 수는 조선 후기에 줄어 영조 때에 446명으로 정하였다.


조선 후기의 악공은 그들의 봉족[奉足:국역(國役) 편성의 기본조직으로
정정(正丁)을 돕게 하던 제도]이 바치는 가포(價布)로 생활하였고,
큰 공을 세우는 경우 가자(加資)나 면천을 받았다.

여령(女伶;女樂)

악가무(樂歌舞: 악기연주, 노래, 춤)를 공연하는 여자 악인(樂人),
또는 그들이 공연하는 악가무를 일컫는다.

조선시대에 여공인(女工人), 여령(女伶), 기악(妓樂), 여기(女妓),
기생, 창기(娼妓,倡妓), 관기(官妓) 등도 여악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여기, 창기, 관기 등은 이들이 여악의 구성원이 되기 때문에
여악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여악은 서울 뿐 아니라 지방[외방]에도 두었는데,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여기[京妓]는
대개 외방여기(外方女妓) 중 재예가 뛰어나 뽑혀 올라온 자들이었다.

경기(京妓)는 악공과 마찬가지로 태평관 근처의 동리에 거주하면서
관습도감(후에는 장악원)에서 악가무를 익혔다.

외방에는 중국 사신과 왜의 사신 접대를 위해
그들이 경유하는 고을과 군사 위로 및 회유를 위해
변방 진지가 있는 고을에 여기를 두었다.

외연, 내연, 사객연(使客宴), 왕실의 소소한 연향, 사악(賜樂),
친잠, 중궁하례에서의 악가무 및 노상에서 올린 교방가요 등에서 활동했다.

이 중 여악이 필수불가결 했던 곳은 내연(內宴)과 궁중하례 및 친잠례였다.

내외가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남자악공들이 여성이 주축이 되는
의례에 들어가 연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여악이 조선조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던 여악 고유의 사회적 기능이다.

내연에서는 악기연주와 춤과 노래를 모두 여악이 담당했고,
그 외의 연향에서는 대개 악공의 연주에 맞추어 춤과 노래를 했다.


세종15년(1433)에 남녀유별을 위해 '내연에는 여악을 쓰고,
외연에는 남악을 쓰는 제도'를 만들었으나 정착되지 못하다가
인조 대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즉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 악가무를 전업으로 하는 장악원여기를 두지 않았고,
풍기문란을 막기 위해 내연애 임하여 의녀와 침선비를
여악으로 대신 쓰거나 임시로 외방여기를 뽑아올려 쓰고,
연향이 파하면 곧 외방으로 내려보냈다.

내연에도 연주는 여악과 관현맹인의 악기편성으로 되었으며
악공에 의한 악기편성보다 규모가 작았다.
외연은 물론이거니와 비공식적인 소규모 연향에 여악을 쓰지 않았고
사신연이나 사악(賜樂)에도 무동을 썼다.

관현맹인(管絃盲人)

조선시대 음악기관인 장악원 소속으로 있으면서 궁중의 잔치 때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던 소경음악인으로 관현맹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 세종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양인과 천민 출신이 있었으며 향악관현맹과 당악관현맹으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주로 궁중잔치 중 내연에서 여령과 함께 연주하였으며
관현맹인이 연주를 맡는 것은 고사악이라고 하였다.

악기
전통악기

전통음악의 악기는 대체로 향악기, 당악기, 아악기로 나눌 수 있다.
향악기는 삼현(가야금 거문고 비파), 삼죽(대금 중금 소금), 박판,
대고(大鼓), 장구, 해금, 피리 등이다.

이는 본래의 향악기에 당악기와 외래 악기 등이 첨가된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향악기는 당악기와 섞이게 되어 점점 그 구분이 어려워진다.

그러나 음악을 주도하는 악기인 피리만은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에는 향악 당악으로 구분하기보다는 향피리 중심의 음악,
당피리 중심의 음악으로 두 음악의 계통을 구분하고 있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는 당악으로 방향, 박, 교방고, 월금,
장구, 당비파, 해금, 대금, 아쟁, 당적, 당피리, 퉁소, 태평소, 등이 실려있다.

그 중 박, 장구, 아쟁은 향악에도 쓰였고,
교방고는 정재와 행진음악에 쓰이며,
월금과 해금은 당악에 분류되어 있지만 향악에만 쓰였다.

1116년에 들어온 대성아악기는 편종, 편경, 1현금, 3현금, 5현금,
7현금, 9현금, 슬, 지, 적, 소, 소생, 화생, 우생, 훈, 박부, 진고,
입고, 축, 어, 등 20여 종류이고
모든 악기는 중성과 정성을 한 짝으로 하였다.

조선 세종 이후 가종(歌鐘), 가경(歌磬), 관, 약, 부가 추가되고,
정조 무렵에는 특종, 특경과 포음(匏音) 악기의 대부분이 빠지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의 아악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건고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타악기의 하나로,
가죽으로 만든 북으로 북 중에는 가장 높다.

십자형의 호랑이 받침대의 발 가운데에 긴 기둥을 세우고,
이 위에 북면이 양 옆을 향하게 북통을 모로 뉘인 후,
이층으로 된 상여 모양의 방개를 올린다.

두 층의 방개에는 붉은 빛과 녹색 빛의 비단 휘장이 둘러있고 장식이 되어 있으며,
그 위에 날개를 펴고 나는 모양의 백로가 꽂혀 있다.

조선 초기에 전정헌가(殿庭軒架)와 회례연(會禮宴)의 헌가 등에
삭고, 응고와 함께 배치되었다.

삭고 한 번, 응고 한 번을 차례로 친 다음 축을 세 번 치고
건고를 한 번 치는 것을 세 번 반복하면 본격적으로 음악이 시작된다.

삭고

삭비라고도 하는데 시작을 성(盛)하게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엎드린 네 호랑이 등 위에 틀을 세우고 그 틀에 북을 건다.

틀 위 중앙에 해의 모양을 그리고 흰색을 칠하는 점이 응고와 다르다.
조회와 연향 때 대궐 뜰에 진설하여 건고는 중앙에
삭고는 서쪽, 응고는 동쪽에 두며 음악이 시작될 때 사용한다.

응고

마침을 조화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응비라고도 한다.
건고, 삭고와 함께 전정헌가(殿庭軒架)에 편성되었다.

응고는 삭고와 거의 같으나 틀 위에 달 모양을
그리고 붉은 색을 칠하는 점이 다르다.

먼저 삭고를 한 번 친다음 응고를 한 번 치고
고축삼성(鼓祝三聲)이 있은 후 합주를 시작한다.

편종

고정 음률을 가진 악기로 금부(金部)에 속하는 아악기로,
한 단에 8개씩 두 단의 나무틀에 16개의 종을 걸어 놓은 악기이다.

고려시대에 송에서 들어왔을 때는 정성(12율 4청성)과
중성(12율)이 있었으나 조선 이후 현재에 전하는 것은 모두 정성에 속한다.

편종은 중국에서 수입하여 썼으나
세종 때 경기도 남양에서 무늬가 아름답고 소리가 많은 경돌을 발견한 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들게 되었다.

16개의 종은 모두 크기가 같은데 두께가 두꺼워지면 소리가 높아지고
얇아지면 소리가 낮아진다.

제례에 쓰는 편종은 장식없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고
조회(朝會)나 연향(宴饗)에 쓰는 편종은 화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썼다.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 보허자, 낙양춘 등에 편성된다.

편경

고려시대부터 편종과 함께 사용한 아악기로서
돌로 만든 진귀한 악기이다.

세종 7년 경기도 남양에서 진귀한 경돌을 발견한 후
세조 8년 가을 부터 10년 여름까지 편경과 특경을 528매(33틀)나 만들었다.

기역자 모양으로 경돌을 깎아 만드는데
편종과 크기는 같으며 돌의 두께에 따라 음높이가 다르다.

편종과 같이 나무 틀에 16매의 경돌을 음률순으로 다는데
목사자(木獅子) 대신 백아(흰 기러기), 용두(龍頭) 대신 봉두(鳳頭),
색사유소(色絲流蘇) 대신 치미유소(雉尾流蘇),
가막쇠(加莫釗) 대신 홍승(紅繩)을 쓰는 점이 편종과 다르다.

문묘제례악, 종묘제례악과 관악합주인 보허자, 낙양춘, 유황곡,
정동방곡, 여민락만, 본령, 해령 등에 편종과 함께 편성된다.

방향

고정음률을 가진 금부(金部)의 타악기로 대표적인 당악기이다.

손바닥 넓이의 철현 16쪽을 2줄로 틀에 걸고
소뿔 망치로 쳐서 소리를 낸다.
철향이라고도 한다.

철편은 그 길이와 넒이가 모두 같고 두께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방향은 당나라의 중요한 악기로 공식적으로는 고려시대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편경과 편종을 대신하는 악기로 종묘제향에만 사용한다.

당적

가장 높은 음역을 연주하는 가로 부는 관악기이다.

황죽 또는 쌍골죽으로 만들며 취구 1개와 지공 7개가 있으나
제 7공은 사용되지 않는다.

음높이와 음넓이도 대금과 비슷하게 변하였으나
다만 선율의 장식음이 더 많다.

맑고 영롱한 음색과 약 2 옥타브 정도의 음역을 갖는다.

당악인 보허자, 낙양춘과 당악계 음악인 보태평, 정대업, 유황곡,
향악인 여민락, 정읍 등에 사용된다.

원래는 당악기였으므로 당악 음정을 가졌으며
성종 이후로 당적의 이름만 남았을 뿐 완전히 향악기화 하여 현재에 이른다.

당비파

당악기의 하나로 사현비파, 곡경비파라고도 한다.

서양의 만돌린과 비슷하며 4현 12주에 목이 밖으로 45도쯤 굽었다.
12개의 괘 중에서 제5괘까지는 4줄 모두 걸쳐 있고,
제6괘부터 8괘까지는 2줄(중현, 자현)이 걸쳐 있고,
제9괘부터 11괘까지는 자현만이,
제12괘는 무현만이 걸쳐 있다.

당비파로 당악을 연주할 때는 발목을 사용하고,
향악을 연주할 때는 가조각을 끼고 연주했다.

당비파는 행악에서 대금, 당피리, 해금, 장구와 함께 편성되었으나,
조선후기부터 악기만 전해질뿐 연주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복원 개량된 당비파가 연주된다.

퉁소

한자 발음으로는 통소이나 퉁소로 부르며 속칭 통애라고도 한다.

고려사에는 8구멍이었으나 악학궤범에는 청공을 더하여 9구멍이 되었다.
현재 아악에 쓰이는 퉁소에는 청공이 없어지고
민속악에 쓰이는 퉁애에는 청공이 있다.

퉁소의 음역은 D에서 F까지 두 옥타브 반에 이른다.


당악기인 퉁소는 고려시대에는 당악계 음악에 편성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종묘 영령전의 등가, 헌가, 전정고취, 연례악 등에
향악기, 아악기와 더불어 편성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퉁소는 향악에 맞도록 개량되었고,
종묘제향악이나 보허자, 낙양춘과 같은 당악계 음악에는 사용되지 않고,
향악의 독주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당피리

당악기의 한가지로,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문종 30년 대악관현방 (大樂管絃坊)에
당피리를 가르치던 필률업사를 두었고
예종 9년 송나라의 신악이 들어올때도
피리 20관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사 악지]의 당악기 조에 소개된 당피리는 9공이었는데
현재는 8공의 피리로 전해진다.

주로 당악계통의 음악에만 편성되어 보허자, 낙양춘, 여민락만,
여민락영, 정동방곡 보태평, 정대업 등의 연주에 중요하게 사용된다.

당악에 편성되던 다른 악기와 마찬가지로
황종(c')에서 청림종(b') 또는 청남려(a') 까지
한 옥타브 반의 좁은 음역을 갖는다.

해금

활을 줄과 줄 사이에 끼워 두 줄을 문질러 소리를 내는 악기로,
소리를 본따 깡깡이라고도 한다.

해금은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包), 토(土),
혁(革), 목(木)의 8음(八音)
즉 악기를 만드는 여덟가지 재료를 다 써서 만들고 8가지 음을 낸다.

고려 이후 관현합주나 관악합주 및 무용 반주에 중추적인 구실을 해왔다.

해금은 세악편성과 삼현육각 혹은 대풍류에 편성된다.
각각의 편성에서 해금의 음량 조절은 원산의 위치에 의한다.
즉, 음량이 작은 세악편성의 연주시에는 원산을 변죽에 놓고,
삼현육각, 대풍류와 같이 큰 음량이 요구될 때는 원산을 복판에 놓는다.

보허자, 낙양춘, 영산회상, 천년만세, 평조회상, 삼현영상회상,
수제천, 여민락, 염불, 타령, 굿거리, 산조 등에 사용된다.

박달나무 여섯조각의 단단한 판자쪽을 한쪽에 구멍을 2개씩 뚫어
한데 묶어서 만든 악기로 반대쪽을 양손으로 잡아 벌렸다가
급속히 모음으로써 맑은 충격음을 낸다.

신라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에는 당악과 향악에 고루 쓰였으며
문묘제례악과 같은 아악에도 쓰이고 있다.

박을 치는 사람을 집박(執拍)이라고 하는데 음악의 지휘자격이다.

[악학궤범]에 의하면 처음에 박을 쳐서 음악을 시작하고
약절에 따라 박을 치고 또 급히 쳐서 음악을 그치게 하며
모든 음악의 장단 곡절은 박의 소리에 따른다고 하였는데
요즘은 보태평, 정대업과 정재 반주에만
음악의 중간에 박을 칠뿐 대개의 경우 시작할 때 한 번 치고
음악이 끝날 때 세 번 침으로써 시작과 끝맺음을 지휘하는 법만이 남아 있다.

교방고

북면이 위를 향하게 하여 네 기둥이 달린 틀로 받친 악기로,
고려 예종 이후 중국에서 새로 들어온 악기로
조선시대 궁중의 속악에 널리 사용되었다.

행악 때는 틀 밑에 긴 장대 둘을 가로지르고
그것을 네 사람이 메고 걸어가면서 쳤으며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월금

공명통이 달처럼 둥글기 때문에 월금이라 하며
또한 완함 진비파 진한자라고도 불리운다.

고구려 삼실총의 벽화, 악학궤범, 일본 정창원에 보이는 월금은 모두 4현이고
무용총의 것은 5현이다.

중국에서는 목이 짧은 것을 월금, 목이 긴 것을 완함이라고 하였다.
원래는 당악기였으나 악학궤범이 이르러 향악에만 사용되었으며
연주 방법과 제작법은 당비파와 같다고 한다.

현재는 악기만 전해진다. 현재는 개량된 월금이 연주된다.

대쟁

손가락으로 뜯거나 퉁겨서 타는 악기로,
중국의 쟁은 13줄로 되어 있고, 대쟁은 15줄로 되어 있다.

오동나무판 위에 명주실로 만든 줄을 안족으로 받쳐 놓고 연주한다.
정악 가야금보다 조금 더 큰 대쟁은 저음악기로서,
무겁고 웅장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쟁은 중국의 속악에 쓰이던 악기로서
조선 성종 때까지도 당악에만 사용되다가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쟁

활을 쓰는 악기로 고려시대에는 당악에만 편성되었고
조선 초기 이후로는 당악과 향악에 함께 사용되었다.

국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에 속하는 현악기로 일곱줄이다.

공명통은 거문고와 같이 상자 모양으로 짜고
초상이라는 받침대 위에 올려 놓고 개나리의 껍질을 벗겨
송진을 칠한 활대로 문질러서 소리를 낸다.

조금 거칠지만 장엄한 음빛깔이 특징이다.
저음 악기에 속하므로 대편성의 관현합주시에 빼놓을 수 없다.

보허자, 낙양춘, 삼현영산회상, 동동과 같은
관악합주, 여민락, 평조회상 같은 대편성의 관현합주에 편성된다.

장구

허리가 가늘게 생긴 나무통의 양쪽에 가죽을 달아 놓은 악기로서,
왼쪽 가죽은 두꺼워서 낮은 소리가 나고,
오른쪽 가죽은 얇아서 높은 소리가 난다.

조이개(축수)를 움직여서 소리의 높낮이를 조정한다.

북편(소리가 낮은 쪽)을 치는 방법에는 손으로 치는 방법과
궁굴채로 치는 방법이 있다.

농악이나 사물놀이, 무용 등에서는 궁굴채를 사용하고,
그 외에는 대개 손으로 친다.

채편(소리가 높은 쪽)을 치는 방법에는 복판을 치는 방법과,
변죽을 치는 방법이 있다.

합주와 같이 큰 소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복판을 치고,
줄풍류, 독주등과 같이 작은 소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변죽을 친다.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관현합주, 가곡, 가사, 시조, 잡가,
민요, 무악, 산조, 농악 등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장단 악기 가운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장구

허리가 가늘게 생긴 나무통의 양쪽에 가죽을 달아 놓은 악기로서,
왼쪽 가죽은 두꺼워서 낮은 소리가 나고,
오른쪽 가죽은 얇아서 높은 소리가 난다.

조이개(축수)를 움직여서 소리의 높낮이를 조정한다.

북편(소리가 낮은 쪽)을 치는 방법에는 손으로 치는 방법과
궁굴채로 치는 방법이 있다.

농악이나 사물놀이, 무용 등에서는 궁굴채를 사용하고,
그 외에는 대개 손으로 친다.

채편(소리가 높은 쪽)을 치는 방법에는 복판을 치는 방법과,
변죽을 치는 방법이 있다.

합주와 같이 큰 소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복판을 치고,
줄풍류, 독주등과 같이 작은 소리가 필요할 경우에는 변죽을 친다.

삼국시대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관현합주, 가곡, 가사, 시조, 잡가,
민요, 무악, 산조, 농악 등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장단 악기 가운데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태평소

목관악기의 하나로 끝에는 동으로 만든 나팔모양의 동팔랑을 잇대었다.
호적(胡笛), 호적(號笛), 쇄납, 소이나, 쇄나, 철적, 날라리 등의 딴이름이 있다.

이 악기는 원래 회족(回族)이 쓰던 악기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군중(軍中)의 대취타,
종묘 제향악인 정대업 중 소무, 분웅, 영관 등에 쓰였으며
지금은 대표적인 향토악기로서 농악, 불교음악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거문고

오동나무판 위에 6줄(문현, 유현, 대현, 괘상청, 괘하청, 무현)을 명주실로 만들어 걸고
3줄(유현, 대현, 괘상청)은 16개의 괘 위에, 3줄(문현, 괘하청, 무현)은
3개의 안족 위에 얹어 놓고 술대로 밀거나 뜯어서 연주한다.


소점과 대점의 강약과 왼손의 장력에 의한 미분음으로 인하여 소리가 깊고 무거워
마성적인 악기로 여겨져 왔다.


거문고는 대편성의 관현합주인 여민락, 형조회상 등과
세악편성인 영산회상, 천년만세, 보허사 등과 산조 등에 사용된다.


거문고는 5세기 이전에 고구려에서 발생한 우리나라의 고유한 대표적인 악기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중국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내왔는데
그것을 왕산악이 본모양은 그대로 두고, 우리에게 맞도록 따로 만들어
새로 작곡한 곡조를 연주하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 하여
현학금이라 이름하고,
후에 거문고로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거문고는 통일신라 옥보고를 비롯하여
손명득, 귀금, 안장, 청장, 극상, 극종 이후로 널리 보급되었다.

향비파

5줄의 직경 비파로 처음에는 5괘이던 것이
조선시대에는 10괘로 변하였다가 현재는 12괘로 증가하였다.


거문고와 같이 술대로 연주한다.
향비파는 1930년대까지 사용되다가 음량이 작고,
음정이 불안정하여 그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통일신라 삼현 중의 하나인 향비파는
서역에서 고구려를 통하여 신라로 전해진 것이고,
신라에서 향비파라 이름한 것은 당비파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는 개량된 비파가 있다.

갸야금(가얏고)

손가락으로 뜯거나 퉁겨서 타는 악기로
가야금은 한자 어이고 가얏고가 원래의 이름이다.


오동나무판 위에 명주실로 만든 12줄을 안족으로 받쳐 놓고 연주한다.
가야금은 정악을 연주하는 정악가야금(법금, 풍류가야금)과
산조가야금의 두 종류가 있다.


정악가야금은 손가락으로 밀거나 퉁겨 소리내고,
산조가야금은 손가락으로 뜯거나 퉁겨 소리낸다.


가야금은 음빛깔이 가볍고 아름답기 때문에 여성적인 악기라 한다.


정악가야금은 여민락, 평조회상 등의 대편성 관현합주곡과
영산회상, 천년만세, 보허사 등의 세악편성에 사용되고,
산조가야금은 산조, 시나위 등에 사용된다.


현재 사용되는 가야금은 이 두 종류 이외에,
더 넓은 음역과 음빛깔을 구사하기 위해 개량된 가야금이 있다.

대금

취구 1개, 청공 1개, 지공 6개, 칠성공 5개로 되어 있으며,
일명 '젓대'라 불리우기도 한다.


대금은 정악용과 산도용 두 가지로 구분된다.
부드러운 저취, 청아한 평취, 갈대청(갈대 속껍질)의 진동을 곁들여
연주하는 역취 등 다양한 음빛깔을 구사하는 악기이다.


또한 관현합주시 조율의 역할도 한다.
정악용 대금은 청성자진한잎 등의 독주,
영산회상 등의 세악편성, 보허자, 낙양춘, 정읍 등의 관악합주,
그리고 평조회상과 같은 관현악곡 등 여러 편성에 사용되는 중요한 악기이다.


산조 대금은 산조, 시나위, 민요반주, 무용반주 등의 연주에 사용되며,
정악대금에 비해 관의 길이가 짧고 지공 사이의 간격이 좁아서
시나위 등의 반주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통일신라 삼죽의 하나이다.

향피리

겹혀로 된 세로로 부는 피리의 한가지로,
한자 발음으로는 향필률이나 보통 향피리로 읽는다.
일명 대피리 또는 사관이라 한다.


대나무로 관대를 만들고
해죽(海竹)의 껍질을 깎아 서(舌:reed)를 만들어 관대에 꽂고 분다.


음색은 어두우나 매우 시적이다.
지공은 8개이며 음역은 약 2 옥타브이고 음량은 크다.


전통 음악의 연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며
합주 음악, 대풍류, 무용반주 등에서 선율을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 악기는 이미 고구려시대에 사용되던 것으로 당시에는 소필률, 대필률, 도피필률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주로 아악에 사용되어 온 타악기로,
네모난 나무상자의 윗 부분에 원형의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나무 방망이를 내리쳐서 사용한다.

흰 칠을 한 '어'가 서쪽에 놓이는데 반하여 푸른 칠을 한 '축'은 동쪽에 놓인다.
문묘와 종묘에 사용되며 방망이로 상자 밑바닥을 세 번 친 후
북을 한 번 치는 것을 세 번 반복한 다음,
박을 한번 치면 음악이 시작된다.

대 위에 엎드린 호랑이 형상의 악기이다.
등줄기에 톱니모양으로 생긴 27개의 톱니가 있다.

'어'를 긁는 채를 견죽이라고 하는데
통대 끝을 9조각으로 갈라 만든다.

어는 서쪽에 놓여져 고려 이후 주로 제사음악에 사용되어 왔다.
호랑이 목덜미를 채끝으로 세 번 친 다음
등줄기의 톱니를 '드르륵'하고 세 번 내려 긁은 뒤 박을 세 번 치면 음악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