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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기신우대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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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신우대정책

기로소나 치사제와 사궤장제는 일반 노인 대상이 아닌 벼슬을 지낸 노인들에 대한 경로의 예였다. 특히 그 대상이 되는 노인들은 정2품 이상의 고관직을 역임하였거나 현직자 가운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기신들이었기 때문에 일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단순한 경로책과는 다른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기로소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로 기소(耆所), 기사(耆社)라고도 하였다. 기(耆)는 나이가 많고 후덕하다는 뜻으로 나이 70이 되면 기,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기로의 모임은 중국의 당. 송시대부터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신종. 희종 때 최당 등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소요자적을 목적으로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한 것에서 비롯되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 태조가 60세에 기영회에 들어가 전토와 노비와 염분을 하사하였듯이 구성인원의 성격상 국정 운영에 대한 의결 및 자문역할을 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 태종은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를 따로 설치해 기로들을 이 곳에 귀속시키면서 개국 공신으로서 기득권을 갖고 있던 기존의 기로회의 의결권을 제거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세종 때 치사기로소로 명칭을 바꾸고 줄여서 기로소라고 하며, 원로자문기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기로소 구성인원

원칙적으로 문과출신의 정2품 이상 전.현직 문관으로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며, 이들을 기로소 당상이라고 하였고 인원의 제한은 없었다. 음직이나 무관직은 들어갈 수 없었으나, 정 2품 이상의 실직관원 중에서 70세 이상이 없을 때 종2품 관원 중 1, 2인을 선임하여 참여하게 하였다. 왕으로는 태조는 60세, 숙종은 59세,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각각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관리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모두 7백여인이었다. 소속관원으로 수직관(守直官) 2인을 두어 승문원과 성균관의 참외관(參外官)으로 임명하였다. 그 밖에 서리 2인, 고직 1인, 사령 4인, 군사 1인을 두었다.

기로연(耆老宴)

기로소에서는 군신이 함께하는 기로연을 베풀고 기신(耆臣)들의 초상을 그려 봉안하거나 각종 귀한 물건을 하사하여 기신들을 배려하였다.
기로소에서는 군신이 함께 하는 연회에서 경전을 강독하고 연회가 있을 때마다 군왕은 기신에게 귀한 물품과 음식을 하사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 매년 3월 3일 , 9월 9일에 기로소의 기신들을 위한 기로연을 보제루에서, 종친으로 70세에 2품 이상인 자와 정1품관, 경연당상관을 위한 기영회를 훈련원에서 개최하였다. 성종대 이후 두 연회는 구분이 모호해지고 기영연으로 통합되었다. 이런 연회에는 왕이 술과 음식과 풍악을 내리고, 귀한 물품을 하사하였다. 기로정책의 일환으로 왕명에 의하여 기신들의 초상을 그려 기로소에 봉안하게 하였는데, 이는 상당한 영예로 여겨졌다. 또 노인에 대한 혜양적 차원에서 사물(賜物)이 행해졌다. 이는 매월 떠는 절기나 계절. 생일. 회방(과거급제 60주년). 회혼 외에 자손이나 외손들의 과거비용 및 조상의 시호연(諡號宴)물품, 기로소당상과 그 부인의 부의까지도 내려주었다. 물품으로는 노인에게 필수적인 죽미나 의료비는 매월 지급하고, 쌀 등의 주식과 의복, 과실, 세찬, 해초류, 역서나 백지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수요품, 각종 연회비와 부의까지 지급하여 기신을 배려하였다.

치사제(致仕制)

1품에서 6품까지의 관리가 70세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으로 본인의 요청이 있을 때 허락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통일신라 이래 시행되어 오던 치사제를 더욱 구체화하여 운영하였다. 관료는 70세에 이르면 당연히 치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치사제에 의해 사퇴하는 경우 3품 이하는 그 본직에 한 자급을 올려 주고, 2품 이상인 자는 왕의 윤허를 얻어 시행하였으며, 공신의 경우 봉조하(奉朝賀)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70세 이상인 관료가 국가의 중대사에 관계되는 인물이면 치사를 유보하였고, 절실하게 중용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치사제를 준용한 후더라도 재등용하였다. 치사한 신하에 대한 대우책으로 지급되던 치사록(致仕祿)이 세종대에 페지되었으나, 세조대에 검교직(檢校: 실지 사무는 보지 않고 이름만 있는 벼슬)에 의해 급록(級祿) 대우책이 확립되었다. 70세가 지난 당상관 이상의 고위관직에게는 봉조하록(祿)을 종신토록 지급하여 우대하였다. 또한 치사신에게는 매월 술과 음식을 내려주는 등의 사물(賜物)예우가 있었다.

사궤장제(賜?杖制)

통일 신라 시대 이후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이 청한 사임을 허락하지 않을 때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조선 시대의 안석은 양쪽 끝이 조금 높고 가운데는 둥글고 오목하였다. 지팡이의 머리는 비둘기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궤장의 하사는 연로한 대신을 대단히 우대하는 예법으로 하사받은 궤장은 여러 조회와 행사 때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궤장은 중국 고대로부터 양노의 한 방법으로 노인에게 몸을 편안히 하도록 내려준 것인데 신라의 김유신이 문무왕4년(664)에 처음으로 궤장을 받았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치사에 이른 신하들에게 국가의 중대사 때문에 게속 정사를 보게 할 때 궤장을 하사하였다.
관품이 정 1품 이상으로 덕행이 뛰어난 인물에게만 궤장을 하사하였으므로 이는 개인과 가문에 큰 영광이었으며, 국가적으로도 매우 귀한 일이었다. 따라서 궤장을 하사할 때는 궁중에서 술과 일등악(一等樂)을 함께 내려 궤장연을 성대히 베풀어 주어 경로의 예를 나타냈다. 연회 기간도 3일간 계속되는 경우도 있었고, 아울러 기영회도 개최되었다. 이밖에 안거(安車:편안한 수레)나 새서(璽書:왕의 옥새를 찍은 문서), 말을 내려 주어 포상하기도 하고, 궤장을 받은 신하의 자손을 특채하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