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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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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대사례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과 함께하는 최고의 활쏘기 행사로, 왕과 신하들은 이 행사를 통해 예악을 익히고 군신 상하간의 질서와 예를 확립하였다.
대사례는 자주 시행되지는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성종 8년(1477)에 처음으로 성균관에서 행하였다. 성종은 왕권 과시와 변경 방비문제와 관련된 대외적 위기극복 차원에서 대사례를 실시하였는데, 왕은 먼저 성균관에 나와 문묘(文廟)에 작헌레(酌獻禮)를 올리고 과거를 시행케 한 후 사단(射檀)에 나가 대사례를 행하였다. 그 후 중종 29년(1743), 영조 19년(1743)에도 대사례가 시행되었다. 영조는 왕권 강화와 민심 수습의 차원에서 대사례를 행하였는데, 그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하여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란 책이 만들어졌다.

대사례 행사과정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에 의하면, 왕은 문묘에 나가 작헌례를 올리고 명륜당에서 문제를 내어 문과시험을 보게한 후, 하련대(下輦臺)에 나가 대사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왕 앞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하여 60인을 뽑고, 다시 문과 전시(殿試)를 실시하여 6인을 뽑아 전례에 따라 문무과 합격자를 방방(放榜: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방을 써 붙임)하여 모든 행사를 끝내고 왕은 환궁하게 된다.

대사례의식

대사례 의식은 어사(御射:왕의 활쏘기)의 절차, 시사(侍射: 왕을 모시고 하는 신하들의 활쏘기)의 절차, 그리고 시사관 상벌로 나누어 진행된다. 우선 왕이 어좌에 앉으면 도열해 있던 신하들은 음악에 맞추어 4배로 알현의 예를 올려 의식을 시작한다. 왕은 4발의 화살을 대사악장(臺射樂章) 7절의 음악에 맞추어 쏘는데, 제 4절에 첫 살을 쏘아 매 음절에 한 발씩 하여 7절이 끝나면 4발을 모두 쏘게 된다. 왕이 쏘는 과녁은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표적으로 그린 것으로, 활을 쏘는 단으로부터 90보(약 110m 정도)떨어진 곳에 세운다. 왕의 화살 쏜 결과를 소리쳐 알리는데, 표적에 맞추면 획(獲), 위에 맞으면 양(揚), 아래에 맞으면 유(留), 왼쪽으로 가면 좌방(左方), 오른쪽으로 가면 우방(右方)이라 한다. 왕이 화살을 다 쏘고 자리로 돌아가면 수행하는 시사관들이 짝을 지어 음악에 맞추어 화살을 쏜다. 이들도 4발을 쏘며 과녁은 푸른 바탕에 사슴머리 표적으로 바뀌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맞추지 못하면 징을 쳐서 알렸다. 이때 시사관은 30명으로 종2품 이상의 의빈(왕족과 통혼한 사람)과 종친(왕의 친족) 10명, 정1품 이하의 문신 10명, 정3품 이상의 무신 10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시사관의 활쏘기가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 시상을 하거나 벌을 준다. 풍악이 울리면 왕에게 4배 한 후 상을 받았는 데 상으로는 표리(表裏:옷의 겉감과 안감)와 궁시 등이었고, 맞추지 못한 사람은 벌주(罰酒)를 마셨다. 이렇게 하여 시상이 끝나면 사용한 기구를 거두고 왕에게 4배 함으로써 모든 의식은 끝난다.

활쏘기의 의미

활쏘기는 전통적으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단순히 무예로서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사(射)를 ≪주례(周禮)≫에서 육예[六藝: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하나로 중시하여 심신의 수양을 가져오는 행위로 여겼다. ≪예기(禮記)≫의 '사의(射儀)'편에는 활쏘기를 인(仁)의 도(道)라고 보아, 활은 먼저 뜻을 바르게 세우고 몸을 바르게 한 후에야 쏘며, 쏘아 맞추지 못하여도 이긴 자를 원망하지 않고 자기 자세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활쏘기를 덕행(德行)이라 하여, 활쏘기는 남자의 일로써 예악(禮樂)으로 갖추어 행하여야 하며 이를 자주 하므로써 덕행을 베풀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어진 임금은 활쏘기에 힘썼고 활쏘기로 제후 경대부 선비를 뽑는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활은 고대로부터 중요한 무기였고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에 와서는 활쏘기가 무술로써 뿐 아니라 왕과 사대부들이 익혀야 할 하나의 예법으로서 중요시 되었다. 이는 예악의 이념을 중시하여 국가통치질서의 기본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조선사회의 기본 성격과도 맥락을 같이 하였다. 이처럼 활쏘기는 하나의 의례였기 때문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중 '군례'에 사우사단의(射于射檀儀: 왕이 사단에서 활쏘는 의례와 절차) 관사우사단의(觀射于射檀儀: 왕이 신하들의 활쏘기를 관람하는 의례와 절차) 향사의(鄕射儀) 등 사례에 관한 의식이 정리되어 있다.

향사례

향촌에서 대부(大夫)나 지방관이 주관한 활쏘기 행사이다. 향사례는 중국 주나라에서 성행하였던 의식으로 ≪주례(周禮)≫나 ≪의례(儀禮)≫에 그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향사례는 지방의 향대부나 지방관이 주관하며, 인재를 천거할 때 행하거나 백성들을 모아 예법에 따라 활쏘기를 익히게 하는 활쏘기 의식이었다.
우리 나라에는 고려 말 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향음주례(鄕飮酒禮)와 함께 향사례에 관한 지식이 알려진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군례(軍禮)의식 중 하나로 향사례를 규정하고 있다. 향사례는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개성부 및 여러 도, 주, 부, 군, 현에서 효, 제, 충, 신(孝, 悌, 忠, 信)의 행적이 높고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을 주빈으로 초대하여 예악(禮樂), 음주 및 활쏘기를 행하여 예의를 엄숙히 하는 의식이었다.
이러한 향사례는 일종의 경로잔치로 노인들을 초청 음식과 음악으로 대접하는 의식인 양로례(養老禮)와 함께 향촌사회의 주민 교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향음주례와 함께 향사례는 국초에 ≪오례의≫에 규정이 있으면서도 실제로 잘 시행되지 않았는데 성종대에 이르러 대사례를 실시하고 이를 본받아 모든 읍에까지 향사례를 실시할 것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