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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관아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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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의 구성

관아(官衙)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원(官員)들이 정무를 보는 건물의 총칭으로, 관서(官署)라고도 하며, 또한 순수한 우리말로는 '마을'이라고 하는데, 이는 좁은 의미로 관아에 해당한다. 관아의 모든 건물은 주인의 신분을 표현했으며 관아 안에서 각 신분의 영역은 엄격히 분할되어 있었다. 홍살문, 외삼문, 그리고 내삼문 등의 대문과 담장을 통해서 공간 분할이 이루어졌다. 관아 안에는 수령이 집무하는 정청(政廳)인 동헌(東軒)과 그의 식솔이 거주하는 사적 공간인 내아(內衙), 국왕의 위패를 모시고 사신 및 여행자를 맞이하는 객사(客舍), 지방교육을 담당한 향교(鄕校), 그리고 좌수(左手), 별감(別監) 등의 지방양반이 고을의 징세에 관여한 향청 (鄕廳), 향리인 육방(六房)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作廳), 회계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公須廳), 노비들의 관노청(官奴廳), 죄인을 가두는 형옥(刑獄)등이 있다. 관아는 왕궁이나 사찰의 큰 법당에 버금가는 서열로 그 지방의 생활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동헌(東軒)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로 관찰사, 병사, 수사(水使), 수령(守令)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하여졌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西軒 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하여서 동헌으로 불리웠다. 군현의 크기와 시대에 따라 건축의 양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조선 후기 건물인 경우 일반적으로 3,4층의 석축 위에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 구조에 팔작 지붕의 위엄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보통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1,2칸식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관아의 모든 건물에서 마루는 방보다 훨씬 위엄있는 공적 공간이다. 또 방의 전후에는 1칸식의 툇마루를 만들어서 접견 공간 역할을 하였다. 동헌은 그 지방 최고 실력자인 수령의 지위에 맞게 향청, 작청보다 규모가 크고 공들여 치장했다. 동헌과 내아는 담이나 행랑으로 격리되어 있고, 협문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내아는 현감의 가족 생활 공간이므로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이루고 있다. 즉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속되며 주위에는 곳간 등의 부속채가 딸려 있다. 동헌은 객사, 향교와 함게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로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고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용인 민속촌에 복원된 관아 건물은 동헌과 내아, 문루 등이 잘 복원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객사(客舍)

조선 시대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관사(館舍), 객관(客館)이라고도한다. 객사는 관아에서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다. 지방관(수령)은 왕의 친정(親政)을 나타내는 이 건물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지성껏 참배하여 왕에 대한 충성과 어진 정치를 다짐했다. 객사 앞들에서 대궐을 바라보고 올리는 의식을 망궐례(望闕禮)라고 하였다. 중앙정부는 이런 예식을 통해 지방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삭망례(朔望禮)는 수령의 의무였으며, 마치 양반들이 사당에 고하듯이, 고을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나, 임지에 부임하거나 할 때 모든 것들을 반드시 객사에 고하였다.
동시에 객사는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낸 사신이나 외국 사신이 오갈 때 흔히 이용되었다. 서울에서 내려 온 암행어사나 순시차 나온 감사들은 객사의 좌우 날개 칸에 머물면서 잔치에 참여하거나 수령의 정치를 감찰하였다. 이 곳의 관리는 아전들이 맡아 하였는데 오고 가는 사신들 대접대문에 인근 고을의 사람들이 동원되는 등 폐단 또한 적지 않았다. 객사는 본질상 왕실 사당인 종묘의 축소판이자 살아 있는 국왕의 생사당(生祠堂)이다. 그래서 읍의 맨 중심이며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 보다도 격이 높은 건물이다.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 날개칸)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 외문(外門) 옆 문에 무랑(무廊)등이 부속되며,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며 좌우의 익실은 온돌로 하였다.

참고문헌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 사계절,2000)

향청(鄕廳)

조선시대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이아(貳衙)라고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 설치된 유향소(留鄕所)를 임진왜란 이후 대개 향청이라 불렀다. 조선 초기의 유향소는 고려시대의 사심관제(事審官制)를 모방하여 지방군현의 유력인들(재지사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으로서 향촌사회의 자치적 기구라 할 수 있다. 본래 설치목적도 지방의 부패한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鄕風)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鄕村)교화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점차 백성들에게 군림하고 위엄을 세우는 기관으로 변하여 그 작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더구나 수령을 능멸하는 등 수령권과의 충돌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였다. 그 뒤 사림파(士林派)가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1488년(성종 19)년에 다시 설립된 유향소는 사림파의 향촌교화라는 본래 목적과는 관계없이 훈구파 세력이 장악하면서 그 비리가 속출하였다. 사림이 중앙정계를 완전 장악한 선조 때부터 이에 대한 정비를 가하여 마침내 1606년(선조 36) 경재소를 혁파하고 좌수임명권도 수령에게 넘겼다. 이로써 유향소는 그 성격이 크게 달라져 수령휘하에서 그를 보좌하여 행정실무의 일부를 집행하는 기구가 되었다. 이 때부터 명칭도 향청 또는 이아라 하였으며 좌수는 수령의 수석보좌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제 좌수는 면?이(面,里) 향임(鄕任)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산송(山訟)이나 군역?부역에 관한 각종 송사를 처리하며 환곡을 취급하는 등, 그 지역 민생의 안위를 좌우하는 중요한 임무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정과 수뢰 등을 자행하여 민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효종 때부터는 향청 좌수에 대한 처우를 향리로 격하시키자 문벌을 자랑하는 집안에서는 좌수취임을 사양하였다. 하지만 향리대접을 감수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려는 향원(鄕員)이 아닌 자들이 향청을 차지하였으니 이들을 비향원으로 향족(鄕族)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방토호들은 의중의 인물들을 향소(鄕所)로 추천, 임명하게 하여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향족이나 향리들도 교체가 빈번한 수령보다 이들 원향(元鄕 : 지방에 붙박이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토호)들을 두려워하여 지방세력은 강하게 지속되었으며, 중앙정부의 제시책을 부정한 방법으로 침식하여 지방행정을 무력화시키기도 하였다.
향청은 양반의 지위가 견고했던 16세기 경에는 작청을 통할하고 수령을 견제할 정도였으나 18세기 이후에는 동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도 축소되었다. 이것은 사족들이 관권에 예속되는 것을 기피하여 서원이나 향교로 세력 근거지를 옮겨 간 추세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 사계절,2000), http://koreanhistory.or.kr

작청(作廳)

조선시대 지방의 각 관청에 근무하던 하급관리(향리)들이 일하던 곳으로, 향리들의 집무처는 공식적으로 인리청(人吏廳), 아전청(衙前廳), 성청(星廳), 또는 이청(吏廳)이라 하였지만, 일반적으로 작청(作廳)이라 일컬었다. 아전(衙前)이라는 말은 군수, 현감 등의 수령이 근무하는 정청(正廳) 앞에 이들의 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청 앞에 있는 이방청(吏房廳)을 비롯한 육방청(六房廳)이 외아전의 주된 근무처였다. 또 작청과 나란히 향리의 집무장소로 읍사(邑司)가 있었다. 이 읍사는 고려이래 조선시대에도 국가로부터 호장(戶長)이 지위와 권위를 보장 받는 인신(印信)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여 지방지배를 원활히 하게 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읍사는 조선 초기 작청과 함께 각지의 향리 조직과 기능의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향리는 읍사 및 작청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향역(鄕役)에 드는 비용의 조달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아 전체의 경비제공을 부담하여야 했으며, 이행하지 못할 때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작청에는 6방이 분설(分設)되어 기관을 중심으로 한 호장 이외의 일반 향리가 각기 직무를 분장하였다. 조선 전기까지는 육방 체제보다는 호장이 중심이 되는 공형(公兄)체제가 유지되었다. 중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이방(吏房) 중심의 육방 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하여 말기에 이르러서 완전한 육방체제가 정립되었다. 이는 지방고을 읍사(邑司)의 기능이 위축되고 작청(作廳)이 지방행정의 중심기구로 변화해가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청(鄕廳)의 임원들이 육방을 겸하였다. 그리고 작청은 관아 배치상 외삼문 안쪽에 위치하였다. 원래 동헌처럼 중문 안쪽에 배치되는게 통례였으나, 후기에는 내삼문 바깥으로 밀려났다. 향리의 정치적 위상에 따라 동헌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한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사계절,2000),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향교(鄕校)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로 관찰사, 병사, 수사(水使), 수령(守令)들의 정청으로서 지방의 일반 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하여졌다. 지방관의 생활 처소인 내아(西軒 이라고도 함)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하여서 동헌으로 불리웠다. 군현의 크기와 시대에 따라 건축의 양식이 조금식 다르기는 하나, 조선 후기 건물인 경우 일반적으로 3,4층의 석축 위에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 구조에 팔작 지붕의 위엄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다. 보통 중앙 3칸은 마루로 된 대청이며, 양쪽에는 1,2칸식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관아의 모든 건물에서 마루는 방보다 훨씬 위엄있는 공적 공간이다. 또 방의 전후에는 1칸식의 툇마루를 만들어서 접견 공간 역할을 하였다. 동헌은 그 지방 최고 실력자인 수령의 지위에 맞게 향청, 작청보다 규모가 크고 공들여 치장했다. 동헌과 내아는 담이나 행랑으로 격리되어 있고, 협문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내아는 현감의 가족 생활 공간이므로 사대부가의 안채 모습을 이루고 있다. 즉 안방, 대청, 건넌방, 부엌, 찬방 등으로 구속되며 주위에는 곳간 등의 부속채가 딸려 있다. 동헌은 객사, 향교와 함게 지방 관아의 핵심 건물로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고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용인 민속촌에 복원된 관아 건물은 동헌과 내아, 문루 등이 잘 복원되어 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형옥(刑獄)

조선시대 감옥은 대개 둥근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관아 입구에 있었다. 감옥은 남녀를 구분하였고 중범과 경범을 가려 수용하였다. 국가는 사회 기강을 위해 모반이나 강상범과 같은 범죄는 연좌형으로 처벌하였다. 도둑 중에서도 왕권을 가로채려는 자들은 극형에 처하였다. 삼강오륜을 인륜의 기본으로 받드는 조선왕조는 부모의 장례 때는 중죄인이 아닌 한 일시 석방할 수 있도록 법률로 보장하고 있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감옥시설은 불결하였지만 인간적인 면모는 더 있었다. 형벌에서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것은 태형(笞刑)이다. 태는 볼기를 칠 때 쓰는 회초리이다. 장형(杖刑)과 곤장은 몽둥이 종류로 볼기에 내리쳐서 고통을 주는 형벌이다. 수사와 신문과정에 고문이 있었다. 그러나 고문은 일반 피의자들도 사흘 안에 연거푸 두 번 당하지 않았고 한 차례에 30대가 넘는 벌을 받지 않았다. 수령은 태 50대이내는 혼자서 처리 할 수 있으나 장 이상의 범죄는 감사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다. 권한을 넘어선 지나친 형을 가하여 목숨을 잃을 경우 장 100대와 영구히 관직에서 추방되었다. 과거에는 관아의 수령만이 아니고 지방 양반들도 형벌권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양반에게 불손하게 군 불경죄는 동네에서 잡아다 벌하였다. 양반의 징벌권은 형법에 보장된 게 아니고 각 지방의 향약(鄕約)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17세기에는 향청에서 징세를 담당하는 양반인 면, 이임은 태장을 쓸 수 있었다. 이것은 관권(수령권)과 지방 자치(양반) 권이 일정부분 타협하면서 징세시 효율을 꾀하였다. 18세기 이후로는 지방 양반들의 형벌권은 약화되어 일반 백성에 대한 영향력은 감소되어 가고 수령지배체제로 강화되어 갔다.

참고문헌 : 조선시대 생활사(안길정, 사계절,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