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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궤의 재현신분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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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변화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중인

중인은 두 가지 용례가 있다. 하나는 한성의 중심가에 살던 역관(譯官), 의관(醫官), 산관(算官), 율관(律官), 음양관(陰陽官), 사자관(寫字官), 화원(畵員), 역관(曆官)등 기술관(技術官)을 총칭하는 협의의 중인이요, 다른 하나는 기술관뿐만 아니라 향리(鄕吏), 서리(胥吏), 서얼(庶孼), 토관(土官), 장교(將校), 역리(驛吏), 우리(郵吏), 목자(牧子)등 경외(京外)의 행정실무자들을 총칭하는 광의의 중인이다. 이 가운데 넓은 의미의 중인은 15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 하나의 독립된 신분층을 이루었다. 양반과 상민의 중간에 있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경외 관청의 서리와 향리 및 기술관은 직역을 세습하고 신분내에서 혼인하였으며 관청에 근접한 곳에서 거주하였다. 이러한 중인층은 양반지배 체제 하에서 양반들로부터 멸시와 하대를 받았으나 대개 전문적인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세습적으로 담당하였으므로 실속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후기 사회변화속에서 끊임없는 중인층의 통청운동을 전개하였고, 시대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잘 적응하여 근대화에 있어서는 중인층의 진출이 어느 신분층보다도 뚜렷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이성무,일조각,1995),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

중인층은 조선시대의 다른 어떤 신분층보다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위로는 양반층과 비슷한 지위에 있는 축들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는 천인과 비슷한 지위를 가진 축들도 있다. 이것은 중인층이 천차만별의 직역(職役)을 가지고 있어서 직역에 따른 사회적 대우와 국가의 반대급부가 달랐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신분은 직역을 담당하는 전제가 되지만 반대로 직역에 의하여 신분이 규정되기도 하였다. 중인의 내부구조가 복잡성을 띠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중인층이 이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구성하는 신분간의 차이도 컸다. 이는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에 잘 나타난다. 같은 중인층 안에서도 정3품당하관(正三品堂下官)이 한품인 기술관과 정5품이 한품인 토관과 정7품이 한품인 서리의 구별이 있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서얼소통운동(庶孼疏通運動)

서얼은 사족의 혈통을 받았으면서도 모계가 정처(正妻)가 아닌 첩이었기 때문에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게 된 존재였다. 서(庶)는 양첩의 자손을, 얼(孼)은 천첩의 자손을 뜻하는 것이다. 서얼차대가 관념적, 법제적으로 강화된 것은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유학사상이 국가의 지도이념이 되고 사대부관료들에 의해 지배신분의 양분화가 이루어 지면서 엄격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 서얼의 수는 증가하여 이들에 의한 서얼통청운동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정조는 즉위하면서 [정유절목(丁酉節目)]을 반포하여 규장각 검서관에 서얼들을 등용하여 서얼들의 현직진출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드디어 19세기에 들어 고종19년(1882)에는 서얼금고 내지 서얼차대에 관한 조항을 사문화시켰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 (이성무,일조각,1995),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위항문학(委巷文學)

조선 후기 서울을 중심으로 중인 이하 계층이 주도한 한문학 활동이다. 한문학은 양반사대부들이 한자를 빌려 그들의 정서와 생활감정을 표현한 상층계급의 예술활동이라 할 수 있는데, 18세기부터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 이를테면 중인 이하 상인, 천인까지 포함하는 하급계층이 한문학 활동에 대거 참여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의 한문학 활동이 시단의 큰 흐름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른다. 당시 양반사대부가 아닌 계층인 중인 이하 하급계층을 위항인(委巷人)이라 하였으므로 위항문학이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이성무,일조각,1995),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천인

조선시대 천인에는 노비와 함께 백정(白丁), 광대(廣大), 사당(社堂), 무격(巫覡), 창기(娼妓), 악공(樂工)등이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이들은 모두가 천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적으로 천시되었을 뿐이다. 즉 노비와 그 노비에서 파생된 창기, 의녀, 악공 등은 명실상부한 천인이었으나, 백정, 광대, 사당, 무격은 원래 천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직업이 사회적으로 천시되면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까지 천시되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천인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 양역을 담당하는 양인들의 수가 줄면서 이미 노비는 점점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노비의 수가 줄어든 것은 임진왜란때 노비안이 불타 버려서 이산해 버린 때문이지만 이외에도 노비로서 양역인 군역에 종사하거나 군공(軍功), 납속등을 통해 양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비록 신분이 해방되지 않은 채 노비안에 기재되어 있는 공노비라 해도 실제로 아무런 신공을 내지 않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양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경우는 사노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몰락해 가는 양반들이 그들의 사노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공노비를 국가 자신이 해방시켜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순조 원년(1801)에 노비안을 국가 스스로 불살라 버림으로써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노비가 천민의 신분을 벗어나서 양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 (이성무,일조각,1995),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백정(白丁)

백정은 고려시대 이래 북방계의 이민족 출신으로 간주되어 온 화척(禾尺)이나 재인(才人)을 세종대에 토지에 정착시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개칭한 것이었다. 조선사회에 정착한 이들은 유목민적 생활의 연장으로 유기제조와 판매, 육류판매등의 상업에 종사하여 그들이 제조한 유기를 공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수렵, 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 도살의 기술을 살려 우마(牛馬)의 도살업에도 진출하였다. 이들은 유랑에 익숙하였던 관계로 영농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고 일반 평민들은 천한 이들과 혼인하기를 꺼려하였다.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각종의 부담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평민중에서도 생활이 곤궁해지면 백정으로 변신하는 자의 수가 매년 증가하여 백정의 수는 점점 증가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노비 소생의 자녀가 신분, 역처(役處), 상전(上典)의 결정에 모계를 따르도록 하는 법이다. 조선후기 양역인구가 점차 감소하자 노비소생 자녀에 대한 결정은 노(奴)의 양처소생에 대해서 1669년에는 종량(從良), 1679년에는 환천(還賤), 다시 1684년에는 종량, 1689년에는 환천 등 번복이 되풀이 되다가 1731년(영조7년)에는 종모법으로 확정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조선시기 촌락사회사 (이해준, 민족문화사, 1996)

양반중심신분제

양반은 원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었는데 뒤에 지배계층인 사족을 의미하는 말로 변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가 대부분이었으며 과거(科擧), 음서(蔭敍), 군공(軍功)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급관직을 독점하였다. 또 양반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특권을 보장받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양반은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가운데 사족(士族)에 해당되는 최상급의 사회신분으로서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이었다. 또 유학을 업으로 하고 아무 제한없이 관료로 승진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실제로 중요한 관직과 제반 특권은 모두 이들이 독점하였으며 명교(名敎)와 예법(禮法)을 준수하는 사회의 지도적 계급으로서의 정신적 의무만을 지녔던 것이다. 그들은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관료 내지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이성무,일조각,1995),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양반계층분화

조선초기 양반중심 신분체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17세기 이후 점차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면 격심한 신분의 상승과 하강현상으로 인하여 양반이라고 불리워지는 신분층의 사회적 존재 의의가 흐려져 가는 추세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몰락하는 양반의 수가 늘어난 때문이었다. 벌열정치(閥閱政治)가 행해지면서 소수의 노론가문만이 정권을 독점하였고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척족에 의한 정권의 독점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정권에서 소외된 많은 양반들은 지방으로 낙향하여 향족(鄕族)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몇 대를 이어내려 오면서 관직을 얻지 못한 양반 중에는 소작농이 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양반으로서의 권위를 유지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한 소위 잔반(殘班)이었다. 그리고 이 잔반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비양반계층에 의한 공명첩(空名帖), 관직매매, 족보위조 등을 통한 양반의 수는 증가하는 추세였다. 그리하여 양반 중에는 문벌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반임을 모칭(冒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면서 같은 양반 중에도 대가(大家), 세가(世家), 향반(鄕班), 잔반(殘班)의 구분이 생기고, 이에 따라 벌열(閥閱)이 아닌 미천한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없어 양반계층간에도 분화와 차별이 생겨났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이성무,일조각,1995),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

서민층의 성장-상민

상민은 보통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는 생산계급으로서 납세, 공부, 군역, 요역 등을 주로 담당하는 계층이다. 특히 군역은 양인을 주체로 하며 실제 입번(入番)하는 군정과 그 비용을 지변하는 봉족(奉足)과의 연대로서 단위를 이룬다. 당시에는 피지배층 가운데 양인, 천인의 신분상 구별이 있어 천인은 천역을, 양인은 양역을 담당하되 양인으로서 천역을 담당하는 수도 있어 이것을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 하였다. 상민은 법제적으로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며 의복, 가옥, 일상거동 등에서 관직이 없는 양반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으로 인하여 실제 그들의 관계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들어 농업, 상업, 수공업등이 발달하면서 서민들중에는 경제력을 쌓은 계층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납속(納贖)이나 향교에의 모속(冒屬), 호적의 개변(改變)등을 이용하여 신분상승을 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양반사회연구 (이성무,일조각,1995), 한국사 34 -조선후기의 사회- (국사편찬위원회, 1995)